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Hand Good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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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사는 남자, 포토그래퍼 조남룡이 카페 ghgm을 오픈했다. 공간을 만든 사람의 취향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그곳을 방문했다.

↑ 커다란 원목 판재를 손으로 가공해 만든 1층의 테이블은 카페 ghgm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나는 잡지 기자로 일한 지 햇수로 18년쯤 된다. 연차가 어릴 때는 잘 몰랐다. 영화관이든 미술관이든 장소를 취재할 때는 눈에 보이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그러모으기 바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후배에게 일을 시키는 위치가 됐다. 그제서야 공간의 진실을 느끼고 알리는 눈이 조금 트였다. 공간은 그 공간을 만든 사람을 닮는다. 그를 알아야 그의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리게 된다. 당연한 소리인데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서 공간을 취재하러 나가는 후배들한테는 “사장이든 매니저든 건축가든 그 공간을 가꾸고 만든 사람을 만나고 오라”고 당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진가 조남룡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그가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지어 얼마 전 문을 연 ‘카페 ghgm’을 소개하려 한다. 내 논리대로라면 그의 공간보다도 그를 소개하는 일이 되겠지만.

1 2층 ghgm 작업실에 앉아 있는 사진가 조남룡. 2 카페 ghgm 활용법. 핸드메이드 가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조남룡의 사진 바라보기.

조남룡은 남자가 봐도 멋진 남자다. 선 굵은 외모와 훤칠한 체격, 힘이 있는 목소리와 가볍지 않은 몸가짐은 상대에게 믿음과 호감을 준다. 잡지사 사진기자로 시작해 청담동에서 패션, 광고 사진과 유명인 포트레이트를 찍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묘한 부분이 있었다. 누구보다 도시적인 감성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인데 그에게선 조금씩 바람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낡고 큰 SUV에 카메라를 싣고 몽골의 초원으로 달려나갈 것만 같은 자유로운 감성. 그래서 그가 용인에 ‘더 우드 스튜디오’라는 목공 공방을 열었다는 풍문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생길 일은 어떻게든 생기니까. 결과적으로 더 우드 스튜디오는 카페 ghgm의 모태가 되었다.
11년 전 조남룡은 용인에 목조 주택을 지어 이사 오면서 목공의 세계에 눈을 떴다. 목공 학교를 다니며 집 안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실을 운영하던 동료들과 뭉쳐 회원들에게 원목 가구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장소를 제공하는 더 우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몇 년 후 얄궂은 세상사 때문에 더 우드 스튜디오는 흩어지게 됐다. 조남룡은 이참에 가구 브랜드를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ghgm. ‘Good Hand Good Mind’의 줄임말이다. 광고 기획자로 이름을 날리던 친구가 붙여준 이름이다. 조남룡은 더 우드 스튜디오 바로 옆에서 자신이 수입한 빈티지 가구를 전시하던 곳을 ghgm의 사무실과 갤러리를 겸하는 복층 공간으로 개조해 썼다. 그 공간에 카페 기능을 넣은 것이 올해 2월에 오픈한 카페 ghgm이다. 그러니 이 카페의 유전인자에는 ‘조남룡’, ‘나무’, ‘가구’, ‘빈티지’가 단단히 새겨져 있는 셈이다.

↑ 조그만 화분들은 이 남성적인 공간을 쓰다듬어주는 ‘깨알’ 디테일이다.

↑ 자연광이 풍족하게 내리쬐는 2층은 ghgm의 작업실 겸 갤러리다. 천천히 둘러보며 ghgm의 가구를 구입하거나 제작을 의뢰할 수 있다.

나는 ‘조남룡 실장이 더 우드 스튜디오를 계승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는 소식만 듣고 그곳을 찾았다. 몇 년 전 더 우드 스튜디오를 방문한 적이 있어 길은 쉽게 찾았다. 그런데 그 길이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대로에서 들어서자마자 한적한 느낌이 드는 좁은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갔는데 이제 그 좁은 길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유명 축구 선수가 운영하는 축구 교실도 이웃했다. 내비게이터가 알려준 곳에 차를 대고 내리니 깨끗한 창고형 건물에 ‘카페 ghgm’이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카페!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조남룡이 카페를 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낯설었고, 조금이라도 자연에 가까운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 이사 온 사람들 곁에 카페라는 휴식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반가웠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 트인 복층 구조의 실내는 커피 향과 음악, 나무와 가구로 가득했다. ‘조남룡’과 ‘카페’는 잘 연결되지 않는 단어 같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카페니까. 긴 원목 판재를 통째로 상판으로 쓴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한 커피가 놓이기도 전에 테이블에서 일어나 1층과 2층을 둘러보았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교외의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은 전부 ghgm이 제작한 것이거나 오리지널 빈티지 제품이었다. 아르네 야콥센도 보이고 톨릭스 체어도 있었다. 랑프 그라는 언제 봐도 기능적인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우체국이나 공장에서 쓰던 인더스트리얼 빈티지 가구 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꽃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테이블 사이에는 조남룡이 찍은 인물, 풍경 사진들이 걸려 있다. 1층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콘크리트 벽에 세워진 커다란 판재들이다. 월넛, 웬지,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아프로모시아, 유럽산 오크. 수령이 100년 넘는 나무를 잘라 가공한 것이라 어떤 건 웬만한 사람 키의 두 배도 넘게 크다.

