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이 그리운 날엔

밥상이 그리운 날엔

밥상이 그리운 날엔

그릴 요리를 메인으로 한 일본식 가정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그릴 밥상’이 가로수길 뒤편, 일명 세로수길에 오픈했다. 1970년대풍의 인테리어와 맛있는 음식이 있어 더없이 정겨운 이곳의 오프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 오래된 문짝과 고가구가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릴 밥상.

1 오픈된 주방. 의자를 활용해 제작한 그릇 선반이 독특하다. 2 혼자 방문해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

가로수길 뒤편에 위치한 ‘오기하라의 작은 부엌’을 근래에 한 번쯤 방문해본 이들이라면 같은 건물의 1층이 레노베이션 중이었다는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가림막 너머로 언뜻 비치는 낡은 창틀과 한국의 고가구들이 호기심을 자아냈던 이 공간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다. 청담동의 다이닝 전성기를 이끌었던 ‘카페 드 플로라’와 레스토랑 ‘씨즌스’를 비롯해 가로수길의 ‘모던밥상’, ‘콰이’, ‘네꼬 맘마’, ‘오기하라의 작은 부엌’까지 성공리에 운영해온 김영희 대표가 새롭게 선보인 ‘그릴 밥상’. 김영희 대표의 15년지기 친구이자 모던밥상의 인테리어를 도맡았던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신경옥이 그릴 밥상의 컨셉트 및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고, 씨즌스와 오기하라의 작은 부엌 등을 거쳐 김영희 대표와 10년 이상 호흡을 맞춰온 셰프 오기하라가 메뉴의 컨셉트를 잡았다.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신경옥은 이번 작업에서 집처럼 편안한 느낌의 다이닝 공간을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김영희 대표와 처음 그릴 밥상의 컨셉트를 논의할 때 서로 의견을 모았던 부분이 누구나 편안하게 와서 먹고 즐길 수 있는 밥집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레스토랑의 문턱이 높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뭔가 내 집 같은, 상 공간이지만 내 지정석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어요.”

1 생면으로 만든 라면 샐러드 2 고소한 등갈비구이.

↑ 김영희 대표의 오랜 지인이기도 한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신경옥이 그릴 밥상의 인테리어를 맡았다.

그릴 밥상을 작업하면서 군산의 유명 빵집인 이성당의 서울 지점 오픈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던 디자이너 신경옥은 군산을 오가며 새로운 디자인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작업 중 군산의 적산가옥을 열심히 탐색하고 다녔는데 특히 유명 관광지로 알려진 ‘히로스 가옥’의 구조와 창틀의 모양 등에서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그래서 그릴 밥상에는 낡은 창틀과 문짝, 한국의 고가구를 곳곳에 활용한 모습이 눈에 띈다. 1970년대 신문지로 마감한 벽면이 있는가 하면, 빈티지 스피커를 비롯해 오래된 액자, 전화기, 시계 등의 소품으로 공간을 채웠다. 오픈식 주방 천장에는 찬장, 선반 등 한국의 고가구를 빌트인 가구처럼 달아 독특한 느낌의 수납장을 완성했다. 그릴 밥상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커다란 창문이 있는 한쪽 벽면에 1인용 좌석을 일렬로 마련했다는 것이다. 각 자리에는 가방 보관함과 소지품함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테이블에 달린 서랍을 열면 그 안에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연결되어 있다. 혼자서 식사하며 스마트폰이나 개인용 컴퓨터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배려이다. 소박한 1970년대 부엌을 보는 듯하지만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배려는 여느 현대적인 레스토랑 이상이다. “요즘 싱글족이 늘어나면서 혼자서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혼자 와도 내 집처럼 편하게 밥을 먹고, 때로는 퇴근길에 술 한잔 마음 편히 기울이길 바라는 마음에 1인석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신경옥은 만들고 보니 예상보다 1인석이 인기가 많다는 말도 전했다.

