한 나라의 역사가 지켜낸 음식에는 생존의 수단을 뛰어넘어 민족성, 그리고 철학이 함축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PD 탁재형이 전하는 화끈할 만큼 매운 중국 후난의 요리를 소개한다.
10분에 한 번꼴로 우렁찬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커다란 화환을 멘 두 명의 경찰관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들 뒤를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뒤따르고, 커다란 동상 아래 도착한 이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깊은 절을 올린다. 개중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다. 그들을 굽어보고 있는 것은 ‘마오쥬시’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마오쩌둥의 근엄한 얼굴이다. 후난성 창샤에서 서남쪽으로 80km 떨어진 사오산. 아무런 특별함도 없는 이 산골마을엔 연간 1000만 명의 방문객들이 몰려든다.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10.1m의 마오쩌둥 동상. 그리고 그가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이다. 5000년을 이어온 봉건제도를 깨뜨리고 새로운 중국을 만든 사나이, 마오쩌둥. 그는 천안문 문루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던 순간에도, 후난 사투리를 버리지 못한 후난인이었다. 본래 후난 사람은 ‘후난이 없으면 군대를 이룰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패기가 있고 성격이 불 같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중국 8대 요리의 하나인 후난 요리는 매운맛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마찬가지로 매운 것을 즐겨 먹는 쓰촨성 사람들과 비교해 이런 농담이 있을 정도다. ‘후난 사람은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쓰촨 사람은 맵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이 말만 놓고 보면 매운맛 대결에서 쓰촨 사람들이 한 수 위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매운맛의 종류가 조금 다르다. 쓰촨은 ‘마라(麻辣)’라고 하여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매운맛이고, 후난은 ‘씬라(辛辣)’라고 하여 혀끝이 아린 매운맛이다. ‘씬라’의 매운맛이 궁금하다면, 펑황구청(봉황고성) 같은 후난의 유명 관광지에서 팔고 있는 ‘샹떠우푸’를 먹어보면 된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 위에 두부를 놓고 지지다가 고추와 후추를 혼합한 양념을 뿌리는데, 약간 떨어져서 보면 두부가 일으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출동한 느낌이다. 정말 뿌리고, 뿌리고 또 뿌린다. 샹떠우푸를 먹기도 전에 자욱한 양념 안개에 재채기를 터뜨리고 말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오쩌둥 역시 “매운 것을 먹을 줄 모르는 사람과 혁명을 논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고추가 듬뿍 들어간 후난 요리를 즐겼다. 그가 가장 좋아한 요리 중 하나는 홍샤오러우(홍소육)였다. “사흘에 한 번 홍샤오러우를 먹을 수 있다면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였다고 하니, 이 요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창샤 시내에 위치한 마오쟈판띠엔의 총주방장이 꺼내 든 삼겹살은 한눈에 봐도 최상급이었다. 두툼한 크림색의 비계는 왠지 티스푼으로 떠먹어도 맛있을 것처럼 여겨졌고, 분홍빛의 육질은 촘촘히 가지를 친 지방질과 어우러져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총 주방장이 직접 칼을 잡는 것이 좀처럼 드문 일인지, 주방의 모든 직원이 넋을 놓고 구경하는 사이 현란한 칼질이 시작되었다. 무협영화 <용문객잔>에 등장 하는 주방장처럼 칼을 들고 무공의 초식을 선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몇 번의 간결한 칼질로 고기를 딱 먹기 좋은 크기로 재단하는 솜씨에서 고수의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홍샤오러우는 마오쥬시께서 다음 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전투에서 승리해 장병들을 치하할 일이 있을 때 반드시 드셨던 음식이죠. 저희 식당에선 마오스 홍사오러우(毛式紅燒肉)라고 해서, 마오쥬시가 생전에 즐겨 드셨던 그대로의 홍샤오러우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도톰하게 잘린 고기를 튀겨내며 그가 한 말이었다.
