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고 눌러 빚어낸 시간의 층위 위에 완성된 단 하나의 결. 페리지가 만들어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맛의 근지점.

50여 개의 겹으로 구성된 라자냐. 페리지만의 방법으로 구워내 바삭한 동시에 촉촉한 식감을 자랑한다.

올리브 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페리지의 매장 전경.

페리지의 신가영, 임홍근 셰프.
페리지의 임홍근 셰프가 수많은 요리 중 파스타에 빠진 이유는 간단했다. “뉴욕의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마레아 Marea에서 일할 때, 레스토랑 아이 피오리 Ai Fiori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파스타를 맛보고 ‘이런 파스타도 있네’ 하던 기억이 나요.” 아이 피오리는 이탤리언 & 프렌치 요리를 선보이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이다.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파스타 집을 즐겨 찾았는데, 프렌치 터치가 가미된 파스타를 맛보니 다른 문이 열린 거죠.” 프렌치 요리를 공부한 신가영 셰프는 같은 입맛을 공유하는 남편 임홍근 셰프와 자연스레함께하게 됐다. 페리지의 시초는 팬데믹 기간에 운영한 팝업 레스토랑이다. 외식 시장이 얼어붙어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없게 된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됐다. “우리가 팝업을 열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 없었던,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파스타의 스타일을 구현해서요.” 반응은 예상한 것보다 좋았고, 그렇게 2021년 삼성동의 한 골목에 페리지가 뿌리를 내렸다. 외식업계가 어려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페리지는 오직 맛으로 입소문을 타며 예약조차 하기 힘들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들이 ‘좋아하는’ 파스타, 즉 페리지의 파스타는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뉴욕 지역 특성상 뉴욕식 이탤리언 요리는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중에서도 프렌치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육수를 여러 종류 사용하고, 클래식한 이탤리언 요리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프로틴이나 버터도 듬뿍 올려요. 색다른 재료를 자유롭게 쓰기도 하고요.”

랍스터를 곁들인 안다리노스. 이탈리아산 다디니 토마토와 직접 만든 마리나라 소스를 베이스로 사용했다.

페리지의 패티오 테이블.

봉골레 스파게티니. 직접 제면한 면은 쫄깃한 식감을 자랑하며, 봄을 맞이해 제철 방아로 만든 페스토를 곁들였다.
페리지는 모든 면을 직접 제면한다. 레스토랑의 메뉴는 분기마다 바뀐다. 현재는 아놀로띠, 라자냐, 딸리올리니, 소르프레시네, 안다리노스, 스파게티니의 여섯 가지 파스타 면이 코스를 구성하고 있다. 반죽 레시피부터 뭉침과 보관 정도까지, 디테일이 면마다 다르기 때문에 직원 한두 명은 파스타만 제면해야 할 정도로 일이 고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오직 맛 때문이다.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을 많이 들여서 만들어요. 그것이 맛의 차이를 결정하기도 하고요.” 요리하는 입장에서는 대중이 원래 아는 맛을 모두가 좋아하게 선보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조금만 삐끗해도 모두가 그 불협화음을 알아차리기 일쑤고,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해도 손님이 평소 먹던 맛이나 취향과 다르면 ‘무난하다’는 평조차 지켜내기 어렵다. 하지만 페리지의 메뉴는 에피타이저부터 티라미수 디저트까지 모두 ‘맛있다’는 호평으로 가득하다. 그 비법을 묻자, 감칠맛 덕분이라는 언지를 줬다. “한국에 있다가 미국이나 유럽을 가면 음식 맛이 슴슴해요. 간이 슴슴하다는게 아니라, 감칠맛이 안 채워져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감칠맛을 좋아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손님들이 좋아하는 맛을 구현해내기 위해서 육수 개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됐어요.” 처음 레스토랑의 문을 연 2021년은 어땠냐고 묻자, “끔찍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면을 만들고 건조해 보관하는 과정부터 육수를 개발하는 과정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페리지의 맛’은 운이나 우연에 의해 탄생한 결과물이 아닌, 수없이 많은 노력과 연구 끝에 맺은 결실이라는 뜻이다.

소스가 핵심인 갑오징어 먹물 딸리올리니. 신선한 갑오징어 먹물 주머니와 부속살에 채소와 허브를 넣고 푹 끓인다.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임홍근 셰프.

섬세하게 플레이팅하고 있는 신가영 셰프.
한국 생면 파스타 유행의 선구자 중 한 곳인 페리지는 이제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조금 더 이탤리언 다이닝 쪽으로 가볼까 해요.” 페리지의 근본인 파스타 메뉴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디시를 선보이기 위해 계속해서 고민한다는 두 셰프. 지난해 말 오픈한 세컨 플레이스 ‘파티나’를 통해선 단품 파스타 메뉴를 계속해서 전개하고, 페리지를 통해선 좀 더 다이닝스러운 메뉴를 풀어나갈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건 없지만, 변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흘린 이들의 모습에선 달뜬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페리지는, 행성의 둘레를 도는 위성의 궤도에서 행성에 가장 가까운 근지점을 뜻한다.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서로를 맴돌던 이들이 음식과 와인으로 가까워지길 희망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페리지는 오랜 시간 돌고 돌아, 결국 가장 가까운 맛의 근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처음의 설렘과 수많은 시행착오, 그리고 한 그릇의 맛에 담긴 집념이 담긴 모든 여정을 지나 페리지가 완성한 단 하나뿐인 맛. 이는 요리에 대한 두 셰프의 철학과 여정이 담긴 진심 어린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