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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물 뒤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손과 시간, 기술이 존재한다. AI가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 공예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호모 파베르 2026에 다녀왔다.

빛과 거울을 활용해 르네상스 건축물에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더한 ‘A Great Turning’.

공예의 가치는 완성된 형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재료의 선택부터 도구, 기술, 완성하기까지 들인 시간과 과정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앞의 사물은 다르게 보인다. 호모 파베르 Homo Faber는 그 보이지 않는 과정과 사람의 가치를 알리는 공예 비엔날레다. 올해 4회를 맞은 호모 파베르는 스위스 제네바에 기반을 둔 비영리 기관 미켈란젤로 재단 Michelangelo Foundation for Creativity and Craftsmanship이 주관한다. 지난 9월 한 달 동안 베니스 산 조르지오 마조레 San Giorgio Maggiore 섬의 폰다지오네 조르지오 치니 Fondazione Giorgio Cini에서 열렸으며, 70여 개국 5백여 명의 장인이 참여해 7백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공간은 안드레아 팔라디오 Andrea Palladio를 비롯해 여러 시대의 건축가를 거쳐 완성된 곳으로, 10세기부터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자리해온 역사적인 장소다.

호모 파베르를 주관하는 미켈란젤로 재단의 총괄 디렉터 알베르토 카발리.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은 ‘A Full Moon Rising’과 올해 아트 디렉터를 맡은 에스 데블린

아티스틱 디렉터는 영국 아티스트 에스 데블린 Es Devlin이 맡았다.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서 출발한 그는 공연과 미술,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간 자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빛과 영상, 사운드에 회전하거나 이동하는 구조물을 결합하는 ‘키네틱 시노그래피 Kinetic Scenography’는 그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방식. 화려한 스펙터클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2 3 들어선 사람의 시선과 감각을 움직인다. 데블린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경험을 만들어가는 관객을 하나의 ‘일시적 사회(Temporary Society)’로 바라본다. 극장에서 시작된 이 접근 방식은 미술관과 도시의 공공 공간으로 확장됐고, 최근에는 서울 푸투라에서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를 통해 빛과 거울, 영상 등을 매개로 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장르와 규모가 달라져도 그의 작업을 오랫동안 관통해온 요소는 빛이다.

이번 에디션의 타이틀은 . 데블린은 수많은 섬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는 베니스에서 이번 전시의 구조를 떠올렸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장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재능과 기술을 지닌 하나의 ‘섬’으로 보고, 이들을 산 조르조 마조레에 모아 ‘공예의 군도’를 구성한 것이다. 서로 다른 작업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빛’이다. 수백 개의 작품을 빛이라는 프레임 안에 놓고 물과 거울, 움직임으로 모습을 변화시키며 폰다지오네 조르지오 치니 곳곳에 15개의 몰입형 설치를 펼쳤다. 여기서 빛은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인간의 손과 재능까지 비춘다. 전시는 장인에서 시작해 공방과 도구, 재료, 그리고 완성된 오브제로 이어지며 한 공예품이 탄생하기까지 과정을 하나의 여정으로 풀어낸다.

01 HANDS BEHIND OBJECTS

전시에 참여한 장인들의 사진을 보여주는 ‘An Index of Artisans’.
장인의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에서 인간의 손과 공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비주얼 포엠을 상영한 ‘A Language of Hands’.
2백여 점의 공예품을 빛과 그림자로 조명한 ‘An Alphabet of Objects’.

첫 번째 설치 ‘A Language of Hands’는 인간의 ‘손’에 주목했다. 작업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에는 각종 도구와 재료, 드로잉이 놓여 있고, 벽면에는 에스 데블린이 직접 내레이션한 ‘비주얼 포엠 Visual Poem’이 상영된다. 실제 손을 새의 일부로 삼아 주변에 날개를 그려넣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며 날아오르고, 뒤이어 무언가를 만드는 장인의 손이 빠른 리듬으로 등장하면서 공예의 힘과 아름다움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준다. 장인들의 사진이 전시된 ‘An Index of Artisans’를 지나면 2백점이 넘는 공예품이 거대한 회전형 휠 위에 펼쳐진 ‘An Alphabet of Objects’가 이어진다. 영국의 아랍어 캘리그래퍼 소라야 시드 Soraya Syed의 ‘A Deep Sleep’은 셰익스피어의 한 구절을 아랍어로 옮겨 입체적인 황동 형태로 구현했고, 수라즈 쿠마르 사후 Suraj Kumar Sahu의 테라코타 조각 ‘Ritual in Ruin’은 고고학적 유물을 연상시킨다. 휠이 움직일 때마다 작품들은 맞은편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치 동굴벽화를 닮은 그림자 속에서 저마다의 사물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02 MOON JAR IN A NEW LIGHT

전통 나전 기법으로 표면에 자개를 입힌 유지안의 ‘Gold Blue 65’.
흙을 코일 형태로 쌓아 완성한 제인 양 데엔의 ‘Untitled’와 프랑스 도예가 줄리앙 트뤼숑의 ‘Vase de lune’.
유약과 소성으로 은하수를 표현한 윤상현의 ‘Milkyway’와 파시미나 실을 전통 기법으로 엮은 인도 칼하트 재단의 ‘Pashmina Moon Jar’.

