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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문을 연 이후 파리 미식의 역사를 써내려온 르 그랑 베푸르.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인이 머물던 이 전설적인 레스토랑이 역사적 품격은 유지한 채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팔레 루아얄에 위치한 그랑 베푸르. 테라스 자리를 확장해 한층 여유로운 공간에서 다이닝을 즐길 수 있다.

몇 년 전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인 파리>에서 화제가 된 장면이 있다. 에밀리는 상사에게서 중요한 클라이언트와 미팅하기 위해 파리에서 가장 예약하기 어렵다는 레스토랑의 테이블을 잡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자신만만하게 예약을 마쳤다고 보고한 에밀리. 동료들은 놀라워하지만, 정작 미팅 당일 고객과 함께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매니저는 예약자 명단에 이름이 없다며 이들을 돌려보낸다. 프랑스는 날짜를 ‘일.월.연도’, 미국은 ‘월.일.연도’ 순으로 표기하는데, 이를 몰랐던 에밀리가 미팅 날짜인 8월 11일을 ‘8/11’로 입력하면서 실제 예약은 11월 8일로 잡힌 것이다. 이 황당한 해프닝의 무대가 된 곳이 르 그랑 베푸르 Le Grand Véfour다. 1784년 문을 연 이래 파리 팔레 루아얄 Palais-Royal의 회랑을 지켜온 이 레스토랑은 빅토르 위고와 콜레트 등 당대의 문학가와 정치인들이 즐겨 찾던 파리 미식의 상징 같은 공간이다. 레이몽 올리베, 기 마르탱 등 전설적인 셰프들이 30년 넘게 주방을 이끌어온 유서 깊은 곳으로서, 최근 글로벌 호스피탈리티 그룹 아코르 계열의 파리 소사이어티 Paris Society 품으로 안겼다. 2023년 선보인 ‘맥심 Maxim’s’의 부활에 이은 또 하나의 상징적인 움직임이다. 파리 소사이어티는 그동안 루프톱과 대형 야외 테라스를 앞세운 레스토랑을 확장해왔지만, 대규모 야외 공간 확보가 어려운 오스만 양식의 파리 도심 특성을 고려해 유서 깊은 노포에서 미래를 찾았다. 내부 좌석이 70석에 불과한 르 그랑 베푸르는 오히려 요리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룹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준다.

오래된 장식적 디테일은 살리고 푸른 벨벳 벤치로 새롭게 단장한 그랑 베푸르 내부.

문화재로 지정된 이 공간의 리뉴얼을 위해 디자이너 코르델리아 드 카스텔란과 크리에이티브 총괄 앙투안 메나르는 대대적인 리모델링 대신 역사적 가치를 살리는 섬세한 방식을 택했다. 기존 붉은 벨벳 벤치 소파를 푸른색으로 교체하고 내부에는 바를 새롭게 조성했으며, 2층에는 프라이빗 다이닝 룸을 마련했다. 은식기와 정교하게 수집한 골동품 식기, 자수를 놓은 냅킨으로 고유의 품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팔레 루아얄 정원과 회랑 사이에는 110석 규모의 야외 테라스를 확장해 옛 정취와 현대적인 개방감을 조화롭게 구현했다. 공간은 현대적으로 변화했지만, 식탁 위에 오르는 요리는 여전히 클래식하다. 새로운 레스토랑을 이끌 적임자로는 프랑스 정통 클래식 요리와 비스트로노미의 대가 ‘브루노 두세’가 낙점됐다. 이브 캉드보르드의 뒤를 이어 ‘라 레갈라드’와 ‘르 콩투아르 뒤 를레’를 이끌던 그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균형 잡는 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주방 목표는 높은 가격대의 문턱을 낮춰 젊은 세대와 현지 시민, 관광객이 고루 섞이는 고객층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푸아그라 테린은 훈제 뱀장어와 청사과를 겹겹이 쌓아올려 풍미의 균형을 잡았고, 두툼하게 조리한 가오리 날개 찜은 버터 블랑 소스와 캐비아를 곁들여 깊은 감칠맛을 선사한다. 예술품 같은 고급 식기에 담겨 나오는 플레이팅도 인상적이다. 이 밖에도 파테 앙 크루트, 재해석한 니스식 샐러드, 가염 버터로 구운 송아지 요리, 그랑 마르니에 수플레 글라세 등을 만날 수 있다. 와인 리스트 역시 기존 독보적인 희귀 고가 와인 셀러를 유지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대의 선택지를 넓혀 대중성을 확보했다. 파리의 역사와 미식을 완벽하게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인 만큼 방문을 계획한다면 예약은 필수다. 물론 에밀리처럼 날짜 표기를 헷갈리지 않기 바란다.

ADD 17 Rue de Beaujolais, Paris WEB legrandvefour.com

캐비아를 곁들인 비프 타르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