끓는 기름 속에서 표면을 살짝 익힌 돼지고기는 이제 후난 요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양념들과 만난다. 팔각과 붉은 고추, 마늘과 생강. 여기에 간장과 고추기름을 더해 센 불에서 졸이고, 이것을 다시 압력솥에 넣어 한참을 쪄내야 비로소 선명한 붉은빛이 감도는 홍샤오러우가 탄생한다. “홍샤오러우를 담는 그릇은 저희가 직접 개발한 것인데, 아래에 더운물을 넣어 드시는 내내 고기가 식지 않습니다.” 허리가 불룩한 도기 그릇에 소담스럽게 담긴 홍샤오러우를 보자니 입안에선 수문을 연 평화의 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자, 상황은 악화되었다. 침샘의 폭주에 육즙의 홍수가 더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분간,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입안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풍부한 향신료의 향과 녹아내린 지방의 농후함, 그리고 아릿한 고추의 매운맛을 어떻게든 기억 속에 붙잡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이 식당은 1959년, 마오쩌둥이 고향인 후난성 사오산을 찾아왔을 때, 그에게 앞으로 고향을 찾아오는 혁명 동지들을 잘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던 탕뤼런이라는 여인이 만든 것이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 식당은 대박이 났다.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 참배객들이 너도 나도 마오쩌둥이 먹었던 음식을 맛보기 원했기 때문이다. 한 시골 여인을 대규모 레스토랑 체인의 CEO로 만들었듯이, 적어도 후난에서 마오쩌둥은 재물의 신이다. 각 가정에는 ‘감실’이라 하여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 있는데, 후난에서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도 함께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마오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었던 민초들이 마오가 그토록 배격 하고자 했던 방법으로 그를 숭배하는 현실. 어쩌면 이것이 민초들이 마오에게 돌려준 복수가 아닐까.
닝샤오야오 씨와 그의 노모 탕친위 씨를 만난 건, 이해하기 힘든 중국의 현실로 복잡한 머리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홍장구상청의 골목을 걷고 있던 도중이었다. 명나라 때 지어진 성벽 위의 좁은 공간에 놓인 화분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물을 주는 풍경이 재미있어서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눈이 마주치자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어디에서 오셨다고요? 아… 한국! 한국 사람들도 매운 것 좋아하죠? 마침 식사 때이니 좀 드시고 가세요.” 만들어진 지 400년이 넘은 전통 가옥 ‘음자옥’의 내부를 촬영하고 싶었던 터였다. 냉큼 집 안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1층 중앙에 모신 조상의 신위와 함께 혈색 좋은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소담스럽게 담긴 밥 한 사발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아침저녁으로 조상님들께 새로 만든 음식을 바치죠. 그러고 나서 온 가족이 함께 나눠 먹습니다.” 부엌 쪽이 부산스러워지더니 부인이 눈이 부실 정도로 새빨간 양념으로 뒤덮인 생선 요리를 들고 나온다. “홍강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완라쟈오라고 하는 요린데, 매워서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한 젓가락 입으로 가져가니, 피로로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번쩍 ! 하고 정신을 차릴 정도로 맵다. 그래도 매운맛으로 단련이 되었다고 하는 한국인이기에 망정이지, 서양 사람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주저 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찬을 드셨으니 밥을 드셔야죠. 그리고 술도 한잔. 사양하시기 없습니다. 하하.” 불기운이 남아 있는 혀 위에 50도의 알코올이 더해지니, 이젠 정말 입김으로 담뱃불을 붙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밥도 드시고 술도 드셨으니, 아예 주무시고 가시는 건 어떠신가요? 저희 모친께서 꼭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순간, 나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은 매워서였을까, 감격해서였을까. 다음 날의 촬영 일정 때문에 그의 집에 머물 수는 없었지만, 그 화끈한 인정에 나는 그만 마음속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아, 이 뜨거운 사람들. 혁명도, 파괴도, 숭배도, 인정도. 마오쩌둥의 말을 빌려 한마디만 해보자.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과는 정을 논하지 말라.”
글 탁재형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