↑ 특유의 완벽주의로 정갈하고 깔끔한 일본식 요리를 선보이는 오기하라 셰프.

정통 가이세키 요리를 현대적이고 정갈하게 풀어내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오기하라 셰프는 이번 그릴 밥상을 통해 보다 가벼운 일본 가정식 요리를 선보이고자 했다. “편안한 일본 가정 요리를 주로 선보이되, 그릴을 이용한 요리를 다양하게 마련했어요. 생선과 고기를 굽는 전용 그릴을 따로 마련했고, 강원도에서 공수해온 질 좋은 비장탄(참숯)을 이용해 맛있고 건강한 그릴 메뉴를 선보입니다.”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오기하라 셰프는 특히 일본식 생선구이의 맛을 최상으로 구현하기 위해 옥상에 생선을 말리는 장소를 따로 마련할 정도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식으로 조미한 생선은 하룻밤 동안 이 공간에서 반건조되어 그릴에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안은 수분이 가득한 생선구이가 완성된다. 오기하라 셰프가 야심차게 준비한 또 다른 메뉴는 품질 좋은 대창으로 만든 모쯔나베(일본식 곱창전골)이다. 대창 특유의 냄새 때문에 잘 먹지 않는 이들도 그릴 밥상만의 고소하고 담백한 대창 맛에 찾는 이들이 많다고. 최상급 돼지 등갈비로 만든 등갈비구이 역시 잡내 없이 깔끔한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생면과 싱싱한 야채가 가득 들어간 라면 샐러드는 여자들에게 특히 인기다. “오기하라의 작은 부엌이 잘 차려진 정찬을 맛볼 수 있는 것에 반해 그릴 밥상은 집처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메뉴들이 많아요. 가격도 부담 없고, 서빙되는 음식의 양도 적당해 혼자 먹기에 좋죠.” 매일 저녁 퇴근길, 자석에 이끌리듯 오래된 단골집을 찾아가 익숙한 자리에 앉아 먹는 밥상이 주는 위로. 구구한 설명 없이 마주한 것만으로도 가슴속 퇴적되었던 응어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딱 그만큼의 편안함이다. 세련되고 화려한 먹거리로 넘쳐나는 이 동네에 모처럼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공간이다.

↑ 오래된 창틀과 문짝 등을 활용해 꾸민 그릴 밥상의 멋스러운 외관.

INFO
OPEN 오후 5시~새벽 1시(곧 점심 영업을 시작할 예정)
ADD 주소 강남구 신사동 524-1 1층
TEL 02-540-4111

에디터 송정림 | 포토그래퍼 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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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이 그리운 날엔

면기가 놓인 여름 식탁

면기가 놓인 여름 식탁

이맘때만큼 면기가 식탁에 자주 오르는 계절이 있을까. 냉국, 냉면, 빙수는 물론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담기에도 그만인 우리네 면기와 더위에 지친 입맛을 되돌릴 여름 국수를 소개한다.

단아하고 청아한
음식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흰색과 다홍빛 열무김치말이 소면을 더욱 빛나게 하는 옥색의 면기. 간결하면서 싱그러운 멋이 테이블을 가득 메운다.

흰색 접시와 호리병 모양의 도자기 함, 포개진 그릇 가장 아래의 옥색 면기는 김선미 그릇에서 판매. 접시 위 면기는 이인화 작가의 작품으로 LVS 크래프트에서 판매. 열무김치말이 소면이 담긴 면기와 포개진 그릇 가장 위 흰색 소스볼은 모두 광주요에서 판매. 포개진 그릇 중 매트한 질감의 흰색, 옥색, 갈색 면기는 모두 남 세라믹 웍스에서 판매. 조개를 담은 면기는 에스갤러리에서 판매. 창문에 걸린 패브릭과 테이블 위에 놓인 패브릭은 모두 챕터원에서 판매.

