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살이 20살에게

50살이 20살에게

50살이 20살에게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메종>을 위해 마리메꼬에서 특별한 선물을 전해왔다. 마리메꼬의 대표 패턴인 우니꼬 패턴의 포스터를 증정한 것. 어느새 50주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싱그러운 우니꼬 패턴의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 마리메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사미 루오차라이넨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 헬싱키 키아즈마 현대미술관에 연출한 우니꼬 패턴의 쿠션들.

몇 달 전 우니꼬의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핀란드를 방문했을 때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했다. 노인분들의 옷 차림새 때문이었다. 무채색이나 짙은 색의 옷을 주로 입는 한국의 노인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빨간색 모자를 쓴 할아버지부터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 과감하게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자신감 있게 걸어가는 중년의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바다와 숲, 나무가 우거진 핀란드의 자연환경 때문인지 그런 의상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분 좋아지게 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즐기며 입는 브랜드가 바로 마리메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과연 한국에는 이렇게 모두가 누릴 만한 패턴이나 브랜드가 있었던가. 이전에도 마리메꼬를 좋아했지만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마리메꼬에 대한 호감이 더욱 커진 것이 사실이다.

마리메꼬는 1949년 라티아 부부가 프린텍스라는 섬유 회사를 매입한 후 여러 디자이너와 함께 패브릭과 의상을 선보이며 시작됐다. 핀란드에서 흔한 이름인 ‘마리’와 옷을 뜻하는 ‘메꼬’가 합쳐진 이름에서 섬유에 특화된 브랜드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라티아 부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심적으로 피폐해진 핀란드인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전하기 위해 원색의 생동감 넘치는 색깔과 과감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뒀다. 옷뿐만 아니라 마리메꼬의 패턴을 입힌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기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선택된 패턴이 원단으로 출시되면 이를 반영한 컵부터 접시, 주전자, 가방 등 리빙 제품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색깔에 대해 다소 보수적인 한국에서는 리빙 제품이 옷보다 훨씬 더 인기가 많지만 해외에서는 마리메꼬의 의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지금까지 마리메꼬에서는 약 3000여 가지의 패턴을 출시했고 그중에서도 양귀비꽃을 표현한 우니꼬 Unikko는 마리메꼬의 대표적인 패턴이다.

1 <메종> 20주년을 기념하는 우니꼬 포스터. 2 50주년 기념으로 홍콩 시내를 누빈 빨간색 우니꼬 패턴을 입힌 라운지 트럭.

금지된 꽃
약 50년 전 디자이너 마이야 이솔라 Maija Isola는 자신의 정원에 핀 빨간 양귀비꽃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마리메꼬의 창립자였던 아르미 라티아는 당시 모든 꽃 패턴을 금지했는데 자연 상태의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 패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1950년대에 유행했던 꽃무늬 특유의 여성스러움과 식상함 때문에 모던하고 색다른 패턴을 선호했던 아르미의 꽃 패턴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르미 라티아는 마이야 이솔라의 계속되는 설득과 단순화시킨 양귀비꽃에 붉은색을 입힌 우니꼬 패턴에 결국 마음을 열게 된다. 만약 그때 우니꼬 패턴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지금 마리메꼬를 대표할 만한 패턴을 퍼뜩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화는 이후 마리메꼬 디자이너들에게 소신 있는 디자인 철학의 중요성과 자신의 디자인을 제대로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북유럽 태생의 정체성을 보여주듯 간결하게 표현한 꽃과 밝고 경쾌한 색깔을 즐기는 핀란드인의 성향이 잘 반영된 패턴이 바로 우니꼬다. 1964년 우니꼬가 마리메꼬를 통해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고 가구나 제품 디자이너들도 우니꼬 패턴을 차용했다. 멀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브랜드를 상징하는 패턴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니꼬. 그런 우니꼬 패턴이 올해 50주년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핀란드 국민들에게는 축제이자 세계적으로도 이슈화될 만한 것이었다. 브랜드도 아닌 패턴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니기에 우니꼬 패턴에 대한 세계인들의 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1,2 서로 다른 우니꼬 패턴을 입힌 머그. 3 50주년 기념 제품 바닥에 새겨진 특별한 로고.

