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디자인을 정점에 올려놓은 디자이너 쿠라마타 시로는 소재가 지닌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던 인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형태에 서정적인 면을 절묘하게 담아낸 그의 디자인은 아직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1 쿠라마타 시로의 생전 모습. 2 그의 대표작 ‘하우 하이 더 문’으로 라꼴렉뜨 대표의 소장품을 촬영했다.
지난 9월 말,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의자연구회로부터 강연을 요청 받아 일본을 방문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찾아온 김에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 Sou Fujimoto가 설계한 도서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때마침 이곳에서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소장품이 전시 중이었는데 가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무사비 디자인4: 1980~1990’s 에토레 소트사스와 누오보 디자인>전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 Ettore Sottsass의 작품을 중심으로 1980~90년대 활동했던 쿠라마타 시로 Kuramata Shiro, 우메다 마사노리의 작품 등 약 50점의 디자인 가구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였다. 동시대에 같은 언어를 사용한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시대의 디자인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었고, 이 시기 실험적인 디자인이 있었기에 현재 이스태블리시&선즈 같은 회사가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봤다.
↑ © Jun Sanbonmatsu.
에토레 소트사스가 설립한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멤버였던 쿠라마타 시로는 1980년대 일본 디자인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거장으로 에토레와 함께 디자인적 교감을 나누며 새로운 소재와 색, 패턴을 이용한 서정성을 표현하여 디자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동서양의 문화를 혼합한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쿠라마타 시로. 재료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장인들과 함께 정성 들여 작품을 제작한 그의 디자인은 빨리 만들고 많이 파는 것에 혈안이 된 요즘 새태에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쿠라마타는 1991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의 디자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가 운영했던 쿠라마타 디자인사무소는 현재 그의 부인 미에코와 아들인 이치로가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쿠라마타의 업적을 보존하고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 명맥을 이어가도록 힘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니시아자부에 위치한 쿠라마타 디자인사무소를 찾아갔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쿠라마타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그의 사생활이 어땠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미에코는 그런 내게 쿠라마타가 즐겨 찾았던 스시집 ‘우메노키’를 알려주었다. 아카사카에 있는 우메노키는 10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으로 37년 전 쿠라마타가 직접 디자인한 곳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앉았다는 제일 안쪽 자리에 앉아 그가 항상 마셨다는 사와노이 정종을 주문했다. 냉랭할 만큼 순수한 사케 맛이 과장된 조형을 멀리하고 본질을 강조한 디자인을 추구하던 그와 꼭 닮아 있었다. 그의 단골 사케집을 방문해 그의 흔적을 찾아보니 묘한 감흥이 일었다. 다음번에는 쿠라마타 시로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탐방하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벌써부터 리스트가 꽉 찼다.
↑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디자인 작품을 활용해 선보이는 <무사비 디자인 4> 전시. © Jun Sanbonmatsu.
INTERVIEW
쿠라마타 시로의 아들 쿠라마타 이치로에게서 쿠라마타와 그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나?
물론이다. 도면을 그리는 모습도 많이 봤다. 쉬는 날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유원지에 놀러 갔는데 나는 아버지가 “자 가볼까?” 해서 따라가 보면 현장이었다.
쿠라마타 시로가 생전에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은 누구였나?
예술가인 다나카 신타로였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중에 친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거 같다. 같은 업계 사람보다는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는데 이는 언제나 자극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지 않나 추측한다.
‘퍼니처 위드 드로워 Furniture with Drawers’를 보면 한국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약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가?
아버지는 서랍을 좋아했다. 일본의 민가에 있는 계단 중에 서랍과 결합된 것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형태의 약장도 있다. 이는 아시아권 문화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의자에 서랍이 있다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의외로 주목받았다.
이 ‘브로큰 글라스 테이블 Broken Glass Table’은 스튜디오 바로 옆에 있는 미호야 글라스에서 만든다고 들었다. 유리에 충격을 가해 만드는 건가?
그렇다. 강화유리를 해머로 쳐서 만든다. 이 기술은 일본에서도 미호야 글라스 사장님밖에 못하는 기술이다. 처음 생산할 당시 강화유리보다 정밀도가 좋아져서 더욱 균일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예전 것이 다양한 크기가 생겨서 느낌은 더 좋았다.
‘플라워 베이스 flower vase’는 한국의 10꼬르소꼬모에서도 팔고 있다.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다.
아크릴을 만드는 일본 공장이 문을 닫게 되어 다시 새로운 공장을 찾아서 시도를 해보고 있다. 몇 십 번의 시제품을 만들어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 색은 기성품으로 나오는 색이 아니라서 조합을 잘해야 한다.
1 아크릴을 접어서 만든 조명 ‘Oba-Q’. 2 투명 아크릴로 만든 ‘플라워 베이스’.
비트라에서 ‘하우 하이 더 문 How high the moon’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공장이 없어지면서 더 이상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큰 도금 탱크에 넣어 도금을 해야 하는데 현재 일본의 도금 공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찾기가 어렵다. 쿠라마타가 처음 계획한 것은 크롬 도금이었는데 가능한 곳이 없어서 니켈 새틴 도금으로 타협한 것이었다. 원래대로 크롬 도금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생산이 중지된 제품들이 너무 안타깝다. 꼭 재생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일본은 거의 모든 공장이 동남아나 타이완, 말레이시아 같은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자신의 손 기술로 만드는 공예는 그 불씨가 미약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겠지만 공업은 공장이 없어지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경우도 지금 자국에서 활발하게 생산하는 것이 50년 뒤에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애를 쓴다고 해서 전체 구조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가능한 것이 있다면 쿠라마타 시로의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에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고 알려줄 수 있을 거 같다. 또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Oba-Q’ 램프도 생산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이 조명은 두께 2mm의 유백색 아크릴을 사용하는데 재료비가 아주 비싸다. 제작은 야마기와에서 담당하는데 거의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5~7명이 달라붙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도 이 조명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 ‘Oba-Q’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72년에 개인전을 했을 때다. 그로부터 10년 뒤 야마기와에서 상품화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형태가 좀 더 자유로웠는데 지금은 최대한 균일하게 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부 동일한 형태는 없다. 7명이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만들면 최대 160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생산성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지금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테이블은 OSB 합판으로 만들었다. 이 재료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 테이블은 원래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쓰던 카운터였다. 그곳을 정리할 때 그냥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테이블로 활용하고 있다. OSB 합판은 주로 주택의 틀을 만드는 구조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를 가구로 제작해 표면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소재의 사용 방법에 일관성이 있었다. ‘하우 하이 더 문’에 사용한 익스펜디드 메탈도 원래 고속도로의 펜스에 사용되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그것을 인테리어나 가구에 응용한 적이 없었다. 사무실 앞에 있는 쇼윈도의 유리창은 프레임이 없는데 지금은 아주 흔한 디테일이지만 그것도 아버지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모든 작품에서 그런 점을 찾을 수 있는데 말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요즘같이 쉽고 빠르게 만드는 시대에 이런 디자이너가 존재했다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니 감사하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되면 전시를 통해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리고 싶다.
에디터 최고은│취재 김명한(aA디자인뮤지엄) │포토그래퍼 안종환(제품) | 현지 통역 김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