열무김치말이 소면
소면 200g, 신 열무김치 100g, 삶은 달걀 1개, 오이채 4큰술, 무순 · 검은깨 조금씩, 국물(신 열무김치 국물 · 쇠고기(양지머리) 육수 2컵씩, 설탕 2큰술, 식초 4큰술, 소금 조금)

1 분량의 국물 재료를 섞고 냉동실에서 살얼음이 끼도록 차게 식힌다.
2 소면은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비벼가며 헹군 다음 물기를 뺀다.
3 2의 소면에 열무김치, 반으로 자른 삶은 달걀, 오이채, 무순, 검은깨를 올리고 차게 식힌 국물을 붓는다.
TIP 쇠고기 육수는 양지머리 100g과 물 4컵을 40분 정도 끓인 다음 체에 걸러 사용한다.

은은하지만 강렬한 유희
무심한 테이블 위에 갖은 표정을 입힐 수 있는 별별 색상의 면기. 매콤한 비빔국수를 쓱쓱 비벼 호로록 빨아 당기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에스프레소잔과 연보라색 면기는 장미네 작가의 작품, 냅킨 홀더가 놓인 접시와 파란색 면기가 포개진 하늘색 면기는 김혜정 작가의 작품, 신 김치 비빔국수가 담긴 면기와 국자가 담긴 분홍색 면기는 김지아나 작가의 작품으로 모두 정소영의 식기장에서 판매. 에스프레소잔을 올린 굽접시는 이세용 작가의 작품. 코발트 색상의 면기는 이정미 작가의 작품으로 모두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판매. 말이 그려진 접시와 면기, 그 밑의 푸른색 면기는 한주은 작가의 작품으로 모두 더 스튜디오에서 판매. 사각 트레이는 모두 SOP에서 판매. 자줏빛 참외형 면기는 광주요에서 판매. 옅은 분홍색 면기와 컵은 김선미 그릇에서 판매. 하늘색 면기에 포갠 파란색 면기는 에스갤러리에서 판매. 크기별로 3개를 포갠 면기는 이인화 작가의 작품으로 LVS 크래프트에서 판매. 그림은 모두 이다혜 작가의 작품.

신 김치 비빔국수
소면 200g, 신 배추김치 100g, 김치 양념(설탕 · 참기름 · 통깨 2작은술씩), 오이 1/2개, 당근 1/8개, 초고추장 6~7큰술, 무순 · 통깨 · 검은깨 · 참기름 조금씩

1 배추김치는 송송 썰어 물기를 짜고 분량의 김치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2 오이와 당근은 곱게 채 썬다.
3 소면은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비벼가며 헹군 다음 물기를 뺀다.
4 3의 소면에 배추김치, 오이, 당근, 무순, 통깨, 검은깨를 올린 다음 초고추장과 참기름을 뿌린다.

규칙 이면의 투박함
유약을 바른 부분과 아닌 부분, 일정한 무늬 이면의 거친 흙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우리 그릇. 색깔 고운 고명이 어여쁜데다 푸짐하면서 담백한 초계 국수를 담았다.

나무 컵은 이은희 작가의 작품으로 KCDF 갤러리숍에서 판매. 나무 트레이는 박미경 작가의 작품, 그 위의 유기 수저는 민덕영 작가의 작품, 포개진 면기 중 컵 아래 흰색 면기는 이정미 작가의 작품으로 모두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판매. 말 모양 오브제는 한주은 작가의 작품으로 더스튜디오에서 판매. 포개진 면기 중 겉면이 갈색인 면기와 그 아래 흰색 면기는 모두 광주요에서 판매. 초계 국수를 담은 면기는 우일요에서 판매. 화병에 담긴 수저와 나무 트레이 위 면기는 모두 정소영의 식기장에서 판매. 나머지 격자무늬, 도트 무늬 패턴의 도자기, 수저받침과 화병은 모두 최신혜 작가의 작품.