세계 곳곳에서 진행된 생일 파티
올해로 50살이 된 우니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계 각 도시에서 생일 파티가 열렸다. 고향인 핀란드에서는 에스플라나디 공원에서 패션쇼를 진행하고 모든 매장을 우니꼬 패턴으로 장식한 것은 물론 거리에는 다양한 우니꼬 색깔의 옷을 입거나 액세서리를 걸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또 키아즈마 현대미술관에서 여러 작가들과 함께 우니꼬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해 회색의 단조로운 미술관 대부를 우니꼬 패턴으로 물들였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도 우니꼬 50주년 기념 팝업 스토어가 열렸고 중국 베이징에서는 산라툰 광장에 마리메꼬 패턴의 파라솔이 설치됐다. 우니꼬의 색깔은 1964년 출시 이래 15가지 정도로 다양하지만 탄생을 기념하는 이벤트에서는 대부분 우니꼬의 대표적인 색깔인 빨간색을 사용해 어디에서든 단번에 우니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대형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각국의 마리메꼬 매장에서는 우니꼬의 50주년을 축하하는 크고 작은 파티와 행사가 열려 볼거리를 더했다는 후문이다. 마리메꼬의 웹사이트에는 이런 이벤트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저장해서 소개하고 있어 멀리에서도 우니꼬의 생일 파티를 감상할 수 있다.
올해부터는 국내에서도 남색 우니꼬 패턴을 입힌 핀에어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다. 마리메꼬의 디자이너인 사미 루오차라이넨 Sami Ruotsalainen이 핀에어와 협업해서 탄생시킨 프로젝트로 핀에어의 색깔인 남색의 우니꼬 패턴을 비행기에 입혔다. 또 비즈니스석과 일반석에도 핀에어와의 협업을 통해 제작한 식기들을 사용해 여행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겼다.
마리메꼬는 올해 초 발표한 S/S 컬렉션에서 우니꼬 패턴을 변주한 제품을 공개했다. 50주년 기념 우니꼬 패턴은 기존 패턴에 비해 크기가 훨씬 커졌고 오이바 세라믹 테이블웨어에 검은색 우니꼬 패턴을 입힌 50주년 한정 제품도 출시했다. 한정판에는 바닥에 우니꼬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마크가 찍혀 있어 소장용으로도 인기가 많다. 또 핀란드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공개한 실크 드레스, 재킷 등의 의상에도 꽃무늬를 넣어 2014년은 우니꼬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종> 20주년 기념 포스터
<메종>의 국내 창간 20주년을 기념한 포스터 프로젝트는 올해 7월부터 시작되었다. 20주년을 맞이한 잡지를 위해 50주년을 맞이한 패턴, 즉 우니꼬를 포스터로 진행하자는 큰 틀에 양쪽 모두 이견이 없었다. 우니꼬가 첫선을 보일 당시의 색깔이자 <메종>을 상징하는 색 중 하나인 빨간색으로 정해지기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리메꼬에게 우니꼬는 브랜드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여서 로고의 위치와 여백 등 아주 소소한 부분까지도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협의에 협의를 거칠 만큼 신경을 썼다. 작은 부분까지도 마리메꼬의 스타일대로 표현하기 위해 몇 달에 걸친 작업이 이어졌다. 그렇게 완성된 매력적인 마리메꼬 포스터는 액자로 만들거나 벽에 그대로 붙이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표정을 순식간에 밝혀준다.

오이바 시리즈를 디자인한 사미 루오차라이넨
현재 마리메꼬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사미 루오차라이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리메꼬에게 우니꼬는 어떤 의미인가?
벌써 50년 동안이나 우리와 함께해왔고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패턴이다. 유행을 타지 않고 쉽게 접할 수 있으면서 즐거움을 준다. 즉 마리메꼬가 추구하는 가치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패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우니꼬 패턴은?
클래식 레드와 다크 블루 우니꼬. 핀에어 항공기에 입히 패턴으로 매년 나를 놀라게 하는 매력이 있다. 다양한 배경과 무난하게 어울리는 클래식 패턴이라서 그런 것 같다.

