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이들이 록 페스티벌이라는 키워드로 깊고 견고한 연대감을 형성한다. 올해로 17회를 맞이하는 후지 록 페스티벌은 여기에 독립, 협동, 자연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덧입히며 정체성을 키워나가고 있다.
1 여느 록 페스티벌에 비해 평화롭고 한가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후지 록 페스티벌 현장. 2,3 각자 가져온 캠핑용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모습 또한 신선하다. 잔디밭에 쓰레기가 뒹굴지 않는다는 점도.
어떤 뮤지션의 공연을 봐야겠다는 목표 의식을 장전한 채 록 페스티벌 공연장으로 향하곤 한다. 국내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공연을 몇 년이라도 먼저 본다는 장점이 해외 록 페스티벌까지 기꺼이 찾아가는 이유니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런던 그래머, 다크사이드의 공연을 보고 싶었고 동행한 공연 기획자들은 아케이드 파이어의 공연을 기대했다. 20여 년째 공연을 봐왔고 뮤지컬, 연극, 공연 등 다양한 무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지만 막이 열리는 찰라의 긴장감 앞에 내성이란 없었다. 관객들의 함성과 열기, 보라는 듯 포효하는 뮤지션의 에너지가 만나는 비등점에서 먼 길을 찾아온 고단함은 그저 과거형이었다.
1 조명이 설치된 밤의 숲길을 걷다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전혀 다른 세계로 통할 것 같은 동화적인 환상을 느낀다. 2 미래의 록커를 꿈꾸는 악동 뮤지션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는데다 캠핑 시설도 훌륭한 편이어서 가족 여행으로도 추천할 만하다. 3 관람객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반가운 식당이 공연장 곳곳에 감초처럼 자리 잡고 있다.
후지 록 페스티벌은 제1회 페스티벌이 후지산에서 열린 것에 기인한 명칭이지만 이후부터는 나카타현에 위치한 나에바 Naeba 스키리조트에서 열리고 있다. 3박4일 동안 열리는 이 공연의 변별점이라면 대자연의 혜택과 공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관람객들에게 자연환경 보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고지하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가령, 메인 스테이지는 숲 속 곳곳에 흩어져 있고 그 사이마다 음식과 음료를 즐길 수 있는 코너가 있는 것까지는 여타의 공연장과 비슷한 모습. 그러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과 아기자기한 설치물로 보는 재미를 더한 것, 그리고 산속을 느긋하게 걷다가 공연의 열기에 달구어진 몸을 식힐 수 있도록 계곡을 개방한 것, 또 하나는 사이트에 입장할 때마다 쓰레기 봉투를 나누어주고 개인 쓰레기를 버릴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은 오래도록 남을 후지 록 페스티벌의 기억에 일조했다.
1 설치 미술과 행위 예술이 결합된 듯한 무대를 선보였던 플레이밍 립스의 공연. 2 관객으로부터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았던 아케이드 파이어의 공연.
작년에 다녀온 글래스톤베리와는 비교 불가한 청정 공연장이었다고 할까. 물론 글래스톤베리의 경우,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통제를 넘어선 부분도 있겠지만 나에바 스키리조트에 모인 관람객들은 자연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누구 한 사람 엇나가지 않고 주최 측이 권하는 룰을 엄수했다. 마지막 날에는 관객이 직접 쓰레기 분리 수거에 참여하여 작업을 마치면 기념품을 증정 하는 착한 이벤트가 열렸는데 신념과 행동이 하나로 이어진 후지 록 페스티벌의 분명한 지향점을 볼 수 있었다.
1 쓰레기 분리 수거를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모습. 2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공연장에서는 자연을 보호하자는 팻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3 귀여운 티피 텐트 앞에서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캠퍼.
물론 공연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불러온 아케이드 파이어의 공연을 보면서 군중 위에 군림하며 카리스마를 외치는 록 뮤지션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적인데 겸손하고 관객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최근 사이 다소 후덕해진 윈 비틀러의 모습조차 무시하게 만들었으니까. 인디 밴드로 출발해 2011년 그래미상까지 수상한 이들은 무대에 오르는 수많은 신인 밴드들의 롤모델로도 충분했다. 그 외에도 1997년 내한 공연 이후 17년 만에 만나는 블러 Blur의 데이비드 얼반 David Albarn은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혼자 반가웠고 예상치도 못한 오노 요코의 공연도 물개 박수를 치게 만들었다. 밤이면 촛불이 켜진 정원에 앉아 기도에 빠진 사람들, 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 잔디밭에서 낮잠을 자거나 체조를 하는 사람들. 그 흔한 기업 광고판 하나 보이지 않는 후지 록 페스티벌 공연장은 공연을 본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공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견인할 이 다음의 공연이 더욱 굳건해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편집장 노은아 | 구술과 사진 로빈 김(Robin Kim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