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카프카스 지역에는 몽골 유목민의 후한 인심이 있다. 고기의 크기부터 다른 러시아식 양꼬치 샤슬릭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푸짐하게 내어주는 유목민식 손님상을 소개한다.

모스크바를 떠난 지 사흘째. 가도 가도 변하지 않던 길가의 해바라기 밭 풍경은 조금씩 굴곡진 산지 지형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2400, 국내에서는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 앞에 쓰일 일이 거의 없는 숫자. 하지만 카프카스 산맥에 둘러싸인 체겜 지역에 도착하기 위해선 이 네 자리의 숫자 뒤에 km를 붙여 아스팔트 도로를 실선으로 만들어야 한다. 집에서 가장 먼 도시라고 해도 해 뜰 때 떠나면 해 지기 전에 닿는 반도 출신의 인간은 이 단순 무식한 2차원 운동방정식 앞에 쉽사리 고분고분해지지 못한다. 흠씬 매타작을 당한 뒤에야 사람을 태울 마음이 드는 야생마처럼 사륜구동 자동차의 뒷자리에서 영혼이 탈탈 털리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그 거리가 사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일행이 모스크바에서부터 타고 간 자동차는 ‘우아즈’라는 이름의 러시아제 지프였다. 그 이유는 강력한 성능이다. 출력, 등판 능력, 험로에서의 신뢰성 등 거친 자연 속에서 이 구닥다리 자동차가 발휘하는 능력은 엄청나다. 그리고 그만큼 카프카스의 산자락은 보통 자동차를 가지고 설렁설렁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어에서는 백인종을 가리켜 ‘코케이시언 caucasian’이라고 표현한다. 카프카스의 영어식 이름인 ‘코카서스’에서 기원한 인종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카프카스 지역은 아프리카를 벗어난 인류가 일찍부터 자리 잡은 터전이었다.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해발 5642m)가 지붕으로 펼쳐진 이 산악 지대는 중동에서 아시아의 평원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으로 향하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교역로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곳은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 되었다. 산악 교통로를 틀어쥐고 통과하는 상인들에게서 통행세만 걷어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자리아, 발카르, 키예프 공국, 러시아 등 이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은 끊임없이 교체되었다. 그때마다 전란이 계속되었지만 이 지역에서 삶의 기본적인 형태와 윤리는 바뀐 적이 없다. 그것은 바로 유목민의 삶 그리고 관대함이다.

몽골 유목민의 후한 인심
칠월 염천의 파김치처럼 흐느적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체겜의 엘뜌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지르 씨는 온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띠고 두 팔을 한껏 벌린 채 우리를 맞이했다. 동행한 모스크바 고리키 대학교의 박정곤 교수에겐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1년 전, 그는 이 지역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발카르 민족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엘뜌뷰를 찾아왔다. 카프카스 사람들에게 인연이 주는 무게는 도시 사람들의 그것과 같지 않다. 나지르 씨에게 박 교수는 멀리서부터 찾아온 ‘꾸낙’, 즉 친구인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찾은 손님을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아요. 그때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양을 한 마리 잡아서 구워주시더라고요. 헤어질 때도 새끼 양 한 마리를 주려 하기에 ‘제가 지금 가져갈 수는 없고, 여기에 맡기고 가겠습니다’ 하고 떠나왔거든요. 아마 그 녀석도 저 산 어디쯤에 있을 겁니다.” 박 교수를 가운데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차에 부인 사피나 씨가 환대의 의미를 담은 음식을 들고 나왔다. 보드카를 넘치도록 따른 잔과 양젖으로 만든 요거트인 ‘아이란’, 그리고 고추로 양념한 쇠고기 수프인 ‘카르초’다. 싱글벙글하며 잔을 내미는 나지르 씨의 눈을 보고 그 잔을 비우지 않을 재주는 없었다. 그가 느끼는 기쁨에 비례하는 힘찬 동작으로 부서져라 잔을 부딪고 나서 우리는 보드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보드카가 이때보다 달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빈속에 털어 넣는 독한 술만큼 괴로우면서도 감미로운 것이 있을까. 위벽을 울리는 그 찌릿함은 전기 자극을 두려워하면서도 9볼트 전지에 혀를 갖다대는 아이에게나 비견될 법한 길티 플레저다. 그 뒤를 따르는 신선한 요거트는 놀란 위장을 편안하게 어루만주었다. 그리고 그에 이은 완벽한 마무리, 카르초. 정신없이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흡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다. “멀리서부터 친구가 찾아오면 보통 한 사흘 정도는 계속해서 술과 음식으로 대접을 하고 나서야 ‘그런데 어쩐 일로 온 거요?’라고 묻는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죠.” 박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자 지금껏 나지르 씨 역시 자신이 박 교수를 어떻게 해서 처음 만났는지, 그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지금 우리를 맞이해 얼마나 기쁜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이건 뭐 ‘세계 손님맞이 선수권 대회’라도 나간다면 단연코 금메달감이었다.