마리메꼬의 디자이너들은 우니꼬를 어떻게 생각하나?
디자이너들에게 우니꼬는 시대를 넘나드는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아주 좋은 예다. 어떤 상황이나 시대, 색깔과 매치해도 항상 ‘우니꼬다움’이 있다. 또 우니꼬의 탄생 일화처럼 디자이너가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1,2,3 사미 루오차라이넨이 디자인한 접시와 티포트로 각기 다른 패턴을 입혔다.

제품과 패턴을 디자인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나는 오이바 시리즈처럼 제품 모양을 디자인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내가 디자인한 제품에 들어갈 만한 패턴이 있는지 항상 신경 쓰기 때문에 프린트 디자이너들과 친하게 지낸다. 사용하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고 싶고 일상생활이나 특별한 날 모두 사용할 수 있길 바란다.

오이바 시리즈를 디자인할 당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오이바 시리즈를 디자인한 일은 굉장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유로움이었다. 마리메꼬 측의 희망 사항도 있었지만 나의 직관과 자율성도 보장해줬다. 패턴 없이도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디자인을 생각했다. 그릇 본연의 기능에도 충실하면서 말이다.

핀에어와의 협업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두 회사가 만나 그렇게 아름다운 협업을 완성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놀라운 것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는 것. 디자이너로서 기내 환경과 외관 디자인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앞으로 작업할 디자인 혹은 패턴에 관한 계획은?
디자인하고 싶은 것들에 관한 아이디어는 아주 많으며, 우린 이미 내년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에 대해 아직 공개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아주 멋진 컬렉션이라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에디터 신진수ㅣ사진제공 마리메꼬

CREDIT
스무살에 받은 꽃

스무살에 받은 꽃

스무살에 받은 꽃

흰색의 포용력, 집을 품은 바스켓, 감사한 마음의 달리아, 축하의 장미 꽃다발

틸테이블 김동민 실장 ‘흰색의 포용력’
<메종> 창간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매거진인 만큼 틸테이블에서 디자인한 새로운 화기에 플라워 어렌지먼트를 진행했습니다. 흰색 화기를 선택해 어떤 내용이든 담아낼 수 있는 <메종>을 상징했고, 회색의 브루니아와 더스티밀러 소재가 더해져 흰색 화기가 더욱 돋보인답니다. 남자 강사진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특성을 살려 에린지움을 사용해 남성다움도 표현해보았죠. 꽃과 가드닝을 겸하고 있는 틸테이블만의 느낌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독자들과 소통하는 국내 최고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으로 남길 기원합니다.

라마라마기프트앤플라워 정은정 대표 ‘집을 품은 바스켓’
20년간 매달 기다리고, 설레며 받아보던 잡지에 이렇게 축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메종> 하면 떠오르는 햇살 좋은 따뜻한 집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집을 표현한 간결한 디자인의 구조물로 <메종>의 세련된 감성을 전하고 깊이 있는 분홍색 반다와 수국, 검붉은 블랙 뷰티와 보드라운 분홍색 로잘린 장미를 풍성하게 꽂아 시간이 지나도 편안하고 따뜻한 집의 아름다움을 담았어요. <메종>을 통해 꿈꾸고 영감을 얻었던 시간만큼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집과 앞선 트렌드를 소개하는 귀한 공간이 되기를 기원할게요.

