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경고택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으로 손꼽힌다. 모란과 작약이 만발한 그곳에서 소설가 최영의 <춘야>를 읽으며 미술가 최정화의 전시 <당신은 나의 집>을 감상하는 행위는 가장 아름다운 유흥이다. 운경고택은 정치계의 거목인 운경 이재형이 1992년 작고할 때까지 39년간 거주했던 곳이며, 올해가 마침 30주기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 두 작가와 운경의 손녀인 운경재단 이미혜 이사는 2년 전부터 전시를 준비하며 많은 이야기 를 나누었다. 이미혜 이사의 이야기를 최정화와 최영 작가가 유심히 듣고, 영감을 얻어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운경고택 자체가 전시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운경과 최정화, 최영 작가의 인생과 작품 세계가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게 된 것이다. 전시장에 앉아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메타픽션 소설 <춘야>를 읽는 것도 좋고, 전시를 보고 집에 와서 소설을 읽는 것도 괜찮다. 고택에서 총 24점의 미술 작품을 선보이는데 작가와 소설가, 이사가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하나의 정답을 제안하지 않는다.
전시장 동선은 솟을대문으로 들어와 앞마당, 사랑채, 뒷마당과 정원, 안채, 장 독대와 우물 순서로 둘러보면 좋다. 소설 역시 장소별로 나뉘어 있으니 궁금한 부분부터 찾아 읽을 수 있다. 대문 앞의 ‘경찰’ 작품은 도로의 모형 경찰 때문에 더 많은 사고가 발생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만든 최정화 작가의 1998년 초기작이다. 당시 폐기를 위해 땅에 묻힌 모형을 최 작가가 매입해 운경고택을 지키는 근위병으로 부활시켰다. 운경이 ‘사랑방 정치’를 펼쳤던 사랑방에는 최정화의 시그니처인 플라스틱 바구니를 쌓아 올린 ‘나의 아름다운 21 세기, 성형의 봄’이 설치되어 있다. 이미혜 이사는 이곳은 운경의 일상이 스며 있으며, 최정화 작가는 일상이 담긴 소재를 사용한다는 것이 흥미로운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가족들이 거주했던 안채로 가면 멀리서부터 ‘엄마 밥’이라는 네온사인이 눈에 띈다. 운경의 안주인이 살림을 도맡아 했던 안채 마루에 아프리카 쟁기로 만든 네온 작품을 설치한 것. 소설가 최영은 쟁기로부터 인간 문명이 시작되었으니 더욱 의미심장하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운경의 자녀들이 사용한 건넛방에 설치한 ‘거대한 밥상, 꽃의 향연’이다. 사연이 담긴 일상의 물건으로 작품을 만드는 최정화 작가는 그간 운경재단의 장학금을 받은 1000명의 운경 가족에게 그릇을 기증받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운경 식구’들에게 사연이 담긴 그릇을 받아봅시다.” 이미혜 이사는 최 작가가 명명한 ‘운경 식구’라는 따뜻한 호칭에 울고, 운경 식구들이 보내온 그릇의 사연에 또 눈물을 흘렸다. 5월 28일에는 운경재단의 청각장애인 지원사업과 연계한 이벤트가 열려 최정화 작가와 청각장애인 가족들이 이 작품을 다시 설치할 예정이라니, 그때도 감동의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안채 돌담 앞의 ‘천하 아줌마 대장군’은 납작하게 두드린 알루미늄 대야를 아프리카 나무판에 동상처럼 세운 것인데, 멀리서 보면 마치 얼굴 같은 둥근 형상에 할머니들이 합장을 하기도 한다. “내 작품의 스승은 아줌마입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아이디어를 시장에서 얻고, 가장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아줌마만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밥그릇의 미학은 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라 아줌마들이 알려준 것이지요.” 최정화 작가는 ‘아줌마’는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하는 아름다운 단어라고 했다. 소설가 최영은 격동을 세월을 보낸 고택과 스타 작가 최정화와의 협업보다 소설의 당위성에 부담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전시 제목이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나는 주인공 복지오가 소설의 마지막에 ‘당신은 나의 집’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에 집중했습니다. ‘집’과 ‘당신’의 의미가 이 소설의 키워드이지요.” 소설과 미술이 만난 신선한 전시도 보고, 집과 당신의 의미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전시는 6월 17 일까지 열리며, 인터넷으로 예약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