‘베니스의 허파’로 불리는 산 조르지오 마조레의 녹지에서 착안한 설치 작품 ‘A Library of Lungs’를 지나면 베니스 최초의 실내 수영장이었던 피시나 간디니 Piscina Gandini에 다다른다. 이곳에 펼쳐진 ‘A Full Moon Rising’은 한국의 전통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다. 물을 운반하고 저장하던 그릇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주목해, 달을 닮은 실루엣을 지닌 달항아리를 중심에 놓았다. 세계 각국의 장인들은 도자와 종이, 유리, 금속 등 다양한 재료와 기술로 달항아리를 비롯해 유사한 형태의 그릇을 해석했다. 작품을 전시한 반원형 구조물은 어두운 수영장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솟아오르기를 반복했고, 수면 위로 드러난 반원은 물에 비친 모습과 만나 하나의 커다란 보름달을 완성했다. 물과 빛, 공예품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한 에스 데블린의 연출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국 작가들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역시 전통 백자 달항아리를 재현하기보다 각자의 재료와 기술로 그 형태를 변주했다는 것. 작가 이상협은 한 장의 은판을 두드려 형태를 완성했고, 유지안은 자개를 입힌 항아리를 선보였다. 황준호는 도자에 데님과 비즈를 더해 푸른빛의 달항아리를 만들었다. 이 밖에도 김시영, 윤상현, 서도식, 장마리아, 장석현 등의 한국 작가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달항아리를 해석했다.

03 CRAFT IN THE MAKING

새와 곤충을 모티프로 한 하이 주얼리를 한자리에 모은 ‘An Infinite Birdsong’.
장인들의 시연과 호모 파베르 펠로십 작품을 만날 수 있는 ‘An Atelier Alive’.

‘A Rooted Ascent’는 자연에서 얻은 재료에 주목했다. 계단처럼 층층이 쌓은 코르크 구조물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다양한 목재 작품을, 다른 한쪽에는 고리버들, 버드나무, 골풀 등 식물성 재료를 엮어 만든 작품을 전시했다. 일본의 대나무 공예가 무안 히사토미 Muan Hisatomi는 나라 쇼소인에 보존된 무로마치 시대의 불교 공양용 쟁반을 전통 바구니 직조 기법으로 재해석했고, 인도의 안콘 미트라 Ankon Mitra와 샬리니 미탈 Shalini Mithal은 폭풍에 쓰러진 아카시아 나무에 종이끈과 라피아를 마크라메 기법으로 엮은 대형 조각을 선보였다. 보츠와나의 바구니 직조, 말레이시아 이반족의 천연섬유 직조, 중국의 대나무 조형, 마다가스카르의 라피아 공예 등 평소 접하기 어려운 지역의 전통 기술도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무와 코르크, 식물성 섬유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공예품을 선보인 ‘A Rooted Ascent’.

실제 공방을 전시장 안으로 옮겨놓은 듯한 ‘An Atelier Alive’에서는 서로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각자의 작업대에서 작업하며 제작 과정을 보여줬다. 13세기부터 이어진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의 제지 전통을 잇는 카르티에라 마누알리스 Cartiera Manualis는 음식과 패션 산업의 폐기물을 재활용해 종이를 만드는 전 과정을 시연했다. 프랑스의 스튜디오 MTX는 나무 프레임 안에 리본을 교차해 엮으며 전통적인 장식 철제 구조를 연상시키는 격자 구조물을 완성했다. 관객은 도구와 원재료, 작업 중인 오브제를 통해 완성된 공예품 뒤에 존재하는 제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킨츠기와 한코 등 일본 전통 공예 기술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A Place for Workshops’도 관객의 참여를 이끌었다. ‘An Infinite Birdsong’은 빛이 가장 화려하게 변주되는 공간이다. 베니스의 밤, 아치형 창이 물에 비치는 모습을 본뜬 빛나는 거울이 공간을 감싸고, 중앙에는 까르띠에 Cartier와 반클리프 아펠 Van Cleef & Arpels, 부첼라티 Buccellati를 비롯한 주얼리 메종과 독립 작가들이 새와 곤충을 형상화한 주얼리를 선보였다. 하이 주얼리 역시 장인의 손과 기술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관람객이 일본의 전통 공예 기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A Place for Workshops’.

04 WHAT LIGHT REVEALS

괴테의 <색채론>에서 영감을 받은 카펫과 컬러풀한 공예품이 어우러진 ‘A Rainbow of Forms’.