초계 국수
소면 200g, 오이 1/2개, 당근 1/8개, 양배추 · 적채 1/2장씩, 달걀지단 1개분, 방울토마토 2개, 무순·소금· 깨소금·참기름·통깨 조금씩, 닭 육수(영계 1마리, 물 6컵, 양파 1/4개, 마늘 3~4쪽), 육수 양념(참깨 3큰술, 식초 2큰술, 연겨자 2작은술, 소금 1작은술, 후춧가루 조금)

1 냄비에 분량의 닭 육수 재료를 넣고 끓인다.
2 1의 영계는 뼈를 발라내 소금, 깨소금, 참기름을 넣고 밑간한다. 국물은 분량의 육수 양념을 섞어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다.
3 오이, 당근, 양배추, 적채, 달걀지단은 5cm 길이로 곱게 채 썬다. 방울토마토는 반으로 썬다.
4 소면은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비벼가며 헹군 다음 물기를 뺀다.
5 4의 소면에 닭고기, 채 썬 채소, 달걀지단, 방울토마토, 무순, 통깨를 올린 다음 차게 식힌 닭 육수를 붓는다.

청량하고 청량한
따가운 여름 햇살마저 투영시키며 찬란히 반짝이는 유리 면기. 머리가 쨍 울릴 정도의 차가운 온도에 체증까지 내려줄 시원한 잣 냉면을 담았다.

방석 위에 놓인 면기는 김기라 작가의 작품, 테이블 위 옥색 냅킨 홀더 이은범 작가의 작품, 유리 크리머, 물소 뿔로 만든 스푼과 포크, 유리 티스푼은 모두 정소영의 식기장에서 판매. 잣 냉면이 담긴 면기, 젓가락이 꽂힌 유리컵, 바닥에 놓인 면기 중 투명한 면기와 진한 초록색의 면기는 모두 선혁구디에서 판매. 테이블 위의 연둣빛 유리 면기, 바닥에 놓은 주황, 연두색의 불투명한 면기는 모두 유리공예 작가 코타아리나가의 작품으로 LVS 크래프트에서 판매. 모래시계는 에스갤러리에서 판매. 주칠한 젓가락은 이은희 작가의 작품으로 KCDF 갤러리숍에서 판매. 바닥의 리넨 패브릭, 멜라민 소재의 젓가락은 모두 챕터원에서 판매. 벽에 걸린 그림은 이다혜 작가의 작품.

잣 냉면
냉면 200g, 국간장 · 참기름 2작은술씩, 오이채 4큰술, 삶은 달걀 1개, 산딸기 6개, 잣·통깨 조금씩, 잣 국물(잣 1컵, 통깨 1/3컵, 생수 4컵, 소금 적당량)

1 믹서에 분량의 잣 국물 재료를 넣고 곱게 간 다음 냉동실에서 살얼음이 끼도록 차게 식힌다.
2 가닥씩 뗀 냉면은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헹군다. 국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버무린다.
3 2의 냉면에 오이채, 반으로 자른 삶은 달걀, 산딸기, 잣, 통깨를 올리고 차게 식힌 잣 국물을 붓는다.

에디터 이경현 | 포토그래퍼 이과용 | 요리 김영빈(수랏간) | 스타일리스트 신윤선(theSUN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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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이 그리운 날엔

고수의 아찔한 추억

고수의 아찔한 추억

중국,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가 교차하는 지점인 라오스. 상큼한 허브 고수와 민물생선 그리고 통통 튀는 찹쌀밥까지 동남아시아 음식을 처음 접하는 초보에게도 안성맞춤의 코스를 소개한다.

