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의 길

사진가의 길

사진가의 길

한파주의보가 내린 지난 1월의 어느 날, 사진가 마이클 케나를 따라 강원도의 설원과 바다를 누볐다. 예측 불가능한 겨울의 순간이 그의 렌즈에 포착되길 기대하며.

Pine Trees, Study 1, Wolcheon, Gangwondo, South Korea. 2007. © Michael Kenna

미디엄 포맷 필름 카메라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이클 케나 작가.

현재 공근혜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전시 <건축을 넘어>는 풍경사진의 대가 마이클 케나가 포착한 세계의 건축물을 모은 전시다.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포착한 건축물은 그의 풍경사진과 닮아 고요한 동시에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자연의 간극 따위엔 개의치 않은 듯, 오직 시간과 공간 속 존재하는 피사체가 지닌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이번 전시를 기념하여 2년 만에 한국을 찾은 마이클 케나 작가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으레 그랬듯, 카메라를 들고 자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발자취를 따랐을 때 내 시선의 끝엔 무엇이 맺힐지 궁금해하며 사진가의 길을 함께했다.

그날은 하필 올겨울 첫 한파주의보가 내린, 추위가 절정으로 치달은 날이었다. 마이클 케나 작가는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에 달하는 대관령 언덕 위에 누워 몇 분간 가만히 멈춰 있었다. 새롭게 찾은 ‘나무 친구’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흐르는 콧물을 닦을 여력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추위였지만, 일행 중 최고령자인 70대 작가는 초연히, 그리고 태연히 렌즈 앞 피사체에만 집중했다. 케나 작가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동행한 허동욱 사진가는 대관령 촬영이 끝나고 나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차에 올라타 “간만에 사진다운 사진을 찍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시안을 미리 구상하고, 사전 세팅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통제하는 스튜디오 촬영이 아니었다. 피사체부터 날씨까지, 그 어떤 것도 미리 생각해두거나 마음대로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전 6시부터 시작한 스케줄이 끝나고, 제대로 된 첫 끼를 맞은 저녁 자리에서 작가에게 물었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하고 고된 날씨에, 당신을 세상 밖으로 나서게 해 셔터를 누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라고. 그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열정을 느끼는 일을 하게 되면 절로 움직이게 된다”고. 심지어 “이번엔 눈보라가 불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며, “다음에 꼭 다시 오고 싶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제 막 고희를 넘긴 작가에게서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21세 무렵의 눈동자를 보았다. 고될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여정을 따라간 이유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을 좇기 때문이 아니었을는지. 작가와 나눈 대화를 홀로 곱씹으며 그와의 인터뷰를 정리해본다.

Basilica San Marco, Study 3, Venice, Italy. 2019.

Philosopher’s Tree, Study 1, Biei, Hokkaido, Japan. 2004. © Michael Kenna

Flatiron Building, Study 1, New York, New York, USA. 1976. © Michael Kenna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2월 15일까지 공근혜갤러리에서 진행하는 <건축을 넘어> 전은 건축물을 촬영한 작업을 다룬다. 당신에게 자연과 나무, 건축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둘 사이엔 유사한 부분이 더 많다. 모두 우주의 일부인 동시에 살아 숨쉰다. 나는 나무, 바다, 산 또는 건물과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우리 모두 서로의 주변에 공생하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우리의 일부인 동시에 우리 또한 그들의 일부로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다.

강원도 영월의 솔고개 소나무를 바라보는 마이클 케나 작가.

대관령의 언덕을 오르며 피사체를 탐색 중이다.

한국 대중들에게 <솔섬>(2007)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LNG 생산기지가 될 뻔한 강원도 삼척 월천리의 솔섬이 당신의 사진 덕분에 자연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사진 한 장이 천 마디 말보다 값지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내 사진이 이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예술을 통해 전개되는 선의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누군가 사진을 지구에 심겨진 씨앗에 비유하며 각각의 작품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동시에 큰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그 말을 좋아한다. 내 작업은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상상력을 투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바라며 일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영향이나 변화를 전개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솔섬>같이 큰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작은 작품 하나가 관객을 움직이는 힘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당신 작업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사진 찍을 때마다 존중과 경외심, 그리고 우주의 신비에 대한 놀라움을 담아 촬영한다. 내 인생의 매 순간은 절대적인 기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촬영을 할 때 지닌 마음가짐이 미세하게나마 인화된 사진으로 이어진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객의 반응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조용히 렌즈 속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작가.

