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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술의 재발견부터 소재 혁신, 인공지능을 향한 질문까지. 전통과 기술, 인간의 상상력이 교차하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26. 디자인의 익숙한 문법을 흔드는 주요 전시와 신진 디자이너들의 실험을 살펴보았다.

공예 기술 옆에 AI가 만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한 지역에 뿌리를 둔 전통이 국경을 넘어 다른 문화와 만난다. 올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이 한자리에 놓이는 방식이었다. 익숙한 재료와 기술을 다른 맥락에 가져다 놓고, 당연하게 여겨온 사물과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 디자인은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꿔놓는다. 지난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24회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은 올해도 도시 곳곳을 무대로 삼았다. 소호가 새롭게 디자인 지구에 합류하며 총 11개 지구로 확장됐고, 쇼디치는 기존 쇼디치 디자인 트라이앵글에서 쇼디치 디자인 위크로 새롭게 출발해 60여 곳의 쇼룸과 전시, 설치작품 및 이벤트를 선보였다. 지난 5월 이스탄불에서 첫 해외 프로그램을 개최한 글로벌 디자인 포럼 역시 국제적인 디자인 담론을 런던으로 이어왔다. 도시 곳곳에서 발견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오브제만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고 익숙한 질서에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는 시선. 올해 런던에서 눈여겨본 하이라이트와 새로운 시선을 제안하는 신진 디자이너들을 소개한다.

01 보호의 역설

런던 웨스트엔드의 인도 외교 공관 뒤편에 마련된 올해의 랜드마크 프로젝트 ‘The Pangolin Shield’. © LMark Cocksedge

방패로 사람들을 막는 대신, 사람들을 위한 지붕을 만든다면? 올해 랜드마크 프로젝트 ‘The Pangolin Shield’는 익숙한 물건의 쓰임을 뒤집는다. 스튜디오 사르 Studio Saar와 구조 엔지니어링 스튜디오 아틀리에 원 Atelier One이 협업한 대나무 파빌리온은 인도의 경찰 방패와 농부들이 비를 피할 때 쓰는 전통 우산 ‘크눕 Knup’을 겹겹이 엮어 완성했다. 권력과 대립의 상징이었던 방패가 사람들이 함께 쉬고 대화하는 지붕으로 바뀐 것. 식민주의의 유산과 권력, 국경을 넘는 이동에 관한 질문을 런던 도심 한복판에 펼쳐놓았다. 프로젝트에 영감을 준 멸종위기종 팽골린 Pangolin 역시 역설적인 존재다. 포식자로부터 몸을 지키는 비늘이 오히려 밀렵의 표적이 되는 이유가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매되는 포유류로 알려져 있다. 보호를 위한 장치가 위협의 원인이 되는 모순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전통 공예에 디지털 설계를 더해 대나무 특유의 불규칙함까지 활용한 이 작품은 방패의 공격성을 걷어내고 휴식과 대화, 공감의 공간을 만든다.

02 오래된 기술의 새로운 상상력

© Ed Reeve
V&A 사우스 켄싱턴에서 선보인 전시 전경. © Ed Reeve
소메츠케 야키와 유진 카가와가 협업한 체어. 섬세한 드로잉을 입힌 도자기로 마감했다. © Ed Reeve
아리마츠 나루미 시보리와 협업한 조명 옆에 선 디자이너 베단 로라 우드. © Ed Reeve