“No Coriander, please.”(영어) “No Cilantro, por favor.”(스페인어) “삐에팡 씨앙차이.”(중국어) “마이 싸이 팍치.”(태국어) 모두 다 향신료인 ‘고수’를 넣지 말아달라는 표현들이다. 내가 이 문장들을 다 외우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고수를 엄청 싫어했기 때문이다! 지중해가 원산인 이 풀은 우리나라만 빼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어딜 가든 안 먹는 곳이 없을 정도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사찰을 중심으로 고수를 재배해 김치로도 먹고 쌈으로도 먹었다고 한다. 파, 마늘, 부추, 달래, 양파 등 오신채를 먹어선 안 되는 스님들이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대체 향신료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고수의 향은 오신채보다 더 강하다. 샴푸 향 같기도 하고 노린재의 방귀 같기도 한 그 냄새는 도무지 음식에서 나서는 안 되는 것으로 느껴지기 십상이다. 사실 위에 적은 표현들 중,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이거다. “보 싸이 홈 뽐.” 태국말과 살짝 비슷한 감이 있기도 한 이 문장은 파사 라오, 즉 라오어語다. 2002년 고수와 처음 대면했던 곳, 내 두 번째 해외 출장지, 라오스의 수도 위엔짱(비엔티안)은 초여름부터 무더웠다. 하지만 갓 조연출 딱지를 떼고 해외 물을 먹기 시작했던 나에겐 라오스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무엇보다 물가가 정말 환상적으로 쌌다. 특급 호텔에서 맥주 댓 병이 겨우 1만7천킵(1천7백원)이었으니, 길거리에서 사 먹는 국수는 5백원 미만이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싼 국수라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재료나 맛은 만만치 않았다. 라오스에서도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쌀국수를 즐겨 먹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베트남식의 가는 국수는 퍼, 그것보다 굵은 국수는 카오 삐악 Khao Piak이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는 씹는 맛이 더한 카오 삐악을 더 즐겨 먹었다. 배고플 때 식당에 가면 반찬에 먼저 손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엔짱의 노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으레 먼저 상에 올라온 홈 라압 Hom Laap(민트 잎)이나 오이를 파득 Padaek(생선으로 만든 라오스식 된장)에 찍어 오독거리는 것이 자연스런 절차였다. 하지만 그 소쿠리 속에서 유독 멀찌감치 치워놓는 대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홈 뽐 Hom pom이라 불리는 고수다. 먹을 때 넣지 않는다고 해도 끓이는 단계에서 들어간 것은 어쩔 수가 없으니, 아예 국수를 주문할 때 “보 싸이 홈 뽐!” 하고 외치게 된 것도 라오스에서 얻은 습관 중 하나였다. 홈 뽐만 사전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면, 라오스에서의 식생활은 만족 그 자체였다. 동남아시아 음식을 처음 접하는 나에건 안성맞춤의 초심자 코스였던 셈이다. 라오스 음식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매 끼니 먹는 찹쌀밥이다. 라오스 북부의 몽족 마을에 여자 리포터와 함께 촬영을 간 적이 있는데, 마을 이장님이 꼭 점심을 자기 집에서 대접하고 싶다 하여 리포터가 대접받는 모습을 촬영하게 되었다. 이장님께서 아리따운 한국 아가씨가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지, 본인이 찹쌀밥을 떼어 직접 먹여주셨다. 문제는 이장님이 방금 밭일을 마치고 갓 돌아와 손을 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손바닥 안에서 주물럭거린 찹쌀밥은 살짝 거뭇하게 색이 변해 있었고 반찬 국물에 찍어 리포터의 입 앞에 도달했을 땐 나조차 이걸 어째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프로정신이 투철했던 그 리포터는 카메라 렌즈를 원망 담은 눈길로 잠시 째려보고는 그 밥 뭉치를 한입에 꿀떡 받아 삼켰다. 그리고 이어진 멘트. “간장에 찍지 않아도 밥맛이 짭짤하네요.” 