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과 ‘형태’가 일치해야 하는 모던 건축에서 계단은 점점 그 모습을 감추었다. 모두 엘리베이터를 타기 때문이다. 비상계단이 아닌 다음에야 일반 사무 건물에서 계단을 볼 일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계단은 돌연 건물 속에 럭셔리를 부여하는 존재로 재탄생하게 된다. 유용하지 않은, 게다가 일정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계단을 둔다는 것은 그곳이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여유로운 곳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계단을 만든다는 건 상당한 공학적 설계와 미적인 조형성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에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다. 조각가이자 화가이며 또한 건축 설계사로도 활동한 그가 위대한 이유는 특히 계단에서 드러난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위해 만든 계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공간을 세 폭으로 나누어 중앙의 난간이 있는 계단은 바닥을 둥글게 마무리하고, 좌우로 난간이 없는 직각의 계단을 덧붙여 평범한 계단을 마치 음악처럼 변주를 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 광장과 계단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계단 경사를 완만하게 한 것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한 배려다. 또한 계단 폭을 평행으로 만들지 않고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넓은 역마름모꼴로 디자인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야 계단 아래에서 보았을 때 윗부분이 갈수록 좁아 보이지 않고 평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원근법을 계단 설계에 적용한 것이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계단을 미적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헤르조그 드 뫼롱이 건축하고 최근 문을 연 송은 미술관에서도 로비에 들어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계단이다. 계단은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이자, 거대한 스크린을 관람할 수 있는 극장 혹은 공연 무대의 관객석 역할을 하며, 야외로 이어진 가든에서도 건물 내부를 바라보았을 때 심심하지 않은 하나의 풍경을 제공한다. 수직과 수평선의 구조를 깨뜨리며 사선과 곡선으로 공간 속에 역동적 리듬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이다. 테이트모던 미술관 뒤편의 신관도 2018년 홍콩 타이쿤 복합문화센터에 새로 문을 연 미술관도 모두 헤르조그 드 뫼롱의 작품인데 한결같은 공통점은 미술관 내부의 둥근 유선형 계단을 활용해 공간에 우아한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다. 아예 계단만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도 있다. 토마스 헤더윅이 뉴욕 허드슨 야드에 설계한 베슬 Vessel이다. 2500개의 계단과 80개의 계단참으로 이루어진 벌집 모양의 구조는 아래는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로 공학과 미학이 결합된 첨단의 결과물이다. 작품의 모티프는 인도의 계단식 우물이다. 오랜 건기를 버텨야 하는 인도에서 수없이 많은 계단참을 내려가야만 만날 수 있는 넓고 깊은 우물은 소유자의 높은 신분을 상징한다. 인도식 우물이 거대한 건축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유다. 인도의 계단식 우물은 대부분 폐허가 되고, 재개발로 파괴되었다. 인류의 지혜와 이상, 의지를 담은 계단으로만 만들어진 전무후무한 토마스 헤더윅의 건물도 더 이상 볼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약 2200억 원이 투입되었지만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