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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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의 대가라는 수식어 대신 건축가 정도로 불러달라는 피에로 리소니. 시종일관 유쾌한 매너를 보여준 그가 비즈니스 호텔을 만든다면 어떨까?
피에로 리소니의 디자인 철학이 반영된 신라스테이 역삼에서 그와 마주했다.

피에로 리소니 Piero Lissoni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트라, 카시나, 카펠리니, 카르텔, 프리츠 한센, 리빙 디바니, 뽀로 등 글로벌 명품 가구 브랜드와의 활발한 협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간결하고도 따뜻한 디자인 DNA를 곳곳에 홀씨처럼 뿌려왔다. 가구 디자인뿐 아니라 호텔 건축, 인테리어, 상업 공간의 쇼룸 등을 디자인해온 건축가이자 아트 디렉터, 디자이너 등 그를 따르는 타이틀 역시 다양하다. 심플함에 기반을 두는 그의 디자인은 두드러진 디자인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비례와 균형이 만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탁월한 기능성은 그만이 이뤄낼 수 있는 전매특허. 수많은 브랜드가 그와의 작업을 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2002년부터 호텔 건축과 인테리어를 진행해온 그는 암스테르담의 알코브 컨서버토리엄 호텔을 비롯해 뭄바이의 타지 플레이스 호텔, 싱가포르의 스튜디오 엠 호텔, 예루살렘의 말리아 호텔 등 주로 5성급 호텔들을 디자인해왔다. 때문에 이번에 그가 강남 한복판에 선보인 비즈니스 호텔은 협소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스마트 디자인’ 철학이 돋보인다. 한국의 정서와 이탈리아의 감성을 ‘결혼’시킨 공간이라는 그의 설명에 공간의 곳곳이 달리 보였다. 호텔의 등급을 떠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호텔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신라스테이 역삼. 그곳에서 그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구성미를 경험했다.

인사동에 방문했다고 들었다. 어떤 것을 보고 느꼈나?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도자기 가게가 있고, 그 옆에는 한지 가게, 구슬 파는 가게들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명품 매장이 없는 것도 좋았다. 옛 디자인과 요즘의 디자인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공간이 매우 흥미로웠다. 미래에는 구시가지가 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신라스테이는 동탄에 이어 당신이 두 번째 오픈한 비즈니스 호텔이다. 비즈니스 호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시작할 때부터 글로벌 프로젝트로 생각했다. 한국의 특정 지역에 오픈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보면서 아시아, 유럽 진출도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디자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기업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좁은 공간에 기능과 편리를 반영해야 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5성급 호텔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협소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디자인해야 하는 것과 비용적인 측면까지 모두 고려해야 했다. 지난 2년 동안 신라 측과 수없이 미팅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명확했던 점은 스마트한 공간을 만들자는 거였다.

스마트 디자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협소한 공간을 기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탠더드 객실의 경우, 욕실과 침실 사이에 슬라이딩 도어를 달았는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도어 하나만으로도 공간은 손쉽게 분리된다. 욕실도 사용자의 동선을 고려해 기능적인 공간으로 설계됐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어떤 곳인가?
욕실이다. 욕실에서의 동선을 고려해 콤팩트하지만 기능적인 디자인을 염두에 두었다. 또 섹시한 욕실을 만들기 위해 욕실 면에 유리창을 도입했는데 이 점을 실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신라 측을 설득해야 했다. 신라스테이는 비즈니스를 위해 잠깐 머무는 호텔이 아닌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호텔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한국적인 문화를 접목시킨 호텔이라고 했는데, 한국적인 느낌을 어떤 공간에 접목시켰나?
예를 들면 호텔 밖 건물의 벽면은 수공으로 작업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연스럽고 클래식한 느낌이 든다. 이런 부분은 한국 전통의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앤티크 제품과 세라믹 작품 수집이 취미인데, 그동안 한국 도자기를 다수 수집해왔다. 도자기 표면에 감도는 약간 유리 같은 느낌이 한국적인 느낌을 살려주는 것 같다.

비즈니스 호텔이 갖춰야 하는 덕목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젊은 층이 특정 금액을 내고 어느 정도의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호텔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축물, 소재의 사용, 방 크기와 조명 등 어느 정도 수준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을 말한다. 유럽에 가면 저가 호텔들이 많은데 막상 들어가면 감옥 같은 느낌이 든다. 5성급 호텔에 갈 돈이 없다면 수준이 낮은 저가 호텔에 투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비용은 저렴하지만 일정 수준을 갖춘 호텔을 만들고 싶었다.