1 제작한 가구들의 사진과 도면을 붙여놓은 2층 ghgm 작업실 벽. 2 ghgm의 나무 도마는 카페 손님들이 즐겨 사가는 아이템이다.

1 가구뿐만 아니라 작은 문구류도 제작하는 ghgm이 습작으로 만든 나무 잔들. 2 세월을 함께 견딘 빈티지 철제 조명과 원목 테이블.

↑ 시원하게 트인 아래층을 내려보는 건 로프트 구조가 주는 즐거움이다.

카페로 쓰이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ㄷ자 모양으로 구성된 ghgm의 사무실 겸 갤러리를 만나게 된다. 카페 손님들은 자유롭게 2층을 구경하면서 ghgm의 가구를 구입하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가구를 주문하기도 한다. 작은 나무 자 같은 문구에서부터 책상과 의자, 침대와 콘솔, 테이블, 오리지널 빈티지 체어, 캘리그래퍼가 만든 목공예품에 이르기까지 ghgm의 감각과 손맛이 배어 있는 가구들로 가득하다. 2층에 놓인 스피커도 나무 캐비닛 느낌이 좋은 영국제 ‘하베스 Harbeth’다. 이 공간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것은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나무와 가구와 음악과 커피 향이 가득한 곳에서 사람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마냥 아기자기하니 예쁘기만 한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흡족한 기분이 가득 차오른다. 공간을 만든 사람의 취향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곳, 없는 걸 만들어내거나 애써 꾸미지 않은 곳, 그래서 계속 찾아도 질리지 않는 곳. 그런데 이런 곳을 만나기가 은근히 어렵다.
뒤늦게 1층 원목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에스프레소 투샷이 풍기는 진한 맛과 향. 어떤 장소를 취재하고 나면 개인적인 결정이 선다. 다시 올 것이냐 오지 않을 것이냐. 카페 ghgm은 아내와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빈티지 가구와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가 무척 좋아할 것이다. 그때면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와 은행나무에 잎이 푸르겠지.

송원석 (자유기고가) |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박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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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부모와 2세가 함께 시너지를 내고 있는 세 가족을 만났다. 부모의 가업을 잇는 다음 주자들은 부모의 든든한 파트너로 각자의 능력과 세대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모를 위해 꾸민 공간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 이신희 실장이 아버지인 이철 대표를 위해 꾸민 공간. 와인과 책, 꽃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을 남성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풀어냈다.

↑ 이철 대표와 이신희 실장.

감성적인 남성을 위한 공간
라이프스타일 멀티숍 보에의 이철 대표와 그의 아들 이신희 실장은 숍을 오픈하면서부터 관계가 돈독해졌다. 영국에서 패션을 전공한 이신희 실장이 우연히 아버지와 동행한 글라스 이탈리아의 공장 방문 후 아버지가 구상하고 있는 가구 사업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평소 대화가 없던 부자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는 제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간 몰랐던 서로의 취향에 대해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신희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어요. 사실 아이들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먼저 생각하는 부끄러운 가장이었습니다. 엄마보다 한발 물러나 아들이 걷고 있는 길을 서포트하는 정도였으니까요.” 이신희 실장이 보에에 합류하면서 이철 대표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그동안 아들에게 점수 딸 기회가 없었는데 사업을 계기로 관계가 좋아져서 개인적으로 너무 행복합니다. 사실 가족 사업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아들이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따라주는 것도 기특하고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데도 제가 잘 모르는 다양한 운영 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부자에게 보에는 단순한 리빙숍 이상의 역할을 해낸 셈이다. 섬처럼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이어준 가교랄까. “아버지는 평소 와인을 좋아하고 꽃꽂이도 종종 즐기세요.” 이신희 실장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에릭 요르겐센의 OX 체어 주변으로 이동식 와인 셀러와 플라니카의 이동식 에탄올 난로를 배치했다.
“화병에는 벚나무 가지를 담아 실내지만 마치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성향을 반반씩 섞어 연출한 공간은 남성적인 과감함이 풍기지만 섬세한 낭만이 깃들어 있다. 이철 대표는 얼마 전 오사카 출장길에서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7층 규모의 숍을 둘러봤다. “엄마는 기모노, 딸은 웨딩드레스를 판매하는 숍이었는데 쇼윈도 한 켠에 모녀가 정부에서 받은 훈장을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가족 사업을 도모한 적은 없지만 가구와 디자인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 아들과 함께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을 계획 중이다. 그 구상 중 하나는 지금의 숍 앞에 또 하나의 건물을 지어 부자가 꿈꾸는 근사한 라이프스타일숍을 만드는 것이다. 서먹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은 물론 새로운 사업 방향을 제시해준 디자인이라는 접점. 이들 부자는 지금 꿈꾸던 미래를 향해 가족이라는 이름의 돛을 달고 넓은 바다를 순항 중이다.