동해 바닷가에 잠시 멈춰 그곳의 정취를 카메라에 담았다.

겨울을 가장 선호하는 계절이라고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겨울은 해가 짧은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이 많은데. 이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겨울 촬영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에 바로 답이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제약 조건 말이다. 작업 초기부터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감지할 수 있는 것, 즉 남겨진 것들의 자취와 흔적, 분위기 등을 포착하려 노력해왔다.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신이나 우주 뒤 숨겨진 자연의 힘 같은 초인적 힘의 존재를 믿었는데, 동네 교회에 앉아 그 존재를 상징하는 듯한 제단 위 내리쬐는 빛을 지켜보곤 했다. 겨울에는 구름, 비, 눈, 바람, 그림자, 긴 밤이 있고, 선명함은 가려져 있다. 밝은 햇살이 돋보기 역할을 하며 모든 세세한 요소를 드러내는 여름과는 빛의 성격이 다르다. 개인적인 취향은 겨울 쪽이고, 그에 따라 사진 작업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동시에, 당신은 인내심이 강하고 조급해하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신학교에서 보낸 7년 동안, 매일 밤 ‘위대한 침묵 Magnum Silentium’이라는 시간을 가졌다. 10시간 동안 대화나 소통을 할 수 없었는데, 나는 이 시간을 내면의 상상력을 듣는 사색의 시간으로 갖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소음, 24시간 가능한 즉각적인 소통, 문자와 이메일, 소셜 미디어가 지배한 오늘날의 세상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시간이다. 내 성격은 어린 시절 절제된 명상과 집중, 채우지 않아도 될 빈 공간을 사색하는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 덕분에 내게 부여된 것보다 더 많은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당신의 작품은 주로 6 × 6cm라는 비교적 작은 프레임을 통해 전시되는데, 이 한정된 프레임에 무엇을 담고 강조하려고 했는지 궁금하다. 내 작품들은 모두 암실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직접 인화한다. 톤 처리, 리터치, 질감 처리부터 서명과 마운트 작업 등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관객은 작품에서 10인치(25.4cm)가량 떨어져서 응시해야 한다. 이는 관객이 프레임에 홀로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친밀한 거리다. 사진을 찍고 인화할 때, 글을 쓸 때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 가장 최적의 작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거울과 창 Mirrors and Windows> 전시를 기획한 존 사코우스키 John Szarkowski가 말한 것처럼 혼자 있는 상태는 내면의 대화와 외부의 관찰을 가능케 한다. 각자의 경험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압도감을 느낄 때, 누군가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은 내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흑백사진 작업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는가? 색상의 제약 때문에 촬영부터 인화까지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한계 때문에 흑백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항상 색으로 둘러싸여 있는 만큼, 나는 주변의 요소들을 복제하는 데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적어도 내게는 흑백사진을 보고 다양한 해석이 오가는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너무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흑백TV 시대 출신인 내겐 흑백이 컬러보다 더 차분한 동시에, 개인의 해석이 더 많이 개입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최근 토마스 만의 책을 원작으로 한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봤다. 과거 흑백 버전으로 본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항상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 본 컬러 버전은 예전과 같은 감동을 주지 않았다. 이는 최근의 예시에 불과하다. 물론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암실에서는 흑백이 더 유연하고, 변화에 열려 있다.