1300년 역사의 일본 종이부터 섬세한 염색과 칠보까지. 일본 토카이 지역의 전통 공예가 세계 각국 디자이너의 손을 만났다. 2024년에 이어 두 번째 에디션을 선보인 ‘Craft × Tech Tokai Project’는 디자이너이자 엔지니어인 요시모토 히데키가 시작한 프로젝트로, 지역에 뿌리내린 기술을 동시대 디자인의 언어로 다시 읽는 데 초점을 3 4 맞췄다. 영국 디자이너 베단 로라 우드는 전통 염색 기법인 시보리 장인 무라세 히로유키와 협업해 조명을 선보였고, 미노 와시는 디자인 스튜디오 란자베키아 + 와이의 손을 거쳐 새로운 방식의 직조 작업의 스크린을 공개했다. 전통을 보존한다는 것이 반드시 과거 형태를 그대로 지키는 일만은 아니다. 장인이 오랫동안 갈고 닦은 기술에 낯선 디자이너의 질문이 더해지자, 익숙한 공예에도 다른 쓰임과 표현이 생겨났다. 오래된 기술이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확장될 수 있는 창작의 도구임을 보여주었다.

03 브루탈리즘을 집 안으로

© Felix Speller
© Felix Speller

런던의 상징적인 브루탈리즘 건축물 바비칸이 가구가 되었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메이드 MADE와 협업해 23점의 리빙 컬렉션을 선보인 것. 묵직한 콘크리트의 조형 언어는 가구와 조명, 패브릭으로 옮겨왔다. 출발점은 바비칸의 아카이브와 1960년대 견본 주택을 꾸민 디자이너 미리엄 하윗 Miriam Howitt의 작업이다. 차가운 회색빛과 산업적인 이미지가 강한 브루탈리즘 건축에 실용적인 데코 아이디어와 대담한 색채를 제안한 하윗의 감각은 컬렉션에도 이어진다. 오커와 모스 그린, 짙은 러스트 컬러를 가구와 직물에 입히고, 바비칸의 곡선은 커피 테이블로, 홀의 격자형 음향 패널은 조명으로 재해석했다. 단지의 테라스 형태를 본뜬 사이드보드도 눈길을 끈다. 차갑고 단단한 건축의 디테일이 손 닿는 곳의 가구로 바뀌며, 바비칸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바비칸 단지의 건축적 특징을 가구로 풀어낸 메이드 × 바비칸 컬렉션. 듀얼 체어와 플린스 커피 테이블, 플린스 사이드보드 등을 선보였다. © Felix Speller

04 AI는 영혼을 상상할 수 있을까

AI 영상 작업과 3D 프린팅 조각을 결합해 인터랙티브한 경험을 선사하는 이은조 작품 ‘When the Void Gazes Back’. © V&A Museum, Photo by Tim Readhead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 의식과 영성의 영역까지 다룰 수 있다면? V&A 뮤지엄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과 함께 선보인 기획전 는 디지털 기술을 새로운 창작 도구로 활용하는 신진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인간과 기계, 현실과 가상 사이의 관계를 질문한다. 그중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은조 작가의 ‘When the Void Gazes Back’은 불교미술과 AI를 연결했다. V&A 소장품에서 출발해 선과 업, 무상의 개념을 비인간의 의식이라는 주제로 확장한 작품이다. 게임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영상 속 샤머니즘의 신들을 한 가지 형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재활용 점토로 일부를 3D 프린팅한 조각과 관람객의 반응에 응답하는 인터랙티브 요소도 더해져, 디지털 세계의 존재를 눈앞의 물질이자 경험으로 마주하게 한다. 기술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는 이 작업은 묻는다. 의식은 인간만의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존재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05 불완전함의 미학

제시 버터필드의 조명과 스툴. © Andy Stagg
영국 왕립예술학교의 졸업전시에서 만난 한국 작가들의 작품. 왼쪽 원목 조명은 장필규의 ‘Jan Yeoung’, 오른쪽은 조재욱의 ‘Pivot Support Project’. © Andy Stagg

