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훈 셰프가 하쿠시라는 도화지 위에 쌓아온 시간.

“살면서 어떤 것에 확신을 갖는 순간이 많지는 않지만, 이번 미쉐린 스타 수상은 제게 확신에 가까운 의미로 다가왔어요.” 2018년 강남 신사동에서 시작해 한남동을 거쳐 지금의 압구정동 공간에 이르기까지, 하쿠시를 통해 거쳐온 최성훈 셰프의 여정은 타협 없이 걸어온 시간이자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시간이었다. “이번 수상은 단순한 성취라기보다, 그동안 걸어온 길에 대한 하나의 답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추구해온 요리와 공간, 그리고 서비스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이요.”

‘하쿠시’는 일본어로 백지(白紙),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종이를 뜻한다. 이는 곧 요리를 대하는 최성훈 셰프의 태도이기도 하다. “첫 번째 레스토랑의 이름을 지을 때 ‘나의 첫 도화지’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조리 중 하나가 숯불 요리인데, 일본어로 꼬치나 쇠꼬챙이를 뜻하는 ‘쿠시(串)’라는 단어가 하쿠시라는 이름 안에 함께 들어 있어요. 그래서 로고 역시 쿠시를 연상할 수 있도록 끝을 뾰족하게 다듬었습니다. 레스토랑 이름과 로고에 제가 걸어온 시간과 요리에 대한 생각이 함께 담겨 있게끔요.” 전통을 존중하되 그대로 답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본질을 이해한 뒤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표현하는 일. 계절이 바뀌고 식재료가 달라질 때마다 그 위에 새로운 요리 한 접시를 그리는 과정은 하쿠시의 요리에 담겨 있다. “요리가 정해진 답을 반복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지는 어떤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도 하죠. 하쿠시는 지금도 그 백지 위에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은 뒤 한국에서 하쿠시를 열 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시장 흐름이나 손님 취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쿠시는 유행보다 최성훈 셰프가 오랫동안 경험하고 배워온 일본 요리의 틀 안에서 그가 생각하는 맛과 계절감, 식재료에 대한 태도를 솔직하게 담아낸다. “이곳은 결국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솔직하게 담아낸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유행이나 평가보다 하쿠시만의 색을 잃지 않는 것이에요.”


현재 하쿠시는 츠키와 호시, 두 가지 코스를 선보인다. 두 코스의 가장 큰 차이는 요리를 경험하는 방식에 있다. 츠키는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기까지 천천히 차오르듯 차가운 요리와 따뜻한 요리, 가벼운 맛과 깊은 맛을 한데 이어 커다란 서사를 만든다. 호시는 2018년 신사에서 시작한 하쿠시의 여정 속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요리들을 중심으로 구성한다. “츠키가 하쿠시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코스라면, 호시는 지금까지 하쿠시가 쌓아온 시간과 시그니처를 경험할 수 있는 코스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츠키에서는 차가운 요리 다음 따뜻한 요리가 나오고, 은은한 향의 요리 다음에 향이 풍부한 요리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감각이 환기됩니다. 식감 또한 부드러운 요리와 바삭한 요리, 가벼운 질감과 밀도 있는 질감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율합니다.” 한국은 제철 식재료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속도가 빠르고, 같은 재료라도 그날 상태에 따라 수분감과 지방, 크기, 향의 강도가 크게 달라진다. 이 때문에 한국 식재료로 일본 요리를 한다는 것은 매일 달라지는 상태를 읽고 정답을 찾아야 하는 수고를 요하지만, 언제나 같은 완성도의 메뉴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최성훈 셰프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2018년 처음 문을 열 때만 해도 홀로 끌어가던 하쿠시는 어느덧 각자의 자리에서 합을 맞추는 직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8년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타협하지 않는 태도다. 맛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면 손이 더 많이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건너뛰지 않고, 같은 요리를 만들고 있어도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계속해서 묻는 것. 하쿠시라는 이름에는 그런 시간이 겹쳐 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셰프가 되는 길은 어렵고 고된 길이지만, 셰프가 되고 나면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접시 위에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던 스승의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그렇게 레스토랑 이름이 되었다. 최성훈 셰프의 첫 도화지 위에는 지금도 매일 다른 계절의 선이 그어진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답을 찾아가는 일. 하쿠시가 완성해가는 한 접시는 결국 백지 위에 새겨진, 최성훈 셰프의 노력과 시간을 켜켜이 새겨낸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