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패션 하우스와 주얼리 브랜드가 선보이는 리빙 컬렉션은 이제 제품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듯 진화하고 있다. 가구와 오브제, 향과 텍스타일, 건축적 연출과 감각적 경험이 교차한 2026 밀란 디자인 위크. 그 현장에서 16개 패션, 뷰티, 주얼리 브랜드가 제안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장면을 소개한다.

CARTIER

© Triennale Milano, Photo by Andrea Rossetti

밀란 디자인 위크 기간, 트리엔날레 밀라노 미술관은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고(故) 안드레아 브란치 Andrea Branzi를 향한 뜨거운 찬사로 가득 찼다. 트리엔날레 밀라노와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공동 기획하고, 브란치의 오랜 동료이자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인 이토 토요 Ito Toyo가 전방위 연출을 맡은 대규모 헌정전 <연속된 현재: 이토 토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안드레아 브란치>가 그 주인공이다. 두 기관과 거장의 인연은 깊다. 트리엔날레 밀라노는 1968년부터 2022년까지 디자이너이자 이론가, 큐레이터로서 브란치와 최전선에서 호흡해왔고,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그의 독창적인 환경 설치작들을 소장하며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브란치의 세계관을 2지지해왔다. 전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토 토요가 제안한 ‘끊임없는 흐름’이다. 연대기 순의 지루한 나열 대신,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유동적인 공간 속에 400여 점의 작품을 영리하게 흩어놓았다. 브란치의 전설적인 건축 이론 ‘노-스톱 시티 No-Stop City’를 몰입형 설치 공간으로 재현하는가 하면, 자연과 인공의 긴장을 다룬 오브제들을 마치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배치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전시 <오픈 인클로저스 Open Enclosures>에서 공개된 설치 작품 ‘엘립스 Ellipse’와 ‘가제보 Gazebo’도 함께 선보이며, 브란치의 미학과 공간적 세계관 안에서 디스플레이와 구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탐색한다. 관람객들은 11개 섹션 안에서 이 감각적인 흐름 속을 유영하며, 2023년 세상을 떠난 거장의 사유가 과거의 유산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연속된 현재’임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 Triennale Milano, Photo by Andrea Rossetti
© Triennale Milano, Photo by Andrea Rossetti

<Andrea Branzi By Toyo Ito. Continuous Present> 전시 전경. 이번 전시에서는 안드레아 브란치의 설치작업, 모형과 드로잉, 다양한 크기의 오브제, 아카이브 영상과 문서 등 400여 점이 소개된다. 특히 작업의 연대기 순이 아닌 11개 섹션 안에 주제별로 나누어 그의 디자인 여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ARMANI / CASA

늑한 리빙룸으로 연출한 2층 전경.

볼룬 암체어.

밀란 코르소 베네치아에 위치한 아르마니/까사 플래그십 스토어는 올해도 조르지오 아르마니 특유의 절제된 우아함으로 가득했다. 이번 2026 컬렉션 전시 <Origins>의 핵심은 ‘아이콘’. 볼룬 암체어, 셰인 콘솔 등 아르마니/까사를 대표하는 8개의 시그니처 피스를 새로운 소재와 컬러로 재해석하며 브랜드의 시간성과 연속성을 강조했다. 쇼윈도에는 오리지널 버전과 새롭게 진화한 버전을 나란히 배치했는데, 특히 새로운 피스는 반투명 유리 너머 실루엣만 드러나도록 연출해 공간 안으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마주하게 했다. 블랙 패브릭 드레이프로 감싼 공간은 극장 무대처럼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골드 디스플레이 케이스가 은은한 조명 아래 조각처럼 떠올랐다. 2층은 좀 더 사적인 리빙룸 형태로 구성됐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실제 자택에서 영감을 받은 수채화 벽면을 배경으로 보르고누오보 게임 테이블, 브라이튼 자카드 패브릭의 클래식 체어, 플로어 버전으로 재해석한 로고 램프 등을 배치했다. 단순함과 절제, 그리고 시간이라는 가장 호사스러운 재료가 만들어내는 깊이. 끊임없이 진화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아르마니의 디자인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리슬링 바 캐비닛을 비롯해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디자인들을 재해석한 컬렉션을 선보인 아르마니 까사.
윈체스터 스크린.