여느 비즈니스 호텔과 차이를 둔 점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호텔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신라스테이 객실 전체에는 마루를 깔았는데, 좀 더 내 집처럼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다. 공간은 짙은 회색을 주조로 디자인했는데, 회색은 내 디자인의 DNA와도 같다. 비즈니스 호텔은 호텔 안에서도 업무를 보는 특성상 조명의 조도가 밝다. 하지만 신라스테이는 조도를 상대적으로 낮췄다. 그 이유는 투숙객들이 객실에 머물면서 편안하고 따뜻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공간을 완성하는 당신만의 법칙이 있는가?
한 가지 간단한 룰을 적용하는데, 그것은 심플함과 우아함의 결합이다. 심플함이라는 단어는 단순함을 연상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심플함의 이면에는 복잡한 것들이 존재한다. 우아함은 공간 자체가 주는 뉘앙스가 될 수도 있고, 차별화된 장식품이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조화로움, 그것을 우아함이라고 생각한다.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안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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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

물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

물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

1980년대 일본 디자인을 정점에 올려놓은 디자이너 쿠라마타 시로는 소재가 지닌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던 인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형태에 서정적인 면을 절묘하게 담아낸 그의 디자인은 아직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1 쿠라마타 시로의 생전 모습. 2 그의 대표작 ‘하우 하이 더 문’으로 라꼴렉뜨 대표의 소장품을 촬영했다.

지난 9월 말,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의자연구회로부터 강연을 요청 받아 일본을 방문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찾아온 김에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 Sou Fujimoto가 설계한 도서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때마침 이곳에서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소장품이 전시 중이었는데 가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무사비 디자인4: 1980~1990’s 에토레 소트사스와 누오보 디자인>전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 Ettore Sottsass의 작품을 중심으로 1980~90년대 활동했던 쿠라마타 시로 Kuramata Shiro, 우메다 마사노리의 작품 등 약 50점의 디자인 가구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였다. 동시대에 같은 언어를 사용한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시대의 디자인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었고, 이 시기 실험적인 디자인이 있었기에 현재 이스태블리시&선즈 같은 회사가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봤다.

↑ © Jun Sanbonmatsu.

에토레 소트사스가 설립한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멤버였던 쿠라마타 시로는 1980년대 일본 디자인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거장으로 에토레와 함께 디자인적 교감을 나누며 새로운 소재와 색, 패턴을 이용한 서정성을 표현하여 디자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동서양의 문화를 혼합한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쿠라마타 시로. 재료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장인들과 함께 정성 들여 작품을 제작한 그의 디자인은 빨리 만들고 많이 파는 것에 혈안이 된 요즘 새태에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쿠라마타는 1991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의 디자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가 운영했던 쿠라마타 디자인사무소는 현재 그의 부인 미에코와 아들인 이치로가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쿠라마타의 업적을 보존하고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 명맥을 이어가도록 힘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니시아자부에 위치한 쿠라마타 디자인사무소를 찾아갔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쿠라마타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그의 사생활이 어땠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미에코는 그런 내게 쿠라마타가 즐겨 찾았던 스시집 ‘우메노키’를 알려주었다. 아카사카에 있는 우메노키는 10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으로 37년 전 쿠라마타가 직접 디자인한 곳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앉았다는 제일 안쪽 자리에 앉아 그가 항상 마셨다는 사와노이 정종을 주문했다. 냉랭할 만큼 순수한 사케 맛이 과장된 조형을 멀리하고 본질을 강조한 디자인을 추구하던 그와 꼭 닮아 있었다. 그의 단골 사케집을 방문해 그의 흔적을 찾아보니 묘한 감흥이 일었다. 다음번에는 쿠라마타 시로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탐방하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벌써부터 리스트가 꽉 찼다.

↑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디자인 작품을 활용해 선보이는 <무사비 디자인 4> 전시. © Jun Sanbonmatsu.

INTERVIEW
쿠라마타 시로의 아들 쿠라마타 이치로에게서 쿠라마타와 그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나?
물론이다. 도면을 그리는 모습도 많이 봤다. 쉬는 날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유원지에 놀러 갔는데 나는 아버지가 “자 가볼까?” 해서 따라가 보면 현장이었다.

