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서로 닮아가는 시대, 예술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닮음과 동조의 메커니즘 속에서, 진짜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엘름그린 앤 드라그셋의 프라다 파운데이션 전시. © Elmar Vestner

리움의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 © Ian Art Consulting

현재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루스 아사와의 회고전은 오는 9월 2일까지 진행된다. © 2025 Ruth Asawa Lanier, Inc., Courtesy David Zwirner / Don Ross

오는 9월 22일까지 보스톤 ICA 미술관에서 열리는 치하루 시오타의 대규모 전시.

토마스 사라세노의 작품. © Bottega Strozzi

구겐하임에서 열린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 © Wikimedia
지난 스위스 아트 바젤 페어에서 루스 아사와 Ruth Asawa(1926~2013)의 작품이 950만 달러(약 130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에서 활동한 일본 출신의 여성 예술가로서, 뒤늦게 재평가받기 시작하여 그녀의 작품으로 만든 우표가 발행되는가 하면, 현재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진행 중이다(4월 5일부터 9월 2일까지). 철사줄을 정교하게 엮어 만든 고유의 조각품은 무겁지 않고 가벼운 조각, 받침대 없이 공중에 매다는 형태로 조각의 개념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같은 일본 출신 작가 치하루 시오타(1972~ )의 작품이 연상된다. 오사카 출신으로서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인데, 실을 이용해서 공간 속에 거미줄 같은 그물망을 설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치하루 시오타의 대규모 전시회는 현재 보스톤 ICA 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5월 22일~9월 22일). 이 두 작가는 일본 여성 작가라는 공통점 외에는 서로 활동한 시간도 공간도 다르고, 한 작가가 다른 작가를 모방한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크게 연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2024년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전시한 엘름그린 앤 드라그셋의 작품도 유사하다. 작가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지만 마네킹이나 인형을 활용해 실재처럼 연출하여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전법을 구사하는 형식상의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하늘에 매달린 반짝거리는 조형물은 올라퍼 엘리아슨, 토마스 사라세노도 만들어 헷갈리기 일쑤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홍콩 작가 카싱 룽의 라부부 캐릭터는 오타니 워크숍의 공룡 캐릭터와 이빨이 닮았다. 어떤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작가가 생각나 헷갈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공통점을 포착하며 작품을 제대로 봤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이러한 유사성은 모두 우연일까? 놀랍게도 이런 현상은 자연계에도 있다. 물리학자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동조 Synchronization’ 현상 연구에 따르면, 반딧불은 제각기 빛을 깜빡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동시에 깜빡이게 되고, 심지어 여러 개의 메트로놈을 틀어놓으면 엇박으로 움직이다가 점차 같은 박자로 맞춰진다고 한다. 생명체끼리 서로 신호를 주고 받고, 심지어 메트로놈 같은 비생명체 경우에도 진동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정보전달 효율을 높이는 구조로 수렴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으로는 아직 그 실체가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다. 예술도 이 세계의 일부라는 점에서 동조의 메커니즘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예술계의 케케묵은 모방설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서로 베낀 것이 아니라, 집단 지성의 결과로 하나의 예술적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예술 사조가 만들어지면, 다음에는 그에 반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오면서 예술적 진화가 이루어져 왔다. 자연계에도 동일화 이후에는 변이가 나타나며 진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동조 현상만 지속되고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니 새로운 이미지도 금새 식상해져 참조가 되기 어렵다. 활로를 찾기 위해 인간의 눈이 아닌 기계나 로봇, 인공지능에서 희망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단계라고 여겨질 만한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이 시대의 거울이라는 점에서 이런 흥미로운 가설도 세워본다. 예술가들이 일부러 창작 욕구를 뒤로 미룬 채, 동의어를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계점에 정체되어 포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모두가 점점 똑같아지고 있는 시대의 답답함을 좀 더 많은 사람이 깨닫게 되었을 때, ‘짠’ 하고 보여줄 다음 페이지의 예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