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지 않는 미술관

불타지 않는 미술관

불타지 않는 미술관

대화재에도 흔들리지 않은 LA 게티 미술관. 철저한 방화 시스템과 혁신적 설계로 예술품을 보호하며, 문화 유산을 지키는
모범적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위기 속에서도 예술을 보존하고 나누는 게티의 역할이 더욱 빛난다.

게티 미술관 전경.

로버트 어윈이 디자인한 게티 미술관의 센트럴 가든.

전 세계인 모두를 안타깝게 한 지난 LA 지역 산불 모습.

지난 1월 초, 미국 LA 지역에 일어난 거대한 산불은 세계인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건물 1만2000여 채가 파괴되었고,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대피해야 했다. 사망자가 24명이나 발생하는 등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불길이 번져가면서 사람들이 걱정한 또 하나의 요충지는 바로 LA 게티 미술관이다. 부지 면적 약 46만8377㎡(14만 평)에 6개 건물과 가든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형 미술관이자 가장 큰 미술도서관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약 13만 점에 달하는 소장품 중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반 고흐의 아이리스, 렘브란트의 자화상 등이 있으며, 로마 및 에트루리아의 유물에서부터 현대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포함한다. 다행히 화재는 게티 미술관 인접 2km 부근에서 멈췄다고 한다. 그러나 화재에 대비해 소장품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1974년 리처드 마이어 설계로 미술관을 계획할 때부터 철저히 방화 시스템을 갖춰 지어졌고, 관리도 철저했기 때문이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13년이 걸려 1997년 개관한 미술관은 철저한 방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의 첫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하얀 베이지 톤의 돌 건물이 바로 내화성 석회암 재료인 트래버틴이며, 지붕은 잘게 자른 돌로 덮어 불씨가 붙지 못한다. 주변 조경도 내화성이 뛰어난 관목으로 조성했다. 빨리 타지 않는 참나무, 물을 많이 함유하는 아카시아 등을 선택하고, 상시 잡초를 제거하는 등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지하에는 약 380만L의 물이 저장된 물탱크가 있고, 파이프에는 스프링쿨러가 연결되어 있다. 단, 미술 작품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건물 내부의 스프링쿨러는 최후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각 전시실은 독립형 구조로서, 건물 안에 또 다른 작은 박스가 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화재 시 자동 방화문이 닫혀 불길 번짐을 막아주고 연기를 차단하는 특수 공기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이번 화재는 게티 미술관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계기였다. 게티 미술관은 지진에 대해서도 철저한 대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번 화재를 계기로 세계 각국의 언론이 게티 미술관의 철저한 화재 대비 시스템을 분석하며, 문화 기관의 모범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미술품 창고에서 화재가 일어나 큰 손실을 보았다는 뉴스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영국 런던의 모마트 미술품 창고의 화재로 유명 컬렉터 찰스 사치의 소장품이 불타버린 사건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고, 지난 2월 초에는 용산 국립한글박물관 공사 중 화재로 인해 일부 소장품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번 LA  재로 예술가 또는 컬렉터의 집이나 창고에 있는 작품들도 상당수 손실되었을 것이다.

적극적인 구호 활동을 펼친 프리즈 로스앤젤레스.

게티 미술관에서는 ‘LA 아트 커뮤니티 화재 구호 기금’을 긴급 발족시켜, 예술가와 예술 종사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운동을 진행 중이다. 주요 미술관과 재단이 기금 모음에 협력할 뿐 아니라, 게티 미술관 홈페이지 메인에 이 프로젝트를 소개해서 누구나 전자 결제를 통해 소액 지원금을 즉시 건넬 수 있게 한 것도 인상적이다. 또한 피해를 입은 예술가와 예술 종사자는 즉시 긴급 지원금을 신청할 수도 있다. 프리즈 아트 페어의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예정대로 문을 열어 구호 활동과 적극 연대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화재로 인해 아트 페어에 참여하지 못한 갤러리를 위해 부스 한쪽에 작품 전시 공간을 내주거나, LA 거주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적극 소개하고 판매 수익금을 기증하는 등이다. 뜻밖의 화재였지만, 이로 인해 LA 아트 커뮤니티의 결속력과 화재에 대한 경각심은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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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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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시의 새로운 시작

메르시의 새로운 시작

메르시의 새로운 시작

파리의 대표 편집숍 메르시가 파리 중심부에 ‘메르시 #2’를 오픈하며 새로운 장을 열었다.

