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소통하는 감성 의자

시간과 소통하는 감성 의자

시간과 소통하는 감성 의자

시간과 노력으로 아름다운 물건에 영혼을 불어넣는 장인의 이야기. 이번 달은 열다섯 번째 이야기로 올곧은 마음으로 가구를 만드는 목수 박홍구를 소개한다.

↑ 부드러운 잿빛으로 물든 감성 의자.

솔솔 바람이 불어오는 시월의 어느 날, 경기도 이천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가구로 소통하는 가구장이를 만났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껴야 하는 감성 가구를 만드는 목수 박홍구.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1 작업을 할 때 착용하는 천연 가죽 앞치마. 2 나무로 만든 접시들.

박홍구 씨가 목수 일을 시작한 건 스무 살이 되던 해다. 목공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가구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감각은 남달라 누구보다 빨리 인정받기 시작했고 이후 30년 동안 나무를 만지고 가구를 만들었다. 수많은 가구를 만들어왔지만 의자를 만드는 일이 특별히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그. 하지만 7년 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의자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기 시작했다. “누가 아픈 청춘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것인가. 그 주체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물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는 감성 의자는 의인화된 듯 말을 하고 듣기도 하는 존재가 된다. 의자를 통해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앉아서 쉬게 만드는 작가만의 표현 방식인 것이다.

↑ 목수 이홍구의 작업 모습.

“주거 공간에서 사람은 주인공이며 다른 사물은 자연스럽게 조연이 되어야 합니다.” 나무의 성질을 존중하며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바라보는 여유로움은 가구의 주체인 사람에 대한 배려로 설명할 수 있다. 자극적인 색감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사람보다 사물이 눈에 먼저 들어오게 되면 공간의 조화가 깨져버린다. 감성 의자는 사람의 존재를 부각시켜주는 정적인 감성으로 채워져 있다. 의자를 만드는 방식은 조금 남다르다. 잘 만든 가구를 밖에 내놓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태풍이 오면 거센 바람을 맞게 한다. 감성 의자가 되기까지의 통과의례인 것이다. 이렇게 4~5년 자연의 시간을 견뎌낸 의자는 여느 가구와 달린 부드러운 잿빛을 띤다. 아내와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가족이자 가구를 함께 만드는 파트너다. 가족을 통해 놓치고 있었던 시점, 색다른 관점을 가족과 상의해 하나씩 채워간다. 결국 감성 의자는 가족이 함께 만드는 가구인 셈.

↑ 강원도 산골에서 공수한 나무들이 집 앞마당에 쌓여있다.

박홍구 목수는 감성 의자 외에도 다양한 가구를 디자인한다. 강원도 산골에서 채취한 나무를 사용하며 7~8년간 말려서 가구로 제작한다. 나무에도 강약이 있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목수의 몫이라며 오늘도 목수는 가족과 소통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구는 사람과 환경이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고 믿는 그는 나무에 난 구멍도 애써 막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돈으로 무언가를 하는 거 같지만 결국엔 시간이 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투자하는 마음은 공예를 향한 우리 모두의 바람이자 소박한 마음이다.

글과 사진 이정민(물나무 스튜디오) | 에디터 박명주

CREDIT
구성의 마법사

구성의 마법사

구성의 마법사

미니멀리즘의 대가라는 수식어 대신 건축가 정도로 불러달라는 피에로 리소니. 시종일관 유쾌한 매너를 보여준 그가 비즈니스 호텔을 만든다면 어떨까?
피에로 리소니의 디자인 철학이 반영된 신라스테이 역삼에서 그와 마주했다.

