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타이포그래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2014 광주비엔날레 포스터를 디자인한 그래픽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 최슬기, 최성민 부부가 의기투합한 슬기와 민은 매 작품마다 그들만의 해석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다.
슬기와 민이 타이포그래피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작업은 직관적이라기보다 개념적인 편입니다. 즉 언어로 표현되는 ‘생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언어를 시각화하는 수단인 타이포그래피를 중요시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곡선의 성질이나 다양한 합자合字, 미묘하게 다른 &(앰퍼샌드) 형태 등 일반적으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를 매료시키는 측면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타이포그래피의 개념적 측면, 다시 말해 그 체계성이나 언어와 사고 사이의 관계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편입니다.
포스터 등 그래픽디자인은 평면으로 된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입체감 있는 무언가를 남겨줍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한 장의 포스터가 책이나 영상으로 넘어갈수록 차원은 더욱 늘어나죠. 책은 2차원 평면의 연속이지만 하나의 3차원 물체이고, 영상은 시간이 더해진 4차원 매체이니까요. 그러나 매체의 차원이 복잡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저절로 강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2차원 평면 작업도 입체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4차원 영상도 1차원적인 감흥을 전하는 데 그칠 수 있습니다. 메시지와 이미지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소통 효과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 그동안 디자인한 포스터를 작업실 복도에 걸어 놓았다.
사회적인 양심, 도덕적인 선언을 드러내는 강렬한 폰트 디자인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픽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사회적인 책임이라면 무얼까요?
타이포그래피는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쓰이는 일이 실제로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래픽디자이너가 특별히 일반인과 다른 사회적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시민으로서 행동하고 실천하기에도 충분히 어렵지만 그 수준을 넘어 직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래픽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은 완성도 있는 작업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디자인을 둘러싼 담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간 다양한 전시 포스터를 디자인해왔는데, 이번 2014 광주비엔날레 포스터를 디자인할 때는 무엇에 중점을 두었습니까?
전시 주제어인 ‘터전을 불태우라 Burning Down the House’는 1980년대 뉴욕의 펑크록 밴드 ‘토킹 헤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죠. 구호 같은 이 문장을 꾸밈이나 비유 없이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일종의 ‘직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포스터는 여러 매체로 이루어진 아이덴티티 시스템의 일부일 뿐입니다. 전체 아이덴티티를 관통한 개념이 바로 어떤 공간이건 주제어로 표현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 시스템인 것이지요. 그래서 주제어 로고도 마치 활자체처럼 3가지 굵기로 디자인했고, 한글과 영어 주제어 글줄을 유연하게 끊어내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광주비엔날레 주최 측으로부터 받은 포스터 디자인에 대한 특별한 제약이나 요구 사항이 있었나요?
저희에게 작업을 의뢰한 분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아니라 영국 테이트 모던의 큐레이터이자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예술 총감독인 제시카 모건이었습니다. 그분이 원했던 것은 단순하고 강렬한 디자인이었는데, 저희의 이전 작업을 보고 단순하고 대담한 측면이 마음에 들어서 연락한 듯합니다. 재단 측에서 요구한 사항도 적지는 않았습니다만 대부분 기술적이거나 통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최근 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매트릭스> 전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주제로 한 재미있는 작품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작품인지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어차피 저희는 고등 수학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이 저희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수학의 세계가 아니라, 수능에 초점을 두는 입시용 수학을 마지막으로 수학에 관한 관심을 잃게 된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중 · 고교에 이르는 12년간 그토록 열심히 수학을 공부하고, 그 결실을 제한된 시간과 문항으로 불사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상하게 된 것이 바로 수능 수학 문제를 기리는 일종의 기념비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저희 작품은 수능 사상 가장 어려웠다고 악명 높은 1997학년도 수학 영역 문제를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각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분석해 추상함으로써 일정한 그래픽 형상을 도출했습니다. 그 형상이 바로 저희 나름의 ‘답안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픽디자인 그룹이지만 에르메스 미술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꾸준히 전시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시는 저희가 관심 있는 주제를 연구하고 표출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일반적인 그래픽디자인 작업과는 종류가 다른 제약 때문에 기대감도 생기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에 재미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굳이 구분해 접근하지 않습니다. 둘 다 다양한 의미에서 ‘예술’이고 또 모든 의미에서 ‘디자인’을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기업, 브랜드, 작가 등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일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해온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궁금합니다.
아마 2005년에 한 국제현대무용제 ‘모다페’ 작업일 듯합니다. 모다페는 당시 보기 드물게 전위적인 현대무용 페스티벌이었는데, 예술감독인 김성희 선생님께서 저희 웹사이트를 보고 무작정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한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뜻깊지만 이를 계기로 김성희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관계는 역시 김성희 선생님이 기획한 ‘페스티벌 봄’ 작업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관련 일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 슬기와 민이 운영하는 소규모 출판사 스펙터 프레스에서 발간한 책들.
그래픽 작업 외에도 독립 출판사 스펙터 프레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판사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저희가 보거나 읽고 싶지만 일반적인 출판사에서는 내기 어려운 책을 직접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동기는 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저희와 비슷한 생각으로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꽤 많으니까요. 스펙터 프레스를 굳이 운영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굴러가게 놔두는 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년이면 귀국한 지 10년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느낀 국내 디자인 시장은 어떤가요?
소규모 스튜디오나 개인 디자이너의 활동이 조금 더 눈에 띄게 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저희를 비롯해 비슷한 상황의 디자이너가 적절한 작업만으로도 최소한 생계가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물론 이상적이겠습니다.
미국의 예술대학은 사회적인 디자인을 말할 때 조형성보다는 공공의 합목적성, 콘텐츠를 더욱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수학 후 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국내의 정서 때문에 힘들지 않았나요?
예일대학에서도 감각적 아름다움을 무척 중요시합니다. 합목적성이나 콘텐츠 자체에 기대어 디자인의 조형적 측면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오히려 경계하는 편입니다. 국내 디자인에 관한 문제는 오히려 감각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충분히 관찰하고 집요하게 추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래픽, 음악, 영상 등 다양한 분야의 융합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두 분에게 융합이라는 화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저희는 시대의 화두로 오래전부터 떠오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융합을 오히려 수상쩍게 여기는 편입니다. 각자 영역에서 할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마당에 융합을 핑계로 도망치려는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최종 목표 따위는 없습니다. 계속 살아남는 것밖에는.
에디터 최고은│포토그래퍼 차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