사진가로서 한국을 계속 방문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사진 촬영은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과 대화를 나누는 행위로 간주한다고 말했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날씨처럼 간단하고 피상적인 주제를 다루다가도 관계가 더 깊어질수록 대화 또한 필연적으로 깊어지고, 사적인 이야기도 오가게 될 것이다.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면서 다양한 층위를 탐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 촬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번 방문한 장소를 다시 찾아 사진 찍는 것을 즐기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장소도 변하고 우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든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지혜로운 명언을 남겼다. 사람이든 강물이든 변하기 때문이다. 같은 장소로 돌아가더라도 그곳은 매번 달라질 것이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세계 곳곳에 ‘나무 친구’를 두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한국에도 당신의 ‘나무 친구’가 있는가? 솔섬 소나무들을 친구로 여겨서 그곳을 여러 번 방문했다. 내가 사진으로 담은 몇몇 나무들은 다시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제는 내가 촬영한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때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일본에서 무분별한 사진가들이 (내가 촬영한 장소를) 사진 찍으러 가는 길에 농작물을 짓밟고 경고표지판을 무시한 끝에 아름다운 나무가 베어진 일이 있었다. 그 외 또 다른 두 그루의 나무도 베어졌는데, 이 일이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관리가 어려운 장소에 불필요한 관광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더욱 주의해야 한다고 느꼈다.

세계의 다양한 공간을 탐험하고 돌아다니는데, 수많은 장소와 사물 중 셔터를 누르고 싶게끔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셔터를 누르는 이유, 시기, 방법에 대한 정해진 공식은 없지만,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려 노력한다. 먼저 공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내가 등장해, 주변을 탐색하며 시각적으로 끌리는 요소들을 감지하고 찾아내려 한다. 결과물을 미리 상상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어떤 사진이 기억에 남을 만한 사진이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대화 속으로 들어간다. 그 대화가 5분짜리가 될지, 5년짜리가 될지, 50년짜리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그 시간에 존재하고, 공식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답을 미리 알 필요는 없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사진가로서 커리어를 구축해왔다. 당신 나이의 절반보다 많은 기간이기도 한데,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와 현재를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내 나이 절반이 50세를 훌쩍 뛰어넘는 날이 올 때도 여전히 살아서 발로 뛰어다닐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쩔 수 없이, 내게 남겨진 시간이 뒤 세대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나는 21세의 마이클 케나가 71세의 마이클 케나와 여러모로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몸은 수년간의 경험을 반영할 것이다. 사진을 시작한 초기에는 이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할지 전혀 몰랐다. 항상 배가 고팠고, 열망했고, 열정적으로 매일 25시간씩 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더 이상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지금은 매일 24시간씩만 일한다.

2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동안 아직까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이 아름다운 나라와의 또 다른 대화가 기대된다. 가족, 사랑, 건강 등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시간의 소중함도 항상 떠올리곤 한다. 계속해서 흐르는 이 유한한 시간 속, 가능한 한 많은 장소에서 좋은 시간을 즐기고 싶다. 한국은 기회가 될 때마다 돌아와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멋진 곳 중 하나다. 기존 아카이브에 이번에 촬영한 사진을 몇 장이라도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더욱 기쁠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의 모습을 담은 책 프로젝트가 계획되어 있지만, 프로젝트가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일단 내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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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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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초상

흔적의 초상

흔적의 초상

사라져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사진가 강진주는 전통 도구와 기억을 사진에 담아, 시간의 흔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강진주 작가의 작품 <나무 바가지 Wooden bowl>. 두손갤러리에서 개인전 <밥은 먹고 다니냐>가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올해 1월 4일까지 열렸다. © 강진주

촬영을 위해 수집한 떡살.

2020년 출간한 ≪쌀을 닮다≫는 미식 책 분야의 오스카 상이라 불리는 구르망 월드 쿡북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생명의 순환’을 주제로 한국의 식문화를 예술로 표현하는 강진주 작가.

