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의 시선이 닿지 않던 박물관의 수장고가 이제는 전시의 중심으로 나섰다.
관람의 패러다임을 재편한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이야기.

총 4개 층으로 이루어진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드넓은 전경. © Hufton+Crow

웨스톤 컬렉션 홀의 중심에 자리한 로빈 후드 가든의 실제 건축 단면. © David Parry

V&A의 팀 리브 부회장 겸 최고 운영 책임자. © David Parry
미술관의 전시장이 연극 무대라면, 수장고는 백스테이지다. 관객들의 시선이 닿지 않지만, 단 하나의 완벽하게 큐레이션된 무대를 만들기 위한 수백, 수천 가지의 소품과 노고가 숨어 있는 곳. 백스테이지가 관객들에게 평생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듯 수장고 또한 마찬가지다. 전시가 아닌 보관의 영역을 담당하는 수장고 자체가 무대가 되어 관객 앞으로 나설 일은 없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이 지난 5월 31일,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를 전면 개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0년간의 준비 끝에 완성된 세계적인 건축가 그룹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 Diller Scorfidio + Renfro가 설계한 곳이다. 총 1만6000㎡ 규모에 걸친 4개 층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큐레이션이나 보관 분류 체계에 따르지 않고, 관람객의 호기심에 따라 작품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전시 물품 또한 다양하다. 25만 점 이상의 오브젝트, 약 35만 권의 도서, 1000개 이상의 아카이브가 소장되어 있다. 고대 로마 유물부터 세계 최대 크기의 피카소 작품, 빈티지 밴드의 티셔츠, 아방가르드 패션, 오트 쿠튀르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범주의 컬렉션을 갖췄다. V&A의 팀 리브 Tim Reeve 부회장의 말이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자 V&A에 대한 백스테이지 통행권으로서, 국가 소장품에 대한 접근 방식을 지금껏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로 혁신한다. 전 세계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돌보는 것부터 새로운 연구까지,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 전시에 있어 더 이상의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 V&A는 그 한계를 넘는 새로운 방식의 경험을 제안한 셈이다.

수장고 겸 창고형 갤러리를 표방하는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아이덴티티를 엿볼 수 있는 공간. © Hufton+Crow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보존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다목적 보존 스튜디오.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중앙 전시 공간인 웨스톤 컬렉션 홀은 얼핏 보면 박물관보다는 창고형 쇼핑몰에 가까운 공간이다. 하지만 그 중심을 구성한 6점의 대형 오브젝트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건축 혹은 예술 유산이다. 미국 근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의 1930년대 카우프만 Kaufmann 사무실, 현대 주방의 모태가 된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 Margarete Schütte-Lihotzky의 프랑크 푸르트 주방, 브루탈리즘 건축의 대표 격인 로빈 후드 가든의 실체 건축 단면과 10여 년 만에 다시 대중 앞에 공개된 세계 최대 피카소 작품 <레 트랭 블뢰>까지. 이들은 지역 커뮤니티, 창작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된 영상, 출판물, 예술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약 100개의 소규모 큐레이션 전시가 배치되어 있다. 고대 불교 조각부터 토머스 헤더윅 Thomas Heatherwick의 2012 런던 올림픽 성화대, 빈티지 축구 유니폼 등이 선반이나 구조물의 측면과 틈새에 설치되어 관람객은 마음 가는대로, 길을 잃듯 곳곳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피카소 작품 <르 트랭 블뢰>가 전시되어 있다. © David Parry, The estate of Pablo Picasso

오더 언 오브젝트를 통해 보관된 소장품들을 볼 수 있다. 사진 속 작품은 루 리드 Lou Reed 콘서트 포스터와 더 스페셜스 The Specials 포스터. © Bet Bettencourt
여기까지 들으면 그저 창고형 갤러리를 표방한 공간이 아닌가 싶겠지만, 주문형 전시 프로그램 ‘오더 언 오브젝트 Order an Object’ 에 대해 듣는다면 이 공간이 왜 ‘수장고’라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더언 오브젝트는 그중에서도 전시되지 않은, 즉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소장품들을 관람객이 직접 선택해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다. 고대 이집트 유물, 로마 시대 프레스코화, 1930~60년대의 웨딩드레스까지. 폭 넓은 소장품이 대상이며, 지금까지 가장 많은 호출을 받은 것은 1954년 제작된 발렌시아가의 이브닝 드레스다. 전시된 작품만 감상할 수 있었던 기존 박물관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관람객들이 능동적으로, 보고 싶은 작품을 직접 골라서 요청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말은 단순한 관람 권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되지 못 할 뻔했던 것들,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보관과 전시 사이의 경계를 흐린 이 공간은 박물관이라는 구조 자체를 재구성한 거대한 실험장이자 일종의 제안이다. 그간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무대와 백스테이지의 구분을 허물고, 관람의 새로운 시작점을 ‘수장고’로 끌어온 것, 아주 오래전 만들어졌지만 존재 자체가 희미해졌던 이름을 불러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이 공간에서 가능한 가장 깊은 감상의 형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