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새로운 예술적 실험의 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개인의 안식처이자 사회적 담론의 장소가 된 집이, 국내외 미술관에서 창작과 영감의 주제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시선과 함께 현대 예술이 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실사처럼 표현된 마테킹 작품이 어딘가 불편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Elmgree&Dragset
오늘날 집은 단순 생활 공간을 넘어 예술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창조적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반 고흐의 방에서 서도호의 움직이는 집까지, 집은 개인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동시에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술적 매체가 되고 있다.

© VeniceBien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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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열린 엘름그린 앤 드라그셋의 <더 컬렉터스> 전시관 전경. © VeniceBiennale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엘름그린 앤 드라그셋. 이 듀오 아티스트가 기획한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덴마크&노르웨이관 특별전은 이들의 유명세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예술의 새로운 트렌드를 예고함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제목에 암시되어 있다, <더 컬렉터스 The Collectors>. 컨셉트는 부동산 매물로 나온 집을 구경한다는 것이었다.
집 수영장에는 시체 한 구가 둥둥 떠 있고, ‘집 팝니다 For Sale’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다. 진짜인가 싶어 건드려보는 관객들도 있는데, 정교한 마네킹에 옷을 입힌 것이다.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뒤로한 채, 집 구경을 하러 들어가본다. 넓고 호화로운 집 안 곳곳에는 집주인의 취향이 담긴 세련된 가구와 작품, 세라믹 등의 장식물이 즐비하다. 파빌리온 형태의 전시를 벗어나 덴마크와 노르웨이 작가들의 작품을 흥미롭게 소개하는 스마트한 스토리텔링이 아닐 수 없다. 거실 한쪽에는 한 남자가 발가벗은 채 소파에 편안히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다. 이미 밖에서 한 번 속은 관객들은 당연히 마네킹일 거라 생각하고 그 옆의 의자에 앉는데, 놀랍게도 그는 퍼포먼스 중인 실재 사람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국가관 대신 한 컬렉터의 집을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나 기획자보다 컬렉터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내다본 것이 아니었을까? ‘수동적인’ 컬렉터의 죽음, 그리고 ‘적극적인’ 탄생에 대한 예고다. 실제로 컬렉터의 집을 공개하는 현상도 가속화되고 있고, 소셜 미디어의 보급 등으로 이제는 미술관에 가는 대신 온라인으로 컬렉터의 집을 구경하며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는 시대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해변가에 위치한 찰스&레이 임스의 집. ©이안아트컨설팅
컬렉터의 집, 미술관이 되다
과거 프랑스 왕이 머물던 궁전이 시민혁명을 거쳐 공공 미술관이 된 것처럼, 오늘날 컬렉터의 집은 미디어 혁명을 거치며 온라인 미술관 역할을 하고 있다. 유명 연예인이나 사업가의 집과 그 안의 컬렉션을 공개하는 것은 그들을 21세기 루이 14세로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화려한 할리우드 스타 킴 카다시안의 집이 하얗고 깨끗한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꾸며진 것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된다. 또한 1200억원에 달하는 바스키야 작품의 구매자로 알려진 일본 사업가 유사쿠 마에자와의 작은 미술관 같은 집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그림애호가인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장 푸르베의 가구를 중개하는 갤러리스트 패트릭 세귄은 집에 어떤 가구를 두고 있는지, 또는 유명 디자이너 인디아 마다비가 꾸민 예술후원자 마야 호프만의 런던 집이 궁금하면, 책을 펼쳐보거나 인터넷 검색 몇 번이면 언제든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루브르 미술관 같은 고전 건축물이 아닌 평범한 주택이 미술관이나 작품이 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디자이너 찰스&레이 임스의 집이다. 캘리포니아 해변가에 자리 잡은 집인데, 1949년 잡지 <예술과 건축 Art and Architecture>의 주택사례연구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 부부는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며 삶과 일이 하나가 된 시간을 보냈다. 관람객은 마치 그들이 지금껏 살다가 잠시 외출한 순간에 들어선 것처럼, 그들이 사용하던 당시 소품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 푸르베의 6×6 디마운터블 하우스.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를 목적으로 설계된 장 푸르베의 분리형 주택. ©이안아트컨설팅
주택이 예술이 된 또 다른 유명한 사례는 바로 장 푸르베의 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그는 피난민들이 임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빨리 짓고 해체할 수 있는 분리형 주택을 건설하여 임시 주택, 학교, 대피소 등으로 제공했다. 전쟁 이후에는 시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방갈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유급휴가를 제시한 프랑스의 바캉스 문화와도 연결된 건축인 셈이다. 본래 영구적인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어서 주택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소멸되었으나, 남아 있는 소수의 주택은 이와 같은 역사적 의미가 더해지며 오늘날 주요 컬렉터의 희귀 소장품으로 인기가 높다.

