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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메모, 낡은 사진, 짝 잃은 장갑. 막상 다시 꺼내보면 쓸모 없지만, 쉽사리 버릴 수 없는 물건들…. 김수지 작가는 그 안에 남은 기억과 감정을 회화로 풀어낸다. 개인전 <KEEPSAKES>는 오래 간직해온 것을 다시 꺼내보는 데서 시작됐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장한 김수지 작가는 현실과 허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회화로 탐구한다. 유화 물감을 얇게 쌓고 다시 지우며, 처음 떠올린 이미지가 흐려지고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하나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서로 다른 순간의 기억을 겹쳐놓으며,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기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회화는 기억을 정확하게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달라진 기억과 그 안에 남은 감정을 마주하는 과정이다. 부산 카린에서 열린 <KEEPSAKES> 역시 그가 오랫동안 탐구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KEEPSAKES’는 시간이 지나도 간직하고 싶은 물건을 뜻한다. 작가는 오래된 메모와 사진처럼 특별한 쓸모는 없지만 쉽게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을 다시 꺼내보며,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남은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기억은 이미 흐려지고 변해 있었지만, 감정은 오히려 더 깊어져 있었다. 자신의 기억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객 역시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기 바라는 김수지 작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서보재단에서 열린 <Incisible Trace>, 2026. © PSBF
<Out of Time>, 전시.

이번 전시의 제목 <KEEPSAKES>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어릴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무언가를 모으는 습관이 생겼어요. 막상 꺼내보면 별다른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 상자나 봉투 속에 담긴 채 저를 따라다녔어요. 왜 모았는지 그 이유도 잊은 채 간직해온 작은 물건들이었죠. 이번 전시는 그 상자를 다시 열어보는 데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다시 들여다보니 제가 붙잡고 있던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물건에 딸려 있던 감정이더라고요. 물건이 낡고 기억도 흐려졌지만, 감정은 오히려 더 깊고 복잡해진 것 같았어요. 그 순간이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온 경험은 이번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한국과 미국 어디에 있든 다른 한쪽에 제 일부를 두고 온 것 같은 느낌이 있었죠. 그런 정서가 제 작업의 밑바탕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근 작업은 하나의 뚜렷한 장면보다 서로 다른 시기와 공간에서 흘러온 기억이 화면 위에서 겹쳐지는 방식에 가까워요. 경험 그대로를 그리기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쌓이고 흐려지며 남는 거죠.

이번 전시의 제목 <KEEPSAKES>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어릴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무언가를 모으는 습관이 생겼어요. 막상 꺼내보면 별다른 유화 물감을 쌓고 다시 지우는 방식으로 작업하시는데요. 어떤 이미지가 남겨지고 지워지나요? 대부분의 결정은 작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요. 어떤 레이어와 이미지, 형태와 색을 남길지는 즉흥적으로 정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위인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쌓인 흔적이 다음 선택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에요. 형태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지우고, 반대로 흐릿하더라도 어떤 감정적인 무게가 남아 있다면 그 지점에서 멈춥니다. 결국 제 기준은 무엇이 보이는가보다 무엇이 느껴지는가에 가까워요. 저에게 중요한 것은 처음의 이미지를 끝까지 보존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워지고 변형되는 과정에서도 끝내 남는 것이 무엇인지 보는 거죠. 작업하다 보면 그림이 스스로 기억을 쌓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지난 7월, 뉴욕 티나 킴 갤러리의 <Half Memory, Twice Remembered: Korean Artists from the Yale School of Art>에도 참여해 세간의 이목을 받은 김수지 작가. © Alec Dai
<Traces of a Goner 2>, 2026.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Traces of a Goner〉, 〈Peeled Skin〉, 〈Far from the Beginning〉은 어떤 이미지에서 출발했나요? 이번 대표작들은 정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클래식한 정물화의 구조를 가져오되, 화면 곳곳에 작은 이미지들을 숨겨두었습니다. 시들어가는 꽃, 녹아 내리는 촛농, 썩어가는 과일, 죽어가는 벌레처럼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것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에요.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그려놓는 것은 아닙니다. 레이어를 쌓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처음의 이미지가 점점 형태를 잃고 다른 이미지와 섞여요.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이미지는 처음 떠올렸던 장면과 상당히 달라져 있습니다. 결국 화면에 남는 것은 하나의 완전한 장면이 아니라, 사라지고 변한 이미지들의 흔적이에요.

액자를 문처럼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만든 이유도 궁금합니다. 관람자가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기억도 감춰져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떠오르잖아요. 액자를 열고 닫는 행위가 그런 기억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기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열어보는 경험처럼 느껴지기 바랐어요.

<Peeled Skin>, 2026.

그렇다면 이 액자는 관람객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겠네요. 맞아요. 작품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에서 한 겹 더 나아가고 싶었어요. 무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감추고, 다시 열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제가 계속 관심을 가져온 ‘가림’과 ‘드러냄’을 실제 구조로 옮긴 것이기도 합니다. 기억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잖아요. 어떤 것은 선명하게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죠. 관람객이 작품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고 정해두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각자 스스로 자신의 기억이나 감정을 떠올릴 수 있기 바랍니다. 제가 제 기억을 통해 그림을 만들었다면,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으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오래된 기억을, 또 다른 누군가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떠올릴 수 있겠죠.

현재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경험은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여러 작가들과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수업뿐 아니라 일상 대화를 비롯한 작가 간의 심도 깊은 교류를 통해 제 작업에 더 거침없이 파고들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형태나 구성을 명확하게 정리해서 마무리하는 데 더 신경 썼어요. 지금은 오히려 그 이전에 존재하는 거칠고 읽어내기 어려운 상태에 더 끌려요. 무언가가 완전히 설명되기 전의 상태를 회화 안에 남겨두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작업으로 확장해보고 싶나요? 아직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올해 하반기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화면이 커지면 레이어를 쌓고 벗겨내는 과정도 지금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요. 구체적인 이미지도 아직 정해두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기억’과 ‘흔적’이라는 주제가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형태를 바꾸면서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무엇이, 어떤 방향으로 저를 끌어당기는지는 작업실로 돌아가봐야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