쿠라마타 시로가 생전에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은 누구였나?
예술가인 다나카 신타로였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중에 친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거 같다. 같은 업계 사람보다는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는데 이는 언제나 자극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지 않나 추측한다.

‘퍼니처 위드 드로워 Furniture with Drawers’를 보면 한국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약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가?
아버지는 서랍을 좋아했다. 일본의 민가에 있는 계단 중에 서랍과 결합된 것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형태의 약장도 있다. 이는 아시아권 문화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의자에 서랍이 있다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의외로 주목받았다.

이 ‘브로큰 글라스 테이블 Broken Glass Table’은 스튜디오 바로 옆에 있는 미호야 글라스에서 만든다고 들었다. 유리에 충격을 가해 만드는 건가?
그렇다. 강화유리를 해머로 쳐서 만든다. 이 기술은 일본에서도 미호야 글라스 사장님밖에 못하는 기술이다. 처음 생산할 당시 강화유리보다 정밀도가 좋아져서 더욱 균일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예전 것이 다양한 크기가 생겨서 느낌은 더 좋았다.

‘플라워 베이스 flower vase’는 한국의 10꼬르소꼬모에서도 팔고 있다.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다.
아크릴을 만드는 일본 공장이 문을 닫게 되어 다시 새로운 공장을 찾아서 시도를 해보고 있다. 몇 십 번의 시제품을 만들어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 색은 기성품으로 나오는 색이 아니라서 조합을 잘해야 한다.

1 아크릴을 접어서 만든 조명 ‘Oba-Q’. 2 투명 아크릴로 만든 ‘플라워 베이스’.

비트라에서 ‘하우 하이 더 문 How high the moon’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공장이 없어지면서 더 이상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큰 도금 탱크에 넣어 도금을 해야 하는데 현재 일본의 도금 공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찾기가 어렵다. 쿠라마타가 처음 계획한 것은 크롬 도금이었는데 가능한 곳이 없어서 니켈 새틴 도금으로 타협한 것이었다. 원래대로 크롬 도금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생산이 중지된 제품들이 너무 안타깝다. 꼭 재생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일본은 거의 모든 공장이 동남아나 타이완, 말레이시아 같은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자신의 손 기술로 만드는 공예는 그 불씨가 미약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겠지만 공업은 공장이 없어지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경우도 지금 자국에서 활발하게 생산하는 것이 50년 뒤에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애를 쓴다고 해서 전체 구조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가능한 것이 있다면 쿠라마타 시로의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에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고 알려줄 수 있을 거 같다. 또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Oba-Q’ 램프도 생산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이 조명은 두께 2mm의 유백색 아크릴을 사용하는데 재료비가 아주 비싸다. 제작은 야마기와에서 담당하는데 거의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5~7명이 달라붙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도 이 조명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 ‘Oba-Q’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72년에 개인전을 했을 때다. 그로부터 10년 뒤 야마기와에서 상품화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형태가 좀 더 자유로웠는데 지금은 최대한 균일하게 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부 동일한 형태는 없다. 7명이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만들면 최대 160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생산성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지금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테이블은 OSB 합판으로 만들었다. 이 재료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 테이블은 원래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쓰던 카운터였다. 그곳을 정리할 때 그냥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테이블로 활용하고 있다. OSB 합판은 주로 주택의 틀을 만드는 구조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를 가구로 제작해 표면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소재의 사용 방법에 일관성이 있었다. ‘하우 하이 더 문’에 사용한 익스펜디드 메탈도 원래 고속도로의 펜스에 사용되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그것을 인테리어나 가구에 응용한 적이 없었다. 사무실 앞에 있는 쇼윈도의 유리창은 프레임이 없는데 지금은 아주 흔한 디테일이지만 그것도 아버지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모든 작품에서 그런 점을 찾을 수 있는데 말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요즘같이 쉽고 빠르게 만드는 시대에 이런 디자이너가 존재했다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니 감사하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되면 전시를 통해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리고 싶다.