↑ 중간색을 공간에 녹여내는 재주가 있는 미노티의 허지원 실장이 엄마인 김민정 대표를 위해 꾸민 공간.

↑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한 두 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심플함 속의 위트
미노티와 보치, e15를 수입 판매하는 디옴니는 10여 년 전 톰 딕슨, 카펠리니, 마테오그라시, 파비오 노벰브레, 로돌프 도르도니 등 20여 개의 명품 가구와 건축가들의 디자인 가구를 판매하는 편집숍이었다. 당시 유행을 선도한 가구들은 모두 김민정 대표의 손에 이끌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테리어 관계자들이 엄지손가락을 들어줄 만큼 감각이 남다른 전업주부였던 그녀가 가구 사업을 하게 된 것도 순전히 디자인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든다”는 김민정 대표의 지론은 현재까지 탄탄한 디옴니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엄마가 일궈낸 땀과 노력 그리고 그녀의 까다로운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디옴니를 함께 이끌고 있는 딸 허지원 실장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생활 속에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해온 엄마가 꾸민 공간에서 생활해왔다. “어머니는 완벽주의자셨어요. 생활의 모든 것을 디자인을 고려했는데 차를 마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릇의 모양과 위치에 대해 신경 쓰셨죠. 집에 있는 가구들도 제자리가 없을 만큼 거의 매일 바꿔 새로운 공간을 만드셨어요.”
어려서부터 엄마의 디자인 감각을 보고 자란 허지원 실장은 밀라노에서 실내 건축 디자인을 전공한 뒤 미국과 이탈리아에 있는 회사에서 견문을 쌓고 4년 전부터 디옴니에서 홍보와 디스플레이를 담당하고 있다. 허지원 실장이 엄마를 위해 꾸민 공간은 김민정 대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넣었다. “엄마는 옷은 검은색을 좋아하셔도 공간은 분홍과 빨강 등의 포인트 색상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좋아하세요. 2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e15의 빅 풋 테이블 주변에는 핫 핑크 의자와 위트 넘치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로 포인트를 주어 간결함 속에 신선한 자극을 즐기는 엄마를 닮은 공간을 만들어보았습니다.”
김민정 대표와 허지원 실장은 닮은 모습이지만 추구하는 성향은 다르다. 사진 속 의상이 말해주듯 김민정 대표는 똑떨어지는 미니멀 스타일을 즐긴다면 허지원 실장은 약간의 여성미가 가미된 심플함을 선호한다. “지원이가 연출하는 스타일은 마치 외국 사람들이 디스플레이한 것처럼 공간에 여유가 있습니다. 색상을 조화시키는 방법도 남달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저도 힘들어하는 중간색 계열을 공간에 잘 녹여냅니다. 제가 취미로 시작한 일이 점차 지원이 세대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사업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모녀의 다른 성향이 만나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고 있는 디옴니. 사업과 관련해 앞으로 전개될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진 것은 없지만 디옴니가 단순히 가구점이 아닌 디자인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며 모녀가 입을 모은다.

↑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자신의 디자인 정체성을 굳혀온 마젠타 스튜디오의 권순복 대표. 딸 장현지 씨는 이 공간에 그런 엄마의 취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감각을 적절히 곁들였다.

↑ 이제 한길을 나란히 가고 있는 권순복 대표와 장현지 씨.