머리를 집 속에 넣은 채 몸만 나와 있는 여인의 신체를 형상화한 조각은 루이스 부르주아의 <여성의 집 Femme Maison>. © MOMA
사적인 삶, 이 시대의 담론이 되다.
예술은 항상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를 처음으로 맞이한 1960년대 작가들이 산업과 예술이 결합된 ‘팝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 모더니즘 시대의 종말과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맞이하던 1990년대 작가들이 중심과 주변, 남성과 여성,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등 정치적 담론을 다룬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 개성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고, 바로 그 정점에서 집은 예술의 중요한 울타리가 되었다. 작가들은 집에 투영된 개인의 정체성을 통해 사회에 대한 발언을 쏟아놓고 있다.

루이스 부루주아의 드로잉 작품.

요시모토 나라의 작은 집.
요시토모 나라의 작은 집은 맞벌이 부모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동안, 방과 후 혼자 집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는 소년의 세계를 담고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열쇠아동’이라는 표현이 그 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요시토모 나라와 비슷한 연배의 서도호는 같은 시기 서울의 한옥에서 자란다. 점점 높은 건축물과 고가가 들어서는 도심 풍경 속에 있다가,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집 문턱을 넘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경험은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의 정체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한옥 집은 이제 천으로 제작되어 작가를 따라 세계를 다니는 이동 가능한 부유물이 된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출세작 또한 ‘집’이었다. 머리를 집 속에 넣은 채 몸만 나와 있는 여인의 신체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이고 있어도 항상 집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존재를 대변한다. 드로잉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1976년 발행된 미술평론가 루시 리퍼드의 책 <중심으로부터: 여성 예술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에세이> 표지 작품으로 선택되면서 65세 여성 작가에게 새로운 커리어를 열어주었다. JR은 아그네스 바르다와 함께 사진 부스로 개조한 대형 밴을 타고 프랑스 시골 마을을 돌며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찍어주는 프로젝트를 펼친다. 곧 철거될 광부 마을에 한 여성만이 광부 아버지와 함께 살던 이 집을 떠날 수 없다며 이주를 거부한다. 두 작가는 그녀의 얼굴 사진을 집 크기만큼 크게 확대하여 집 앞에 붙인 채 그녀에게 밖으로 나와보라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 사진이 붙은 집 모습을 보며 격한 감정에 휩싸인다.

영화 (2017)의 장면 일부. © Visages-Villages
요시토모 나라, 서도호, 루이스 부르주아, JR의 작품에 등장한 집은 성별, 연령, 국적이 다른 개별 자아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맥락을 소개하는 매개체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 투영된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제 발전의 논리에 밀려나는 가족의 가치, 근대화와 전통이 갈등하는 아시아의 신흥 도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 도심 개발과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 등의 모든 이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통로는 바로 집이다.