에디터 최고은│취재 김명한(aA디자인뮤지엄) │포토그래퍼 안종환(제품) | 현지 통역 김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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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노래를 들어라

흙의 노래를 들어라

흙의 노래를 들어라

공간의 구분 없이 하나로 열린 작업실 사면의 양쪽으로 너른 창을 냈다.
창을 통해 바람이 제집처럼 드나들고 풍경은 액자가 되어 매일 다른 그림으로 걸린다.
경기도 이천의 원적산을 등에 지고 낮은 키로 서 있는 도예가 이능호의 작업실에 다다랐을 때, 나는 바삐 자맥질하던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 목물레에 흙을 올리고 형태를 만들기까지 작가는 어떤 시간 속을 걸어왔을까. 두들기고 또 두들겨 완성한 작품에는 기운이 가득 찬다. 빈 속은 작가의 에너지로 채워진다.

흙을 만지는 사람은 겸손해야 해요.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의 조은숙 대표가 얘기했다. 그녀의 갤러리가 그렇듯이 화법에서도 군더더기라고는 찾을 수 없다. 대화를 이어가려면 기민한 촉수로 몸통만 툭 던져진 한마디의 이면을 짚어내야 한다. 흙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질료, 그러니까 집에서 그릇까지 인간의 삶에 병치되어왔다. 그 신묘한 성질은 어떤 재료를 만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로 태어난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흙을 다루어, 불을 달래어 인간의 삶 가장 가까이에 기 器로 존재해온 흙은 도공이 몸을 낮추었을 때 비로소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낯을 드러낸다. 몸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밀고 나간 흔적은 작품에 아로새겨진다. 노력과 땀으로 빚어낸 질박한 결과물은 오래 두고 볼수록 깊은 우물처럼 그 멋과 맛을 길어 올린다. 도예가 이능호의 작업이 적절한 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감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자리한 마당에 매일 아침 부지런히 단장해온 고운 자갈이 길을 냈고 거대한 오브제가 주인처럼 놓여 가을 햇살을 마중하고 있었다. 거대한 흙덩이와의 드잡이를 시작으로 수만, 수십만 번의 두들김으로 완성했을 오브제는 햇살에 반응하는 생물체처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이방인의 손길을 허락했다. “이전의 작업이 무엇인가를 담는 기의 형태에 충실했다면 이번 작업은 추상적인 오브제성이 강하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변화의 낙차가 매우 큰 작업입니다.”

1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에 선보일 작품들. 2 시간의 결이 새겨진 도구들.

삶의 변곡점은 계획과 무관한 곳에서 등장한다. 도자기의 전, 즉 윗부분이 열린 작업을 해온 그가 어느 날 ‘닫힌’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자문했는데 이 물음은 그에게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선물했다. “여름 내내 작업한 것들이 터지고 갈라졌어요. 거대한 오브제를 무사히 구워내는 방법을 찾느라 여름을 다 보냈지요.” 목물레라는 전통 방식과 가스 가마라는 현대적인 편리의 조화로 태어난 이 오브제의 태명은 ‘집’. 그러나 단어에서 연상되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해석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별도의 작품명을 부여하지 않았다.

↑ 무채색으로 가득 찬 작업실에 힘차게 자라난 알로카시아의 푸르름이 시선을 당긴다.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작품을 추진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이 사람은 참 무심하게 편안하게 흘러가요.” 조소과를 졸업한 조각가이자 아내인 임은희 씨가 첨언하자 이능호는 발끈하기는커녕 조용히 부인했다. “흘러가긴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처럼 평화롭지는 않습니다. 작가의 목표에 충실해서 의도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기억하도록 아끼지 않고 몸을 써서 반복하는 겁니다. 그렇게 몸의 기억으로 빚어낸 작품에 내가 갖고 있던 올바른 것과 믿고 있던 것이 드러나고 그 진정성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지요.”