달콤한 쇼윈도
지난 20년 동안 공간 디자이너이자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해온 마젠타 스튜디오의 권순복 대표와 딸 장현지 씨가 사는 분당의 어느 타운하우스를 찾았다. 얼마 전 1층의 휴식 공간에 쇼윈도 코너를 마련해 모녀가 컬렉션해온 그릇들을 전시했던 차였다. 쇼윈도는 엄마의 구상이었지만 이를 디자인하고 그곳을 채우는 일은 딸 현지 씨의 몫이었다. “엄마는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사랑스러운 스타일을 선호하세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로맨틱한 스타일인데 모두가 같은 모던한 스타일에만 집중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던 저는 어느 순간 엄마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바라보는 시각을 바꿨더니 저도 그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됐어요.”
쇼윈도 안에는 권순복 대표가 그간 수집해온 앤티크 티포트와 찻잔, 포크, 디퓨저, 실버&골드 오브제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포르나세티, 런빠뉴, 셀레티의 그릇들은 현지 씨의 컬렉션. “현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클래식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디자인을 좋아해요. 딸과 제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디자인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티피컬리 오스매니안’ 도어 스티커로 클래식하지만 미래적으로 디자인한 제품이에요.” 권순복 대표는 뷰티 브랜드 롤리타 렘피카의 컨셉트 룸을 비롯해 마몽드, 에뛰드 하우스의 매장 디자인의 매뉴얼을 만든 이로 톡톡 튀는 젊은 감성을 사랑스럽게 풀어낼 줄 아는 공간 디자이너로 정평이 나 있다. “대학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한 현지가 작년 말부터 제 일을 거들고 있어요. 현지의 담당은 디자인의 밑거름인 캐드 작업이에요.” 현지 씨는 엄마와 함께 24시간을 동행한다.
“엄마 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좋은 디자인을 경험해볼 수 있고, 쉽게 만날 수 없는 디자인 관계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좋은 점도 있는 반면,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 단점이에요. 하루 종일 일 얘기만 하니까요.” 현지 씨의 불만이 권 대표에게는 오히려 장점이라고 한다. “밤새도록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퇴근 시간만 되면 직원들 눈치를 봤는데, 딸을 옆에 끼고 일을 하니 시시때때로 지시할 수 있어 너무 편해요. (웃음) 가족이라고 해서 대충 넘어가는 일은 없어요. 직원들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고스란히 딸에게 지시하고 있어요.” 이렇게 매일 알콩달콩 일하는 모녀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입장을 눈치챌 만큼 든든한 파트너가 됐다. 자기만의 단단한 개성과 취향이 녹아든 디자인 정체성을 구축한 권 대표와 엄마이자 대표의 방향을 믿고 따르는 현지 씨. 조만간 오픈할 마젠타 스튜디오의 이태원 매장에서 모녀가 만든 달콤한 스타일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기대된다.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신국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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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밍 루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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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밍이 세 번째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자신만의 색깔을 펼쳐온 그들의 시즌 3를 응원하며 루밍의 새로운 출발을 도운 조력자들과 한자리에서 만났다.

↑ 부피가 큰 가구와 조명을 널찍하게 전시할 수 있는 지하 1층 쇼룸.

리빙 브랜드에 관심 좀 있다는 이들이라면 빨간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났던 9평 남짓한 루밍의 첫 번째 숍을 기억할 것이다. 방배동 한갓진 골목에서 숨겨온 선물 보따리를 풀 듯 다양한 디자인 브랜드를 소개해온 루밍. 트렌드를 이끄는 디자이너부터 감각 있다는 엄마들과 스타일리스트들의 발걸음으로 루밍의 빨간 대문은 바삐 열리고 닫혔다. 소개하는 브랜드가 많아짐에 따라 2013년 따뜻한 단독주택 같은 두 번째 숍으로 둥지를 옮겼는데 이곳 역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 둥지는 방배동 중심 거리에서 유일하게 곡선 형태로 지어진 건물에 자리했다. 지난 두 곳의 숍을 박근하 대표가 직접 매만졌다면 이번에는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플랏엠’의 선정현 실장과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 프레스’의 김형진 실장이 이끌었다. “직원도 늘었고, 소개하는 브랜드도 많아지면서 공간이 더 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새로 지어진 이 건물을 보게 됐고 지하와 1, 2층을 덜컥 계약해버렸죠. 그만큼 건물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처음엔 지금껏 그래왔듯 직접 인테리어를 하려다가 이 공간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로고도 루밍의 성격을 드러내는 형태로 바꾸면 어떨까 했고요.” 박근하 대표는 주위의 추천으로 플랏엠과 워크룸 프레스를 알게 되었는데 이 두 팀은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춘 사이였기에 둘의 시너지는 믿고 장담할 수 있었다.