간장게장을 촬영한 사진을 패브릭에 프린트해 커튼으로 활용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간이 멈춘 듯한 독특한 공기가 흐른다. 이곳에서 사진가 강진주는 전통 도구와 자연의 흔적을 사진에 담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애정과 탐구를 펼쳐낸다. 강 작가는 중앙대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일본의 아마나 스튜디오에서 커머셜 작업으로 경력을 쌓았다. 그곳에서 얻은 기술적 완벽함과 작업 태도는 지금까지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일본에서 일하던 시절, 하루 수백 컷을 촬영하며 완벽함을 추구했어요. 하지만 사진이 단순히 기술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죠. 결국 제 작업은 사람과 도구, 그리고 시간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향으로 옮겨갔어요.” 그녀의 작업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만난 멘토 니시미야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그에게서 사진을 배운 적은 없지만, 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은 배웠다. “니시미야 선생은 항상 긴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셨죠. 단순한 일상 대화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로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어요. 그 시간은 저에게 ‘아트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 소중한 배움의 순간이었죠.” 강 작가는 지난여름,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멘토와의 마지막 순간을 회상하며, 그가 남긴 지혜를 여전히 작업에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작가의 또 다른 중요한 동반자는 바로 반려견 소피였다. 17년 동안 작가 곁을 지킨 소피는 단순히 반려동물이 아니라, 작업과 삶에서 균형을 찾도록 도와준 소중한 존재였다. “소피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고, 삶을 조금 더 떨어져서 바라보는 법을 배웠어요. 소피와의 시간은 작업뿐만 아니라 제 삶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어요.”

<수저 Spoon and chopsticks>. © 강진주

<광주리 Multi-purpose hamper 2>.

작가는 작업에서 전통 도구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할아버지 집에서 접한 맷돌, 멍석, 떡살 같은 물건이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가 절구에 쌀 빻던 모습, 멍석에서 피어오르던 먼지, 그리고 차례 음식에서 나던 간장과 참기름의 향은 제 작업의 기초가 되었어요. 그런 기억이 제 작업의 출발점이에요.” 작가는 이런 도구를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도구들을 주인공처럼 빛나게 하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제가 찍는 물건들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다워요. 하지만 저는 그들이 가장 빛나는 순간을 포착해주고 싶어요. 마치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는 주인공처럼요.”

철판과 합판으로 만든 작업 보드. 그동안 촬영한 작업물들이 가득하다.

오래된 건물이었던 터라 내부를 통째로 뜯어 고쳤다. 나무 바닥과 박공지붕이 주는 따스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가구 반닫이 위로 작가가 그동안 수집해온 독특한 오브제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림은 곽인식 작가의 작품.

1월부터 12월까지 각각 그 달을 대표하는 식재료를 촬영한 시리즈 중 4월의 딸기 작품.

 

<쌀싹과 유기>. © 강진주

집 안 곳곳 이야기가 담긴 한국 전통의 것들이 가득하다.

≪소피의 식탁≫, ≪쌀을 닮다≫ 등 그동안 출간해온 책과 아카이빙 자료들. 뒤에 걸린 작품은 10월의 배추 작품.

강진주 작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동반자인 반려견 소피 사진.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수납함. 세 번째 단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캐논 카메라가 강 작가의 인생 첫 번째 카메라다.

<저울 Scale>. © 강진주

아티스트 성능경의 퍼포먼스 도중 타다 남은 부채가 걸려 있다.

주방 선반 위에는 조선후기 도자기 석간주와 시각장애인이 만든 천사상이 놓여 있다.     

작가의 작업 방식은 도구를 의인화하고, 그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그녀가 사진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멈추는 행위지만, 동시에 시간의 흔적을 담는 과정이기도 해요.” 강 작가의 작업은 자연스레 한식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1월부터 12월까지 기록하며, 사라져가는 전통과 자연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특히 그녀가 쓴 책 ≪쌀을 닮다≫는 이런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쌀은 단순히 식재료를 넘어서, 한국 문화와 역사의 중요한 상징이에요. 1만7000년 전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가 증명하듯이, 쌀은 이 땅의 뿌리 같은 존재죠.” 그녀의 작업은 과거를 향한 향수를 넘어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기후 변화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작업에 담아내고자 한다. “우리가 각자 쓰레기를 20%만 줄여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요.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작은 실천이라도 하게 만드는 동기를 주고 싶어요.” 강진주 작가의 사진은 기록을 넘어서 사물과 인간, 자연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작업이다. 그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과 시간을 불러내어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사진은 제게 작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녀요. 그것은 삶의 여정이자, 제가 담고 싶은 세상을 담아내는 도구예요.” 사진가 강진주의 이야기는 시간과 기억에, 그리고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INSTAGRAM @jinju_k_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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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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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전통