피에로 리소니 Piero Lissoni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트라, 카시나, 카펠리니, 카르텔, 프리츠 한센, 리빙 디바니, 뽀로 등 글로벌 명품 가구 브랜드와의 활발한 협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간결하고도 따뜻한 디자인 DNA를 곳곳에 홀씨처럼 뿌려왔다. 가구 디자인뿐 아니라 호텔 건축, 인테리어, 상업 공간의 쇼룸 등을 디자인해온 건축가이자 아트 디렉터, 디자이너 등 그를 따르는 타이틀 역시 다양하다. 심플함에 기반을 두는 그의 디자인은 두드러진 디자인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비례와 균형이 만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탁월한 기능성은 그만이 이뤄낼 수 있는 전매특허. 수많은 브랜드가 그와의 작업을 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2002년부터 호텔 건축과 인테리어를 진행해온 그는 암스테르담의 알코브 컨서버토리엄 호텔을 비롯해 뭄바이의 타지 플레이스 호텔, 싱가포르의 스튜디오 엠 호텔, 예루살렘의 말리아 호텔 등 주로 5성급 호텔들을 디자인해왔다. 때문에 이번에 그가 강남 한복판에 선보인 비즈니스 호텔은 협소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스마트 디자인’ 철학이 돋보인다. 한국의 정서와 이탈리아의 감성을 ‘결혼’시킨 공간이라는 그의 설명에 공간의 곳곳이 달리 보였다. 호텔의 등급을 떠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호텔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신라스테이 역삼. 그곳에서 그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구성미를 경험했다.

인사동에 방문했다고 들었다. 어떤 것을 보고 느꼈나?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도자기 가게가 있고, 그 옆에는 한지 가게, 구슬 파는 가게들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명품 매장이 없는 것도 좋았다. 옛 디자인과 요즘의 디자인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공간이 매우 흥미로웠다. 미래에는 구시가지가 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신라스테이는 동탄에 이어 당신이 두 번째 오픈한 비즈니스 호텔이다. 비즈니스 호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시작할 때부터 글로벌 프로젝트로 생각했다. 한국의 특정 지역에 오픈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보면서 아시아, 유럽 진출도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디자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기업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좁은 공간에 기능과 편리를 반영해야 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5성급 호텔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협소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디자인해야 하는 것과 비용적인 측면까지 모두 고려해야 했다. 지난 2년 동안 신라 측과 수없이 미팅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명확했던 점은 스마트한 공간을 만들자는 거였다.

스마트 디자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협소한 공간을 기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탠더드 객실의 경우, 욕실과 침실 사이에 슬라이딩 도어를 달았는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도어 하나만으로도 공간은 손쉽게 분리된다. 욕실도 사용자의 동선을 고려해 기능적인 공간으로 설계됐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어떤 곳인가?
욕실이다. 욕실에서의 동선을 고려해 콤팩트하지만 기능적인 디자인을 염두에 두었다. 또 섹시한 욕실을 만들기 위해 욕실 면에 유리창을 도입했는데 이 점을 실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신라 측을 설득해야 했다. 신라스테이는 비즈니스를 위해 잠깐 머무는 호텔이 아닌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호텔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한국적인 문화를 접목시킨 호텔이라고 했는데, 한국적인 느낌을 어떤 공간에 접목시켰나?
예를 들면 호텔 밖 건물의 벽면은 수공으로 작업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연스럽고 클래식한 느낌이 든다. 이런 부분은 한국 전통의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앤티크 제품과 세라믹 작품 수집이 취미인데, 그동안 한국 도자기를 다수 수집해왔다. 도자기 표면에 감도는 약간 유리 같은 느낌이 한국적인 느낌을 살려주는 것 같다.

비즈니스 호텔이 갖춰야 하는 덕목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젊은 층이 특정 금액을 내고 어느 정도의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호텔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축물, 소재의 사용, 방 크기와 조명 등 어느 정도 수준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을 말한다. 유럽에 가면 저가 호텔들이 많은데 막상 들어가면 감옥 같은 느낌이 든다. 5성급 호텔에 갈 돈이 없다면 수준이 낮은 저가 호텔에 투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비용은 저렴하지만 일정 수준을 갖춘 호텔을 만들고 싶었다.