테이블웨어, 테이블 리넨, 욕실 용품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만날 수 있는 메르시의 두 번째 매장.

2017년 파리 편집숍의 대명사이던 ‘콜레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편집숍은 마레 지구에 위치한 ‘메르시 Merci’일 것이다. 2009년 창립된 메르시는, 1975년 프랑스 아동복 브랜드 봉쁘앙 Bonpoint을 설립한 마리 프랑스 & 베르나르 코엔 부부의 독특한 창업 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매장의 수익금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프랑스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르시는 카페, 북스토어, 부티크를 아우르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문을 열며, 파리의 디자인과 라이프스타일 유행을 선도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마레 지구의 중심이 아닌 곳에 위치했지만, 건강한 식사와 커피를 즐기며 프랑스와 여러 나라에서 온 스타일리시한 의류와 디자인 소품을 만날 수 있어 인근 지역을 힙한 명소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이곳은 파리지앵뿐 아니라 파리를 찾은 관광객도 꼭 방문해보아야 할 명소로서, 메르시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은 기념품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유니섹스 패션과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제품도 다양하게 선보일 예정이다.

한편, 15년 넘게 사랑받아온 메르시가 2025년을 맞이해 새로운 도전을 한다. 그동안 메르시 매장은 면적 1500㎡의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찾는 고객이 많아 공간이 여유롭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르시는 3월 루브르 박물관 인근 파리 중심부에 ‘메르시 #2’ 매장을 오픈하며 접근성을 높였다. 이곳에서는 마레 지구 매장의 대표적인 아이템을 만나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일본 등 세계 각지 예술가들이 참여한 독점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특히 2호점은 유니섹스 패션과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 제품, 한정판 등을 선보이며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온라인 유통이 점점 커지는 시대에서 메르시는 단순한 매장이 아닌 파리지앵 삶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파리를 찾으면 꼭 가봐야 할 필수 방문지가 한 곳 더 추가되었다. ADD 19 Rue de Richelieu, 75001 Paris INSTAGRAM @merci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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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관(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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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느리게, 그리고 연약하게

낮고 느리게, 그리고 연약하게

낮고 느리게, 그리고 연약하게

길을 걷다 주운 작은 돌, 잘 들리지 않는 라디오 소리, 그리고 일상의 미세한 감각….
삶의 작은 순간 속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작가 양정욱과의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 2024’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에 함께한 작가 분들 모두가 훌륭한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저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간은 운이 좋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수상 전에는 중고마켓을 통해 미술 도구를 처분하고, 작업을 그만두려 하셨다고요. 이번 상이 앞으로 자신의 미술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요? 미술 인생은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옷소매 끝에 미술이 묻은 거죠. 분명 직업적으로 탄력은 생길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묻었다기보다는 옷에 쏟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저는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그 정도면 좋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것, 큰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즐기고 살아갑니다. 중고 물품도 잘 팔릴 때는 즐거웠습니다. 마켓에 올릴 사진을 찍는 것도 꽤나 즐거웠고, 물건과 낯선 구매자를 매치해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늘 하던 대로, 그 속에서 유연함을 가진 채 다음 일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작가님에게는 사람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 큰 사건보다는 일상의 삶이 작업의 소재가 되죠. 세상은 ‘더 높이, 더 빨리, 더 강하게’라는 올림픽 구호처럼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상의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게 합니다. 어떤 일상의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크고 소중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올려다 보고, 멀리 어딘가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은 올림픽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의 구호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조금은 낮고, 조금은 느리게, 그리고 조금은 연약하게’.
작업을 그만두려 했던 작가님을 일으킨 것도 거창하거나 대단한 목표보다는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라는, 작은 마음가짐이었다고요. 제게 작은 아날로그 라디오가 있습니다.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어서 볼륨이 이상합니다. 소리 레벨을 1부터 10까지로 본다면, 4부터 소리가 납니다. 1과 3 사이의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저와 라디오 사이에는 그런 교감을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1과 3 사이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주변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알아채고, 곤경을 알아채고, 기쁨을 알아채는 감각은 아주 미세한 것들로부터 이해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자라났으면 합니다.
행복에는 무뎌지기 쉬운 반면 불행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만큼, 사람들은 의도적으로라도 감각을 닫으려고 하기 마련이잖아요. 이런 사소한 감각을 계속해서 깨우치려 하는 일도 작가로서의 수행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일상이 있습니다. 그 일상에는 그만큼이나 다양한 길이의 실이 있습니다. 한쪽 끝으로 갈수록 불행에 가까워지고, 반대의 끝으로 갈수록 행복에 가까워집니다. 한없이 긴 실은 어쩌면 환상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실에 서서는 자신의 위치가 늘 불안하고, 자신이 이미 행복 가까이에 서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대부분이 많은 시간을 환상 세계에서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상은 비교적 짧은 실입니다. 불행 끝에서는 행복이 보여 희망이 되고, 행복 끝에서는 불행도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수행은 자꾸 길어지는 마음 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끝과 끝이 자꾸 떨어지는 실을 이어 붙이는 일이 아닐까요.