“올해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들은 하나의 답으로 완결되기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완성된 디자인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경험하게 하죠.” 큐레이터 알렉스 티에기-워커 Alex Tieghi-Walker의 말처럼, 올해 브롬튼 디자인 디스트릭트는 ‘Perfectly Imperfect’를 주제로 완성품보다 그 이면의 실험과 시행착오에 주목했다. 스튜디오부터 독서실, 차고, 공동묘지의 예배당까지 동네 곳곳에서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졌다. 영국 왕립예술학교의 과 졸업생 전시 는 도구의 제약부터 반복적인 연구까지, 디자인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시 버터필드의 ‘A Veiled Boundary’는 종이를 재봉해 조명을 만들고 철판을 두드려 종이처럼 유연한 형태를 빚어내며 재료에 대한 선입견을 흔든다. 익숙한 조건을 창작의 실마리로 바꾸는 작업들. 브롬튼에서 디자인은 완벽한 답보다 새로운 시선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재료와 도구만으로 각기 다른 스툴을 선보인 영국 왕립예술학교 전시. © Andy Stagg
니콜라스 자노니의 조형 가구. © Kane Hulse

06 디자이너들의 아파트

© Kane Hulse
© Kane Hulse
102명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123개 작품으로 채워진 가상의 아파트. 폐종이로 만든 맥스 헤이워드의 소파와 채소 찜기로 만든 안나 맥앨리스터의 시계 등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 Kane Hulse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건 비싼 작업실과 최신 장비만이 아니다. 비영리 디자인 집단인 디자인 에브리싱 Design Everything은 아람 갤러리 지하에 가상의 아파트를 꾸렸다. 는 작업실 임대료부터 재료비, 제작 장비까지 신진 디자이너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제약을 주제로 삼는다. 지난해 밴에 의자를 싣고 런던 곳곳을 누빈 이들은 이번에는 102명의 신진 디자이너가 만든 작품으로 주방과 거실, 침실을 채웠다. 골판지 상자와 도로 표지판으로 만든 소파, 시든 꽃을 활용한 주방 타일, 텐트 폴과 줄을 조합한 조명까지. 주변의 물건과 일상적인 도구에서 새로운 쓰임을 발견한 결과다. 전시 기간에는 실제 아파트처럼 공간을 사용하며 라이브 메이킹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식탁에서 티셔츠를 프린트하고, 주방에서는 채소 찜기로 나무를 가공해 시계를 만들었다. 관람객은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직접 참여하며 아이디어가 형태를 갖추는 순간을 경험했다. 엉뚱하지만 의외로 현실적인 발상. 가진 것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태도는 지금 사는 집에서도 시도해보고 싶을 만큼 친근하다.

07 실험하는 디자인

파니 유렉 스튜디오의 OP 세라믹 모듈러 시스템. © Tomo Yarmush
2LG 스튜디오의 기획전에서 선보인 마라 브라가뇰로의 의자.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유쾌한 발상과 대담한 실험이 눈길을 끈다. 올해는 특히 런던 동부의 쇼디치에서 그 에너지가 두드러졌다. 새롭게 쇼디치로 자리를 옮긴 는 재료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폴란드 스튜디오 파니 유렉의 회전하는 세라믹 타일 모듈 ‘OP 오브젝트’, 자연광과 푸른 하늘을 실내에 구현한 선데이 라이트, 얇은 금속판에 공기를 불어넣은 입체 작업을 선보인 지에타 스튜디오 등 유연하고 유기적인 조형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쇼디치 타운홀의 ‘하우스 오브 아이콘’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2LG가 기획한 ‘You Can Sit With Us’의 네 번째 전시 가 열렸다. 일부러 비뚤어진 자세로 앉도록 만든 마리아 브라가뇰로의 ‘배드 포스처 체어’와 바구니 짜기 기법을 가죽 조명에 적용한 조시 젠의 작업은 익숙한 사물에 기발한 변주를 더한다. 재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파고드는 실험과 사물의 쓰임을 유쾌하게 비트는 발상. 쇼디치에서 만난 신진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은 디자인의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했다.

자연광을 실내에 구현한 선데이 라이트.
지에타 스튜디오의 ‘Whispers Bench’. © TJakub Musial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