여느 비즈니스 호텔과 차이를 둔 점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호텔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신라스테이 객실 전체에는 마루를 깔았는데, 좀 더 내 집처럼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다. 공간은 짙은 회색을 주조로 디자인했는데, 회색은 내 디자인의 DNA와도 같다. 비즈니스 호텔은 호텔 안에서도 업무를 보는 특성상 조명의 조도가 밝다. 하지만 신라스테이는 조도를 상대적으로 낮췄다. 그 이유는 투숙객들이 객실에 머물면서 편안하고 따뜻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공간을 완성하는 당신만의 법칙이 있는가?
한 가지 간단한 룰을 적용하는데, 그것은 심플함과 우아함의 결합이다. 심플함이라는 단어는 단순함을 연상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심플함의 이면에는 복잡한 것들이 존재한다. 우아함은 공간 자체가 주는 뉘앙스가 될 수도 있고, 차별화된 장식품이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조화로움, 그것을 우아함이라고 생각한다.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안종환

CREDIT
물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

물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

물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

1980년대 일본 디자인을 정점에 올려놓은 디자이너 쿠라마타 시로는 소재가 지닌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던 인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형태에 서정적인 면을 절묘하게 담아낸 그의 디자인은 아직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1 쿠라마타 시로의 생전 모습. 2 그의 대표작 ‘하우 하이 더 문’으로 라꼴렉뜨 대표의 소장품을 촬영했다.

지난 9월 말,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의자연구회로부터 강연을 요청 받아 일본을 방문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찾아온 김에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 Sou Fujimoto가 설계한 도서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때마침 이곳에서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소장품이 전시 중이었는데 가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무사비 디자인4: 1980~1990’s 에토레 소트사스와 누오보 디자인>전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 Ettore Sottsass의 작품을 중심으로 1980~90년대 활동했던 쿠라마타 시로 Kuramata Shiro, 우메다 마사노리의 작품 등 약 50점의 디자인 가구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였다. 동시대에 같은 언어를 사용한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시대의 디자인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었고, 이 시기 실험적인 디자인이 있었기에 현재 이스태블리시&선즈 같은 회사가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봤다.

↑ © Jun Sanbonmatsu.

에토레 소트사스가 설립한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멤버였던 쿠라마타 시로는 1980년대 일본 디자인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거장으로 에토레와 함께 디자인적 교감을 나누며 새로운 소재와 색, 패턴을 이용한 서정성을 표현하여 디자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동서양의 문화를 혼합한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쿠라마타 시로. 재료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장인들과 함께 정성 들여 작품을 제작한 그의 디자인은 빨리 만들고 많이 파는 것에 혈안이 된 요즘 새태에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쿠라마타는 1991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의 디자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가 운영했던 쿠라마타 디자인사무소는 현재 그의 부인 미에코와 아들인 이치로가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쿠라마타의 업적을 보존하고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 명맥을 이어가도록 힘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니시아자부에 위치한 쿠라마타 디자인사무소를 찾아갔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쿠라마타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그의 사생활이 어땠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미에코는 그런 내게 쿠라마타가 즐겨 찾았던 스시집 ‘우메노키’를 알려주었다. 아카사카에 있는 우메노키는 10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으로 37년 전 쿠라마타가 직접 디자인한 곳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앉았다는 제일 안쪽 자리에 앉아 그가 항상 마셨다는 사와노이 정종을 주문했다. 냉랭할 만큼 순수한 사케 맛이 과장된 조형을 멀리하고 본질을 강조한 디자인을 추구하던 그와 꼭 닮아 있었다. 그의 단골 사케집을 방문해 그의 흔적을 찾아보니 묘한 감흥이 일었다. 다음번에는 쿠라마타 시로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탐방하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벌써부터 리스트가 꽉 찼다.

↑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디자인 작품을 활용해 선보이는 <무사비 디자인 4> 전시. © Jun Sanbonmatsu.

INTERVIEW
쿠라마타 시로의 아들 쿠라마타 이치로에게서 쿠라마타와 그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나?
물론이다. 도면을 그리는 모습도 많이 봤다. 쉬는 날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유원지에 놀러 갔는데 나는 아버지가 “자 가볼까?” 해서 따라가 보면 현장이었다.