호르헤 파르도의 프로젝트 일환으로 완성된 아를라탄 호텔.
경계 너머의 예술
집이 예술의 주요 매체로 등장하면서 집을 직접 짓거나 공간을 다루는 유형의 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집 안에서 현대미술과 디자인, 공예와 건축, 그리고 심지어 삶 속의 움직임(퍼포먼스)까지 하나가 되면서 장르의 경계는 흐려지고 있다. 예술, 디자인, 건축이 통합되고 있고, 집이 미술관으로 제시되면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용도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낙후된 지역 개발의 일환으로 열린 티에스터 게이츠의 전시.
호르헤 파르도의 LA 집 프로젝트는 지금도 회자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다. 그는 1994년 미술관 내부에 전시할 작품을 구상하는 대신, 외부에 존재하는 미술관을 제안하는 책자를 10부 만들었다. 총 22쪽 분량의 책자에는 상세한 주택 및 내부 가구 설계도가 색색으로 그려져 있다. 책 속의 구상은 여러 전시에서 부분적으로 구현되다가 마침내 LA 현대미술관의 제안으로 실제 부지를 얻어 5년 동안 제작되었다. 공간을 구획하고 구상하는 기획에서부터, 집 안 곳곳에 들어갈 조명과 가구, 타일 등 소품을 제작하고 칠하는 것까지 모두 작가가 직접 진행한 작업이었다. 미술관의 전시실처럼 각각의 방에는 작가가 큐레이팅한 작품이 걸렸다. 그러나 이곳에 작품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이곳은 언덕 위에 지어진 거대한 견본주택이자, 예술작품이자, 미술관으로서 관람객을 맞이했다. 시내에 있는 현대미술관과 이 집을 오가는 셔틀버스도 마련되었다. 이곳에서 관람객이 경험하는 것은 전시 작품 한두 개가 아니라, 건축과 풍경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동네를 오가는 여정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파르도가 만든 작업은 대부분 건축적인 설치물에 가까웠다. 2010년 가고시안 LA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 제목은 놀랍게도 <불고기>다. 한류가 대세인 지금의 상황을 10년이나 앞서 내다본 듯하다. 실제 전시장 안에 놓인 테이블 등은 한국식 불고기 테이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며,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한 부부의 결혼사진, 아이의 돌 사진 등이 붙여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솜씨를 뽐낸 작가의 다음 행보다. 그에게는 수많은 인테리어 작업의 의뢰가 몰려왔다. LA 해머미술관의 레스토랑, 미술후원자 마야 호프만의 아를르 아를라탄 호텔 인테리어 등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예술인지 인테리어인지 알 수 없는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 속에서, 마찬가지로 조각품인지 음식인지 헷갈릴 정도로 섬세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일상과 예술이 하나가 된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이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다.
티에스터 게이츠 역시 삶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는 작업을 펼친다. 그는 시카고 변두리의 낙후된 지역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흑인들이 다니던 교회나 학교가 철거되는 것을 흑인 이민자의 삶의 유물이 사라지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한평생 철물점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살린 가장의 가게와 흑인의 역사를 소개한 잡지사 등을 인수하여 보존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작품과 전시를 이어나간다. 하찮아 보이는 물건과 공간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유형이 담겨 있음을 역설하며, 그는 이것을 디자인이나 공예가 아닌 ‘민예’와 연결시킨다. 훈련된 장인이 만든 수준 높은 작품이 아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소박한 삶 속의 지혜와 아름다움의 가치,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것이다.

LA 해머 미술관의 레스토랑.

호르헤 파르도의 책자.
끊임없는 탐구의 대상
미래에도 집은 끊임없이 예술가들을 자극할 것이다. 집은 개인의 삶, 사회 구조, 그 사이에서 발현되는 정체성, 그리고 기억을 담고 있는 장소로서 예술적 탐구의 주요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마 예술가들이 주목할 부분은 전통적인 집의 개념이 변화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여기저기 옮겨 사는 노마드한 삶, 공공주택에 거주하며 커뮤니티 시설을 이용하는 삶, 회사 탕비실 간식코너를 집 안에 마련해놓은 효율성 추구형 신혼 부부, 집 밖의 카페를 내 집 거실처럼 활용하는 1인 가구 등, 사회적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예술가들의 촉수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