↑ 은행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씨앗합. 무엇을 담든 용도는 사용자에게 달려 있다.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꾸렸던 첫 작업실에 이어 지금의 작업실은 두 번째. 결혼 자금으로 마련한 이곳을 부부는 온전히 두 사람의 힘으로 덧칠해 나갔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작가로서 바이오그래피를 쌓아왔다.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과천으로 주거지를 분리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탄생의 성소다. 그는 작품을 낳고 뒷마당 창고에서는 길고양이가 들어와 새끼를 낳고 간다. 그가 만든 대형 어항에 살던 두 마리 붕어가 돌보는 이 없이도 산란까지 무사히 마친 것을 발견한 부부는 별도의 어항에 치어만 분리해 두었다. 난로 연통으로 들어온 다람쥐는 불을 때지 않은 난로에 새끼를 낳았다가 때가 되자 알아서 이소했다. 이능호도 몇 년 내로 이곳을 정리하고 이소를 결행할 참이다. 세 번째 작업실은 휴전선 아래 오지로 알려진 양구에 마련될 예정이다. 그러나 도예가 이능호에게 양구는 태토를 만날 수 있는 원토맥이 살아 있는 곳. 조선시대 가마터가 발견되며 오지로만 알던 양구와는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왕실 도자기를 만들던 곳이지요. 아직 제 눈으로 원토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좋은 흙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1 가을 햇살이 깊게 파고드는 작업실에서 이능호 작가. 2 투각 기술이 돋보이는 그릇은 과일을 담아도 좋지만 초를 켜면 불빛이 아련하게 새어나온다. 3 개인전을 앞두고 마무리 직업이 한창이다.

세종대왕 18대손인 이능호는 후손이자 도공으로서 자신의 시원을 찾아 삶의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양구를 택했다. 다루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백토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도 민낯으로 당당히 승부를 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원토가 있는 곳, 이능호에게는 그곳이 바로 양구였다. “보석을 보는 기분, 그 이상이죠. 그러나 원토를 외부로 유출할 수 없다는 방침이 있으니 그럼 제가 양구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억양도, 표정도 변화 없이 조곤조곤하던 그가 불켜진 방처럼 밝아진 것은 그때였다. 확신 이상의 자신감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의 도자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양구 백토로 완성하겠다는 말에 3년 동안 버티던 고집이 꺾였어요.” 남편의 이유 있는 오지행에 아내는 자신의 취향은 사사로운 것인 양 접어두기로 했다.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양구를 택했다. 다루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백토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도 민낯으로 당당히 승부를 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원토가 있는 곳, 이능호에게는 그곳이 바로 양구였다. “보석을 보는 기분, 그 이상이죠. 그러나 원토를 외부로 유출할 수 없다는 방침이 있으니 그럼 제가 양구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억양도, 표정도 변화 없이 조곤조곤하던 그가 불켜진 방처럼 밝아진 것은 그때였다. 확신 이상의 자신감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의 도자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양구 백토로 완성하겠다는 말에 3년 동안 버티던 고집이 꺾였어요.” 남편의 이유 있는 오지행에 아내는 자신의 취향은 사사로운 것인 양 접어두기로 했다.

↑ 작업실 터에 있던 150년 된 농가에서 나온 폐목을 재사용한 선반. 20년 된 작업실과 작품의 조화가 편안하다.
이능호의 작업 중 외부 유출이 허용된 양구 백토로 만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공감각적인 따뜻함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만질수록 가까이 두고 싶어진다. 올 초에 방영된 <이영애의 만찬>에 등장한 그의 한식 반상기도 양구 백토를 사용한 것. 방송을 위해 무려 30인분 그릇을 만들고 방송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으니 유명세를 이용하기도 하련만 도예가 이능호는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다. 작업에만 집중하고 싶은 그는 없던 근육을 만들어가면서 한길로 밀고 나가는 진중함으로 생활 자기에서 도자 예술까지 아우른다. 끝을 정하지 않고 달려가는 몰입은 육중한 흙덩이를 물레 위에 올려 온몸으로 달항아리를 빚어내던 선조의 땀방울과 닮았다. “대학에서 도자의 공예적인 실용성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러나 요즘은 정신적인 실용성, 말하자면 정서를 어루만지는 것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도자 오브제를 하나 놓음으로써 얻게 되는 위안과 행복도 광의의 실용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찰나의 속도전을 추앙하는 세태에서 그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 그것이 거꾸로일지라도 그 용기와 기백, 의지를 응원하고 싶었다. 간결한 모양새에 함축된 시간의 가치를 켜켜이 읽고 싶게 만드는 작품은 흔히 만날 수 없으니까. 참빗으로 쓸어내린 머릿결처럼 고운 마당 위로 감나무 가지가 고개를 떨구었다. 붉게 타오르는 연시가 한창이었다. “인간이 먹을 것도 남겨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새들에게 모두 뺏길세라, 우리는 나무에서 이제 막 딴 감을 마당에 나란히 서서 먹었다. 지난 일 년을 인내해온 다디단 감동이 가을 한복판에서그리고 입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편집장 노은아 | 포토그래퍼 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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