엘트라바이 박소희 대표 ‘감사한 마음의 달리아’
아름다운 서촌에서 <메종>의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센스 넘치는 칼럼을 소개해온 <메종>을 위해 특별히 독특한 화기를 준비했어요. 사슴 모양의 세라믹 화기인데 화기에 어떤 꽃을 꽂느냐에 따라 색다른 꽃사슴이 된답니다. 엘트라바이에서 가장 신경 쓰는 동물 모양의 화기이기도 하지요. 저는 달리아를 좋아하는데요, 달리아의 꽃말이 ‘감사’랍니다. 좋은 연을 맺게 된 <메종>에 감사의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달리아를 가득 꽂아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독자들에게 최고의 매거진으로 항상 기억되길 기원합니다.

키마 김하영 대표 ‘축하의 장미 꽃다발’
<메종>의 창간 20주년 축하를 위해 선택한 꽃은 꽃시장에서도 귀한 코넬리엠이라는 장미예요. 장미와 함께 연둣빛의 헬레보루스와 꽃배추, 초록색 브로니아를 연출해 붉은색의 장미가 더욱 싱싱하고 건강해 보입니다. 꽃 한 송이만 꽂은 꽃병을 시작으로 점점 큰 사이즈의 꽃다발을 만들어서 한걸음씩 성장해온 <메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메종>을 대표하는 색이기도 한 분홍을 떠올리자 가장 먼저 생각난 꽃도 코넬리엠 장미였습니다. 우아하면서도 꽃 중에 제일이라는 장미와 <메종>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코넬 리엠 장미처럼 귀한 기쁨을 주는 매거진이 되길 바랍니다.

에디터 신진수│포토그래퍼 박상국

CREDIT
슬기와 민은 이렇게 말했다

슬기와 민은 이렇게 말했다

슬기와 민은 이렇게 말했다

과감한 타이포그래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2014 광주비엔날레 포스터를 디자인한 그래픽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 최슬기, 최성민 부부가 의기투합한 슬기와 민은 매 작품마다 그들만의 해석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다.

슬기와 민이 타이포그래피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작업은 직관적이라기보다 개념적인 편입니다. 즉 언어로 표현되는 ‘생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언어를 시각화하는 수단인 타이포그래피를 중요시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곡선의 성질이나 다양한 합자合字, 미묘하게 다른 &(앰퍼샌드) 형태 등 일반적으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를 매료시키는 측면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타이포그래피의 개념적 측면, 다시 말해 그 체계성이나 언어와 사고 사이의 관계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편입니다.

포스터 등 그래픽디자인은 평면으로 된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입체감 있는 무언가를 남겨줍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한 장의 포스터가 책이나 영상으로 넘어갈수록 차원은 더욱 늘어나죠. 책은 2차원 평면의 연속이지만 하나의 3차원 물체이고, 영상은 시간이 더해진 4차원 매체이니까요. 그러나 매체의 차원이 복잡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저절로 강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2차원 평면 작업도 입체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4차원 영상도 1차원적인 감흥을 전하는 데 그칠 수 있습니다. 메시지와 이미지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소통 효과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 그동안 디자인한 포스터를 작업실 복도에 걸어 놓았다.