투명한 전통

투명한 전통

아트 퍼니처 작가 김현희는 한국 전통 가구를 해체하고 아크릴과 같은 현대적 소재로 재구성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새롭게 선보인 연작 ‘애프터 이미지 After Image’. 물성 자체에 집중해 나무의 결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작업실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화이트 노스탤지어’ 연작.

어느 공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보게 되는가? 거대한 조형물, 아름다운 그림, 혹은 그저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가구…. 그러나 가구가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물건이 아니라, 우리 삶을 담아내는 예술로서 존재한다면 어떨까? 김현희는 이러한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찾아가는 아트 퍼니처 작가다. 한국의 고유한 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아크릴이라는 비전통적인 소재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녀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오래된 가치를 현재 시점에서 다시 쓰고자 한다.

독립예술공간 아트 포 랩에서 선보인 개인전 전경. 보자기를 모티브로 폐비닐을 모아 만든 <보 BO> 2024. © 아트 포 랩 제공, Photo by 구의진

대표작인 ‘규방 시리즈 Q Bang Series’는 전통적인 규방 가구에서 출발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이 머문 안방인 ‘규방’은 그들의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제한적인 공간으로서 상징성이 짙다. 작가는 이러한 규방 가구를 해체하고, 벽을 허문 프레임만 남겨 현대 여성의 자유로움을 표현했다. “가구의 뼈대, 프레임은 마치 안팎의 경계처럼 느껴졌어요. 우리가 갖고 있던 관념이 만들어낸 벽을 허물고 싶었습니다.” 이어서 선보인 ‘화이트 노스탤지어 White Nostalgia 시리즈’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기억’과 ‘향수’를 작업의 중심으로 삼았다. “제주에서 보낸 유년 시절, 그리고 서울과 해외에서 느낀 이방인의 감각이 이 작업의 시작이었어요.” 이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담은 물건으로서 ‘뒤주’를 떠올렸다. 뒤주는 쌀을 보관하던 가구지만, 한국인에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인 존재다. 복잡한 서사를 간직한 가구를 반투명한 아크릴로 재현하며 기억 속 희미함과 왜곡, 그리고 현대적 재료의 물성을 탐구했다. 최근에는 폐비닐과 발포지를 활용해 지속 가능한 재료를 사용한 보자기 평면 작업에 도전하며, 과거의 공예와 현대의 지속 가능성을 연결하고 있다. “옛날에 보자기는 버려진 옷 조각으로 만들어졌잖아요. 전통 공예의 지속 가능성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그녀가 고유한 물성과 현대적 재료를 융합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전통 가구를 현대적 소재로 재해석해 선보이는 김현희 작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예술을 꿈꾼다. “가구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 들어오는 물건이에요. 그래서 제 작업의 철학이 무의식적으로 스며들면 좋겠어요.” 그녀는 과거를 되새기고, 현재를 관찰하며, 미래를 고민하는 작업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는 쉼과 깊이를 탐구하며, 새로운 작업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현대 시점에서 어떤 울림을 주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각자가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지 기대해본다.

지난해 12월, YZHQ 갤러리에서 세르주 무이 Serge Mouille와 함께 선보인 개인전 . © YZHQ 갤러리

김현희 작가의 작업실 전경.

SPECIAL GIFT 김현희 작가에게 증정한 끌레드뽀 보떼의 더 세럼 II은 피부에 고르고 빠르게 흡수되어, 피부 본연의 힘을 일깨워주고 짧은 시간 안에 피부 속부터 빛나는 결빛 광채를 선사한다. 50mL 34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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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이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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