손 안에서 밥을 주물럭거리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찹쌀밥 낱알의 까끌거림이 덜해지고 한 덩어리의 인절미처럼 쫄깃해지기 때문이다. 이 찹쌀밥과 환상의 궁합을 이루는 음식이 바로 ‘라압’이다. 라압의 주인공은 ‘홈 라압’이라고 부르는 민트 잎이다. 우리나라에선 모히토를 마실 때에나 들어가는 민트 잎이 여기선 당당히 음식의 주재료 역할을 한다. 함께 들어가는 부재료에 따라 라압 빠(생선살), 라압 까이(닭고기), 라압 무(돼지고기), 라압 느어(쇠고기) 등으로 달라지는데, 요는 신선한 민트 잎에 잘게 간 고기를 넣고, 남빠라는 젓갈과 라임즙으로 간을 해 무치는 것이다. 어질어질한 더위에 입맛을 잃었을 때, 상큼한 민트 잎과 라임이 들어간 라압만큼 적절한 처방도 드물다. 여기에 찹쌀밥을 곁들이면 영양 면에서나 맛에서나 흠잡을 데 없는 라오스의 가정식 백반이 탄생한다. 라오스의 가정식 백반에서 빼놓아서는 안되는 한 가지가 더 있다면 바로 ‘땀막훙’이다. 라오어로 ‘땀’은 절구에 넣고 빻는 것을 의미하고, ‘막훙’은 그린 파파야를 말한다. 즉, ‘절구에 넣고 빻은 그린 파파야 샐러드’다. 빻을 땐 남빠와 설탕, 라임 그리고 매운 고추가 들어간다. 무보다 더 슴슴한 파파야의 맛에 젓갈의 감칠맛과 고추의 매운맛 그리고 라임의 상큼한 맛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생각보다 오묘해서 쉽게 중독되곤 한다. 알맞게 식은 찹쌀밥과 땀막훙을 맨손으로 집어서 입안에 밀어 넣는 그 때의 느낌을 생각하는 지금도 입안엔 침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피해 다녔던 홈 뽐과 예상치 못한 재회를 한 것은 2005년, 세 번째로 라오스 취재를 갔을 때였다. 한국에서 카메라 감독과 리포터를 대동하고 간 취재였기에 음식을 고를 때도 가급적이면 너무 낯설지 않은 것을 선택하려 나름 애를 썼다.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로 ‘똠얌빠’를 시켰는데, 한식으로 치면 생선 지리에 해당하는 국물 요리였다. 보글보글 끓으며 신선로에 담겨 나온 모양새가 너무나 맛나 보여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는데, 정신없이 흡입하는 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니 카메라 감독과 리포터는 벌써 식사를 마친 눈치였다. “아니 왜 벌써 수저를 놓아요? 이 생선국 정말 맛있는데? 좀 더 드시죠?” “그게… 향이 너무 강해서 우린 못 먹겠어.” “네? 여기엔 홈 뽐도 안 들어가 있…”까지 말하고 국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용산에 조성된 서울숲처럼 초록을 뽐내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듬뿍 들어간 홈 뽐이다. “아하…! 이게 왜 향이 느껴지지 않았지…?” 해답은 간단했다. 여러 날에 걸친 라오스 취재 동안, 피해 다닌다고 다니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홈 뽐을 먹어야 할 기회도 많이 있었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그 향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결국 그날 밤, 나는 맛있는 똠얌빠를 독차지하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낯선 풍습이나 낯선 문화 때문에 그 나라 자체에 대한 인상까지 흔들리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난 종종 이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나타나면 금세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려 하지 말고 일단 회색 지대에 남겨놓고 보자는 것이다. 충분한 정보와 경험이 모이면, 그때 가서 자연스럽게 판가름이 나기 마련이다. 그게 진짜 옳은 건지, 그른 건지, 나에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처음 홈 뽐과 인연을 맺은 지 12년이 지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홈 뽐, 팍치, 코리앤더, 실란트로, 씨앙차이가 들어가지 않은 현지 음식은 어딘지 허전하다고 생각하는, ‘고수 덕후’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 “싸이 홈 뽐 라이라이!(홈 뽐 많이 넣어주세요!)”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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