AESOP

마치 스튜디오가 비계와 가림막으로 겹겹이 쌓인 듯한 구조물을 연출한 전시장 입구.

이솝이 처음으로 선보인 조명 ‘아포제’.

살로네 델 모빌레 참가 3년 차를 맞은 이솝의 행보는 지극히 이솝다웠다. 고즈넉한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회랑을 무대로 펼쳐진 <The Factory of Light>는 빛과 건축, 그리고 인간의 손길이 닿은 장인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다. 호주의 마치 스튜디오가 설계한 이번 구조물은 흥미롭게도 재활용 비계와 트롱프뢰유 기법을 활용한 가림막으로 완성됐다. 본래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임시 재료지만, 이솝은 이를 건축적 풍경으로 재해석했다. 반투명 구조물 틈새로 스며드는 빛은 오래된 성당의 석조 회랑과 조우하며 묘한 긴장감과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시 하이라이트는 약 1만 개의 향수 보틀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각적 울림이다. 이솝의 시그니처 엠버 유리 보틀이 벽면을 따라 일렁이는 물결처럼 이어지고, 정교한 목재 구조 위로 따뜻한 빛이 공간 전체를 감각적으로 물들였다. 이 몽환적인 빛의 근원은 이솝의 첫 조명 컬렉션 ‘아포제 Aposé’.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건축적 유산과 현대적인 조명 오브제가 고요하게 공존하며, 빛 자체를 하나의 건축 재료처럼 풀어낸 감각적 서사였다.

DIOR

우아한 드레스의 라인을 담은 코롤 램프.
태국의 코라콧 아롬디가 라탄 소재로 유기적인 정원을 연출한 전시장.

디올 메종은 팔라초 란드리아니에서 새로운 ‘코롤 Corolle 램프 컬렉션’을 공개하며 패션과 조명의 경계를 우아하게 넘나들었다. 프랑스 디자이너 노에 뒤쇼푸르-로랑스 Noé Duchaufour-Lawrance가 디자인한 이번 컬렉션은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선보인 패션계 혁명을 일으킨 뉴룩의 상징, ‘코롤 스커트’의 풍성한 라인에서 출발한다. 드레스 자락처럼 부드럽고 드라마틱하게 퍼지는 곡선형 셰이드는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차가운 조명 오브제에 하이 쿠튀르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전시 공간 역시 한 편의 동화 같다. 크리스찬 디올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랑빌의 ‘빌라 레 룸’ 정원을 밀라노 한복판에 재현한 것. 태국의 예술가 코라콧 아롬디 Korakot Aromdee는 식물과 자연의 풍경을 그래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설치 미술로 변주하며 공간을 한 폭의 몽환적인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코롤 램프가 투사하는 부드러운 빛과 자연의 모티프가 겹쳐지며 만드는 그림자는, 관람객들에게 고요한 야생의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H&M HOME

중정에는 녹센 체어를 겹겹이 쌓아 조각적인 설치물처럼, 다이닝 공간에는 이를 자유롭게 흩뜨려두어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H&M 홈이 밀란 디자인 위크에 던진 첫 출사표는 강렬했다.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켈리 웨어슬러 Kelly Wearstler와 손잡고 브랜드 역사상 최초의 ‘디자이너 협업 퍼니처 컬렉션’을 전격 공개한 것. 베일을 벗은 장소 또한 오랜 시간 대중에게 닫혀 있던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유산인 팔라초 아체르비였다. 이번 컬렉션의 핵심 키워드는 ‘모듈형 시스템’이다. 작은 유닛을 자유롭게 조합해 하나의 거대한 가구로 확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이는 글로벌 브랜드가 직면한 배송과 조립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제약을 가장 3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로 돌파한 결과다. 전시는 이 모듈의 반복이 주는 미학적 리듬감에 집중했다. 고풍스러운 중정에는 녹센 스툴을 켜켜이 쌓아올려 하나의 거대한 조각적 설치물처럼 연출했고, 뮤직룸 안에서는 오렉스 램프가 빛과 사운드에 반응하는 무대 오브제로 등장해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구를 공간의 분위기와 감각을 지배하는 ‘장치’로 바라본, 영리하고도 감각적인 데뷔 무대였다.

이메라 테이블 램프를 플로어 버전으로 재해석한 팔라초 입구.
청동 거울 앞에 꽃과 커바 베이스를 함께 연출한 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