천상의 맛, 러시아식 양꼬치 샤슬릭
자꾸 뭔가를 내오는 통에 가만 앉아 있다가는 배가 터져버릴 것 같아 나지르 씨의 집을 나선다. 나지르 씨가 꼭 보여줄 것이 있다며 우리 일행을 재촉한다. 다시금 차에 올라 향한 곳은 비포장도로조차 나 있지 않은 산허리. 우아즈 지프조차도 이런 상황에선 몇 번이나 균형을 잃을 뻔한다. 좌로 우로 거의 뒤집어진다 싶으면 제자리를 찾길 여러 번, 고갯마루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곳에 오두막 한 채가 있다. 양치기들의 거처다. 능선 저편에서 어미 양 한 마리가 나타나는 것을 필두로 양 떼, 개, 말 그리고 사람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양치기들은 마을 전체의 양 떼를 공동으로 관리한다. 나지르 씨의 형 쟈말 씨는 이 양치기들의 우두머리다. “이 일을 시작한 지는 40년째지. 여긴 산속이잖소. 어려서부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굶어 죽기 딱 알맞거든.” 쟈말 씨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이다. 그러는 사이 양 우리 한 켠이 부산스러워진다. 나지르 씨가 양 떼들 틈에서 그리 크지 않은 녀석 하나를 찾아내 움켜 쥐고는 박 교수에게 무어라 소리를 친다. “저게 작년에 저에게 주었던 양이라고 하는군요. 이번에 갈 때는 꼭 데리고 가라는데요. 오늘은 저 녀석보다 더 어린 양을 잡을 거라고 하네요.” “그럼 1년이 채 안 된 녀석을 잡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이곳 분들은 그마저도 질기다고 잘 안 먹어요. 8개월 이하의 양 중에서도 갈색 털을 가진 녀석의 고기를 최고로 치죠.” 먼 데서 온 손님들 때문에 불쌍한 새끼 양은 나지르 씨의 번개 같은 칼놀림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천국으로 갔다. 절단된 동맥에서 흐르는 피를 땅에 흘려보내며 나지르 씨는 하늘을 향해 나직이 기도의 말을 외운다. 이슬람식 ‘할랄’ 의식이다.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운 터키로부터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은 130여 년 전. 하지만 선지자의 근엄함도 코란의 엄한 규율도 이 험한 산골까지 들어오면 어쩐지 기운이 빠져버린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보드카 한잔 걸치지 못한다면 대체 인생의 낙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제 명에 죽지 못한 양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은 최대한 맛있는 요리로 만드는 것뿐일 터. 사내들은 재빨리 양을 해체하고 땅을 20cm 깊이로 파고 그 가운데에 숯불을 준비한다. 그리고 양고기를 토막 내어 쇠꼬챙이에 꿴다. 러시아식 양꼬치의 기원이 된 카프카스의 샤슬릭이다. 중국의 변경인 신장 위구르에서도 맛난 양꼬치깨나 먹어봤다며 거들먹거리던 나지만 기름을 떨어뜨려 불꽃을 일으키며 익어가는 샤슬릭을 보았을 땐 그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고기의 크기가 다르다. 연변식 양꼬치가 체리라면 신장식 양꼬치는 대추, 카프카스 샤슬릭은 감귤 크기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살점들 틈새에 대파가 익어간다. 초록의 보색이 붉은색이라고? 내 생각에 초록의 보색은 고기색이다. 그 둘만큼 강렬하면서도 보는 이를 빠져들게 만드는 색채의 대비를 나는 알지 못한다. 긴 시간 동안 은근한 불 위에서 완성되어가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 샤슬릭 꼬치 하나를 받아들었을 때 나는 엑스칼리버를 받아든 아서왕이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 꼬치는 그대로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육즙과 지방이 흐르는 입안의 천국 말이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샤슬릭을 안주 삼아 연거푸 들이켰던 보드카 탓에 머리는 멍하고 기억은 흐릿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카프카스에 도착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고 적어도 이틀이 더 지나서야 나지르 아저씨가 이렇게 물어볼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댁들 여기까진 대체 무슨 일로 온 거요?”
글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