팔라디오가 설계한 회랑에서는 건축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됐다. 반복되는 아치와 기둥, 엄격한 비례와 대칭이 특징인 중정 한가운데 얕은 수면과 거대한 키네틱 미러를 설치한 ‘A Great Turning’은 빛과 물, 거울을 이용해 르네상스 건축을 비틀고 뒤집었다. 수면은 회랑의 아치를 반사하고, 두 축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거울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광을 받아 건축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4백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정적인 르네상스 건축에 빛과 반사의 움직임을 더해, 관객이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 것이다.

멕시코 도예가 안드레스 안사의 작품 ‘Traditional Overflow’.

회랑을 지나 옛 수도원의 식당인 리펙토리 입구에는 ‘A Luminous Ark’가 펼쳐졌다. 공중에 떠 있는 흰 종이 새 조형물은 베니스의 새를 모티프로 한 원치우원 Qiuwen Wen의 작품으로,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등불처럼 형상을 밝혔다. 빛으로 재료의 성질을 드러내는 방식은 ‘A Feast of Light’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거대한 라이트박스 테이블 위를 채운 것은 도자와 유리, 직물, 종이 등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든 흰색 작품들. 색 대신 빛에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재료 고유의 형태와 질감이 또렷해졌고, 공간을 수직으로 가르는 한 줄기의 빛이 그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와 대조적으로 ‘A Rainbow of Forms’에서는 순백의 세계가 완전한 색의 스펙트럼으로 전환됐다. 공간 중심에는 데블린이 괴테의 책 ‘색채론’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하고, 인도의 자이푸르 러그 Jaipur Rugs 장인들이 울을 일일이 손으로 매듭지어 완성한 대형 카펫이 펼쳐졌다. 플라스틱과 에나멜, 레진, 유리 등 강렬한 색을 지닌 작품들은 회전하는 거울 선반 위에서 움직이고, 천장의 대형 거울에 반사되며 색과 형태를 사방으로 증식시켰다. 흰색 속에서 재료의 차이를 드러냈던 빛이 이번에는 강렬한 색을 돋보이게 하며 재료와 색에 따라 달라지는 효과를 보여줬다.

베니스의 새에서 영감을 받은 원치우원의 종이 조형물이 빛을 발하는 ‘A Luminous Ark’.
라이트박스 테이블 위에 다양한 재료로 만든 흰색 공예품을 모은 ‘A Feast of Light’.

05 INVISIBLE AND ENDANGERED

‘An Atelier Alive’ 전시실 외부에 선보인 베니니의 조각 작품 ‘리비보 Rivivo’.

사이프러스 회랑에 펼쳐진 ‘Twenty Silent Songs’에서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물성을 얻었다. 과거 수도사들이 종소리에 맞춰 기도했던 역사에서 착안한 설치로, 데블린은 종의 진동이 만들어내는 음파를 사이매틱 패턴으로 시각화해 세계 각지의 장인들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각기 다른 패턴을 자개와 석재, 유리, 목재, 금속, 직물 등 자신만의 재료와 기술로 구현했다. 소리가 무늬가 되고, 다시 장인의 손을 거쳐 하나의 공예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15개 설치로 구성된 전시 여정은 보르헤스 미로 Borges Labyrinth의 ‘Come Home Again Venice’에서 끝난다. 2022년 데블린이 런던의 멸종 위기 동식물 243종을 그려 테이트 모던 앞에 설치한 ‘Come Home Again’의 베니스 버전이다. 도시의 동식물을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직물 공방 보노토 Bonotto가 울과 일본 화지, 재생 플라스틱을 이용해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직조했다. 데블린은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과 점차 사라져가는 공예 기술을 같은 선상에 두고 봤다.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생태계가 필요하듯, 공예 역시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탱하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폰다지오네 조르지오 치니의 르네상스 시대 회랑.
종소리의 진동을 시각화한 패턴을 다양한 공예 기법으로 표현한 ‘Twenty Silent Songs’.

베니스의 동식물을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구현한 ‘Come Home Again Venice’.

호모 파베르는 단순한 공예 비엔날레가 아니다. 장인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하며, 젊은 공예가들이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미켈란젤로 재단이 구축해온 공예 생태계다. 숙련된 장인과 젊은 공예가를 연결하는 ‘Homo Faber Fellowship’, 세계 각지의 장인과 공방을 소개하는 ‘Homo Faber Guide’ 등을 통해 전시 밖에서도 공예 기술이 이어질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산업화와 대량생산이 확산되던 시대,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의 아츠 앤 크래프츠 무브먼트 Arts and Crafts Movement와 일본의 민예운동은 손으로 만드는 일과 공예의 가치를 일깨웠다. 기술의 발전이 삶과 생산 방식을 바꿀 때마다 인간의 손이 지닌 의미도 주목받아온 것이다. AI가 사회 전반으로 빠르게 확장되는 요즘, 인간의 손이 지닌 가치와 가능성을 다시 묻는 호모 파베르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컬처럴 무브먼트 Cultural Movement’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