사회적인 양심, 도덕적인 선언을 드러내는 강렬한 폰트 디자인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픽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사회적인 책임이라면 무얼까요?
타이포그래피는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쓰이는 일이 실제로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래픽디자이너가 특별히 일반인과 다른 사회적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시민으로서 행동하고 실천하기에도 충분히 어렵지만 그 수준을 넘어 직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래픽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은 완성도 있는 작업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디자인을 둘러싼 담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간 다양한 전시 포스터를 디자인해왔는데, 이번 2014 광주비엔날레 포스터를 디자인할 때는 무엇에 중점을 두었습니까?
전시 주제어인 ‘터전을 불태우라 Burning Down the House’는 1980년대 뉴욕의 펑크록 밴드 ‘토킹 헤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죠. 구호 같은 이 문장을 꾸밈이나 비유 없이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일종의 ‘직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포스터는 여러 매체로 이루어진 아이덴티티 시스템의 일부일 뿐입니다. 전체 아이덴티티를 관통한 개념이 바로 어떤 공간이건 주제어로 표현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 시스템인 것이지요. 그래서 주제어 로고도 마치 활자체처럼 3가지 굵기로 디자인했고, 한글과 영어 주제어 글줄을 유연하게 끊어내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광주비엔날레 주최 측으로부터 받은 포스터 디자인에 대한 특별한 제약이나 요구 사항이 있었나요?
저희에게 작업을 의뢰한 분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아니라 영국 테이트 모던의 큐레이터이자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예술 총감독인 제시카 모건이었습니다. 그분이 원했던 것은 단순하고 강렬한 디자인이었는데, 저희의 이전 작업을 보고 단순하고 대담한 측면이 마음에 들어서 연락한 듯합니다. 재단 측에서 요구한 사항도 적지는 않았습니다만 대부분 기술적이거나 통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최근 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매트릭스> 전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주제로 한 재미있는 작품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작품인지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어차피 저희는 고등 수학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이 저희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수학의 세계가 아니라, 수능에 초점을 두는 입시용 수학을 마지막으로 수학에 관한 관심을 잃게 된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중 · 고교에 이르는 12년간 그토록 열심히 수학을 공부하고, 그 결실을 제한된 시간과 문항으로 불사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상하게 된 것이 바로 수능 수학 문제를 기리는 일종의 기념비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저희 작품은 수능 사상 가장 어려웠다고 악명 높은 1997학년도 수학 영역 문제를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각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분석해 추상함으로써 일정한 그래픽 형상을 도출했습니다. 그 형상이 바로 저희 나름의 ‘답안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픽디자인 그룹이지만 에르메스 미술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꾸준히 전시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시는 저희가 관심 있는 주제를 연구하고 표출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일반적인 그래픽디자인 작업과는 종류가 다른 제약 때문에 기대감도 생기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에 재미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굳이 구분해 접근하지 않습니다. 둘 다 다양한 의미에서 ‘예술’이고 또 모든 의미에서 ‘디자인’을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기업, 브랜드, 작가 등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일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해온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궁금합니다.
아마 2005년에 한 국제현대무용제 ‘모다페’ 작업일 듯합니다. 모다페는 당시 보기 드물게 전위적인 현대무용 페스티벌이었는데, 예술감독인 김성희 선생님께서 저희 웹사이트를 보고 무작정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한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뜻깊지만 이를 계기로 김성희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관계는 역시 김성희 선생님이 기획한 ‘페스티벌 봄’ 작업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관련 일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 슬기와 민이 운영하는 소규모 출판사 스펙터 프레스에서 발간한 책들.

그래픽 작업 외에도 독립 출판사 스펙터 프레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판사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저희가 보거나 읽고 싶지만 일반적인 출판사에서는 내기 어려운 책을 직접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동기는 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저희와 비슷한 생각으로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꽤 많으니까요. 스펙터 프레스를 굳이 운영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굴러가게 놔두는 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년이면 귀국한 지 10년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느낀 국내 디자인 시장은 어떤가요?
소규모 스튜디오나 개인 디자이너의 활동이 조금 더 눈에 띄게 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저희를 비롯해 비슷한 상황의 디자이너가 적절한 작업만으로도 최소한 생계가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물론 이상적이겠습니다.

미국의 예술대학은 사회적인 디자인을 말할 때 조형성보다는 공공의 합목적성, 콘텐츠를 더욱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수학 후 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국내의 정서 때문에 힘들지 않았나요?
예일대학에서도 감각적 아름다움을 무척 중요시합니다. 합목적성이나 콘텐츠 자체에 기대어 디자인의 조형적 측면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오히려 경계하는 편입니다. 국내 디자인에 관한 문제는 오히려 감각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충분히 관찰하고 집요하게 추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래픽, 음악, 영상 등 다양한 분야의 융합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두 분에게 융합이라는 화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저희는 시대의 화두로 오래전부터 떠오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융합을 오히려 수상쩍게 여기는 편입니다. 각자 영역에서 할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마당에 융합을 핑계로 도망치려는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최종 목표 따위는 없습니다. 계속 살아남는 것밖에는.

에디터 최고은│포토그래퍼 차가연

CR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