작품 <서로 아껴주는 마음> 앞에 선 양정욱 작가.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 전경.

전시장을 보면 벽이 분필로 그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서 일하는 사람들> #9와 #22 사이에도 선이 있고요. 사실 제 경우는 창작의 과정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못 찾고 작업을 진행합니다. ‘왜인지 해야 할 것 같은 일이기 때문에 해본다’는 식입니다. 이야기를 고르고, 수많은 것을 선택할 때 내가 해야 한다는 확신은 작업 시간을 버티게 하고 실현하게 만듭니다. 실현이 되고, 만나보고 나면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기절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득점하는 경우 같은 것입니다. 선명한 목적을 떠올려보면 관객의 움직임을 이용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관객이 서서 이동하면 선이 가려지면서, 관객 자체의 움직임을 다른 관객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시장에서 작품과 사람이 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센서 같은 게 없는, 양정욱식 인터랙티브 장난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찌 보면 작업은 대부분 선의 조합입니다. 저는 선을 좋아합니다. 끝과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서 일하는 사람들>에 있는 선의 경우는 9번에서 22번까지 장난처럼 놓아보았습니다. 벽의 분필 선도, 바닥의 실도 전시 오픈을 앞두고 갑자기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루해서 시작된 장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을 보면 종, 돌, 전구, 장난감 부품이나 멍석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져 있죠. 제 작업은 사람을 다루거나 사람들을 다룹니다. 오브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힌트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종이나 사발에서 나는 소리는 반복적인 움직임을 청각적으로 환기시켜 주기도 하고, 멀리서부터 작품을 존재하게 만들어줍니다. 공간 구석구석 작품이 있도록 만듭니다. 단순하게 설명했지만, 하나하나의 오브제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돌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나서 남겨보겠습니다. “길을 걷다가 돌을 하나 주웠다./ 작은 돌이었다. 돌이 좋아 보였다.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머니에 넣고 집에 걸어가는 길에 한참을 만지작거린다. 모양을 상상했다./ 집에 돌아와서 책상에 돌을 놓았다. 어떻게 놓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모양이 달라졌다. 아니 돌은 사실 그대로다. 걸어오는 동안 조금 만지작거렸다고 돌의 모양이 변할 리가 없다. 하지만 달라졌다. 길에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 생각했다. 기억이 없다./ 아까는 좋아 보이던 돌이 지금은 별로다. 실망하고 돌아서다 옆을 보니 다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옆을 앞이라고 생각하고, 방향을 돌려두었다./ 그 뒤로도 돌은 뒤였던 부분이 앞이 되고, 위였던 부분이 바닥면이 되어 놓여졌다. 매일 방향이 변하고, 매년 방향이 변했다. 하지만 그 돌의 모양은 변하지 않았다.”
소설, 시 등 문학 창작 활동도 꾸준히 하시죠. 실제로 전시장엔 작업과 관련된 짧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요.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본업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글의 표지에 가깝습니다. 표지가 선택되어야 책을 꺼내 보니까요. 표지를 보는 관객이 독자로 변하는 순간을 저는 좋아합니다.
‘저녁이 돼서야 알게 된 세 명의 동료들’의 배경음을 위해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기도 하셨다고요. 저는 사진을 볼 때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작품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주라기보다는 건반을 눌렀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시장에 가서 관람객들의 반응을 관찰한다고 하셨는데, 이를 통해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작업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에 있습니다. 작업을 핑계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제 기쁨이고 미술 직업인으로서 어떤 사명입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나, 앞으로 예정된 일정이 있으신가요? 늘 하던 대로 지낼 예정입니다. 크고 작은 전시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잡문과 그림을 모아 잡문집과 그림집 만드는 일에 좀 더 신경 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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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이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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