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을 얘기해온 <메종>. 아홉 번째로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나전칠기를 이야기합니다.
↑ 포도 문양의 포도문 나전함.
벚꽃 가지 아래로 봄비 내리는 4월 어느 날,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 사이에 위치한 수유동을 찾았다. 두 달 넘게 기다려온 시간, 오왕택 나전 장인과 전수자 오유미 작가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봄꽃의 개화를 재촉하는 반가운 봄비를 맞으며 찾아간 길. 두 분을 마주하자 시간을 되돌린 동화 한 편이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위 다듬어낸 자개를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
아래 왼쪽 실톱질을 하는 과정.
아래 오른쪽 동백문 나전함, 유채화 나전함, 나팔꽃 나전함의 모습.
1973년 전남 광주. 칠방에서 일하면 평생 먹고사는 건 걱정 없다는 모친의 제안으로 나전을 처음 접한 오왕택 장인.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10호 김태희 나전장을 사사하고 7년 동안 고된 세월 속에 진정한 공예가의 인생을 걸어왔다. 김태희 나전장은 제자 오왕택의 남다름을 일찌감치 간파했고 그가 성공하리라는 믿음 또한 강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최고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고집이 있었어요. 후대에 누가 봐도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장인의 굳은 의지와 작업에 대한 무한 신뢰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찌 어려운 상황이 없었을까. 1994년, IMF의 한파 속에서 나전장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1년을 기약했던 퀵서비스였으나 무려 15년간 가족을 이끌어오던 오왕택 장인. “당신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국가적인 손실이다”라는 아내의 조언과 두 딸들의 지지로 어렵게 재기한 것이 어느덧 6년이다. 긴 시간 동안 나전을 떠나 있었지만 보물 상자 안에 고이 간직해두었던 도면, 스케치 작업을 보노라면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간 감동이 몰려온다.
↑ 모란문 진주장.
보통의 나전칠기 작업은 각 분야가 세분화되어 있지만 오왕택 장인은 도안 구성부터 마음에 들 때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정신을 녹이되 창조적일 것을 강조하는 그는 “재료의 순수함이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고 뼈 있는 한마디를 전한다. 또한 색, 선, 문양이 어울려 시대에 맞는 디자인을 개발할 필요가 있고 현대적 전통 공예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그의 주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작년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의 장외 전시 중 하나로 호평받은 <한국 공예 법고창신전>. 다양한 분야의 인간문화재와 합동으로 열린 전시에서 전통 공예를 현대의 디자인으로 재창조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자개로 무늬를 만드는 방법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를 백골에 붙여 직선 또는 대각선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내는 끊음질과 자개를 실톱, 줄로 문질러서 국화, 대나무, 거북이 등의 각종 도안 문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이 있다. 일반적으로 국내산 전복 껍데기, 청패(안쪽을 잘게 간 전복 껍데기, 얇은 전복)를 소재로 실톱으로 잘라내거나 겹겹의 도안 위에 하나씩 붙여가며 시작한다. 포도 문양의 포도문 나전함, 딸과 함께 만든 동백문 나전함, 꽃이 들어간 유채화 나전 벽걸이와 나팔꽃 나전 벽걸이 등을 보자면 과연 인력을 의심할 정도로 엄청난 작업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지구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중국어를 전공한 딸을 제자로 삼은 지 3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작업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진 부녀의 모습이 봄 햇살보다 따뜻하고 정겹다. 오유미 작가의 작업은 주로 나무와 색을 이용한 주방 도구가 많다. 원형 나전 쟁반, 목단무늬 다반, 옻칠 식탁 매트와 디저트 매트 등 부엌을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이 작품에 스며 있다.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마음에 드는 모양새가 갖춰질 때까지 보고 또 본다. “항상 되돌아보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 싶고 그런 작품을 보러 박물관에 관객들이 몰려오는 것이 꿈입니다.” 그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 오늘도 나비는 날아다니고 가지는 살아 있으며 꽃은 바람결에 흩날린다.
오왕택 나전 장인과 전수자 오유미 부녀의 모습.
글과 사진 이정민ㅣ에디터 박명주
출처 〈MAISON〉 201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