↑ 어떤 제품을 연출할지 미리 디자인했기 때문에 공간과 제품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박근하 대표가 생각했던 것은 바우하우스 시대에 사용된 도형과 색깔이었어요. 모두가 북유럽을 외칠 때 루밍은 이탈리아의 디자인과 조형적이고 건축적인 디자인을 꾸준히 소개해왔죠. 그런 부분을 공간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고민했어요. 루밍이 판매하는 제품과도 어울리는 공간이어야 했기에 숍에 자주 가서 제품을 보기도 했죠.” 플랏엠의 선정현 실장은 사소한 것까지 고려해 바우하우스 시대의 느낌을 살렸다. 세모 형태로 배열한 중간 벽과 원형을 떠올리게 하는 둥근 벽, 2층 바닥에 칠하고 싶었지만 예산 때문에 고민했던 노란색은 2층 키즈 코너에 칠해서 따뜻한 분위기를 살리는 등 더 나은 아이디어로 발전시킨 데에는 플랏엠의 공이 컸다. 루밍은 조 콜롬보의 이지 체어부터 임스 리클라이너 체어 등 장소가 협소해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가구와 조명을 지하 1층에 마음껏 풀어냈다. 루이스 폴센과 아르텍 조명 등 조명 코너를 마련했고 방문하는 이들이 미리 공간 구성을 예상해볼 수 있도록 스타일링을 곁들인 디스플레이를 제안하고 있다.

↑ 왼쪽부터 워크룸 프레스 김형진 실장, 루밍 박근하 대표, 플랏엠 선정현 실장.

↑ 다양한 부엌 용품을 만나볼 수 있는 1층.

1 워크룸 프레스에서 디자인한 루밍의 새로운 로고. 2 1층 공간의 백미인 나무 바닥재.

가장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1층은 부엌 용품과 사무 용품, 러그, 꽃병 등 생활 소품 위주로 구성했다. 1층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바닥이다. 생산이 중단돼 이제는 만나볼 수 없는 30년 이상 된 오래된 바닥재를 루밍에 사용한 것이다. 요즘 유행인 헤링본 패턴이 아닌 예스러운 모자이크 바닥재가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건물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든다. “1층의 부엌 코너도 신경 썼어요. 바우하우스 시대의 절제미와 기능성을 겸비한 부엌을 보여주고 싶었죠. 무채색 집기류와 색깔이 화려한 부엌 용품이 대조를 이루면서 의외로 잘 어울려요.” 2층은 오직 아이들을 위한 제품으로 채워졌다. 놀이 장소부터 침대, 공부하는 책상 등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브루노 무나리의 아비따꼴로 침대를 비롯해 우프 가구, 빌락, 하이코 조명, 페르몹 키즈 라인 등 아이 방에 필요한 제품군을 총망라했다.

↑ 실제 아이 방을 옮겨온 듯한 2층 키즈 코너.

↑ 아이 방에 어울리는 각종 가구와 조명도 전시하고 있다.

↑ 야심차게 디스플레이한 아비따꼴로 침대.

입구에서부터 마주하게 되는 새로운 루밍의 로고도 신선하다. 1층 카운터 쪽 벽에 a부터 z까지의 알파벳 폰트도 붙여놓았는데 이것은 워크룸 프레스의 작품이다. “로고 의뢰 시 가독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고객들이 많아요. 잘 읽힐지,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인지를 고민하는 거죠. 루밍 역시 그랬어요. 하지만 루밍이란 이름과 발음에서 동그라미가 연상됐고 그렇게 원을 활용해 로고를 만들다 보니 지금의 폰트를 디자인하게 됐죠. 짧은 시간 동안 루밍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기란 어려웠지만 플랏엠 실장님의 이야기도 듣고 실제로 숍에 가보기도 하면서 떠오른 많은 생각을 표현했더니 이런 디자인이 나왔네요.” 워크룸 프레스 김형진 실장이 로고의 작업 과정을 소개했다. 박근하 대표는 사람들이 루밍의 새로운 로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결정하기 전날엔 밤을 꼴딱 새우면서 고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직원들에게 로고를 핸드폰 바탕화면으로 저장하고 계속 보라고 했어요. 처음엔 낯설어하는 직원들도 로고가 점점 예뻐 보인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결국 마음을 정하게 됐죠.” 동그란 원에는 모서리가 없다. 소외나 열외 없이 보듬어 안는 원의 포용력으로 루밍은 안락하고 견고한 세 번째 둥지를 틀 수 있었을까. 2015년 봄, 만개한 루밍은 청년 같은 싱그러움으로 더 멀리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에디터 신진수 | 포토그래퍼 박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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