쿠라마타 시로가 생전에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은 누구였나?
예술가인 다나카 신타로였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중에 친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거 같다. 같은 업계 사람보다는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는데 이는 언제나 자극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지 않나 추측한다.

‘퍼니처 위드 드로워 Furniture with Drawers’를 보면 한국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약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가?
아버지는 서랍을 좋아했다. 일본의 민가에 있는 계단 중에 서랍과 결합된 것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형태의 약장도 있다. 이는 아시아권 문화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의자에 서랍이 있다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의외로 주목받았다.

이 ‘브로큰 글라스 테이블 Broken Glass Table’은 스튜디오 바로 옆에 있는 미호야 글라스에서 만든다고 들었다. 유리에 충격을 가해 만드는 건가?
그렇다. 강화유리를 해머로 쳐서 만든다. 이 기술은 일본에서도 미호야 글라스 사장님밖에 못하는 기술이다. 처음 생산할 당시 강화유리보다 정밀도가 좋아져서 더욱 균일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예전 것이 다양한 크기가 생겨서 느낌은 더 좋았다.

‘플라워 베이스 flower vase’는 한국의 10꼬르소꼬모에서도 팔고 있다.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다.
아크릴을 만드는 일본 공장이 문을 닫게 되어 다시 새로운 공장을 찾아서 시도를 해보고 있다. 몇 십 번의 시제품을 만들어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 색은 기성품으로 나오는 색이 아니라서 조합을 잘해야 한다.

1 아크릴을 접어서 만든 조명 ‘Oba-Q’. 2 투명 아크릴로 만든 ‘플라워 베이스’.

비트라에서 ‘하우 하이 더 문 How high the moon’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공장이 없어지면서 더 이상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큰 도금 탱크에 넣어 도금을 해야 하는데 현재 일본의 도금 공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찾기가 어렵다. 쿠라마타가 처음 계획한 것은 크롬 도금이었는데 가능한 곳이 없어서 니켈 새틴 도금으로 타협한 것이었다. 원래대로 크롬 도금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생산이 중지된 제품들이 너무 안타깝다. 꼭 재생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일본은 거의 모든 공장이 동남아나 타이완, 말레이시아 같은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자신의 손 기술로 만드는 공예는 그 불씨가 미약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겠지만 공업은 공장이 없어지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경우도 지금 자국에서 활발하게 생산하는 것이 50년 뒤에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애를 쓴다고 해서 전체 구조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가능한 것이 있다면 쿠라마타 시로의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에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고 알려줄 수 있을 거 같다. 또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Oba-Q’ 램프도 생산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이 조명은 두께 2mm의 유백색 아크릴을 사용하는데 재료비가 아주 비싸다. 제작은 야마기와에서 담당하는데 거의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5~7명이 달라붙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도 이 조명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 ‘Oba-Q’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72년에 개인전을 했을 때다. 그로부터 10년 뒤 야마기와에서 상품화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형태가 좀 더 자유로웠는데 지금은 최대한 균일하게 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부 동일한 형태는 없다. 7명이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만들면 최대 160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생산성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지금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테이블은 OSB 합판으로 만들었다. 이 재료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 테이블은 원래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쓰던 카운터였다. 그곳을 정리할 때 그냥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테이블로 활용하고 있다. OSB 합판은 주로 주택의 틀을 만드는 구조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를 가구로 제작해 표면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소재의 사용 방법에 일관성이 있었다. ‘하우 하이 더 문’에 사용한 익스펜디드 메탈도 원래 고속도로의 펜스에 사용되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그것을 인테리어나 가구에 응용한 적이 없었다. 사무실 앞에 있는 쇼윈도의 유리창은 프레임이 없는데 지금은 아주 흔한 디테일이지만 그것도 아버지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모든 작품에서 그런 점을 찾을 수 있는데 말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요즘같이 쉽고 빠르게 만드는 시대에 이런 디자이너가 존재했다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니 감사하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되면 전시를 통해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리고 싶다.

에디터 최고은│취재 김명한(aA디자인뮤지엄) │포토그래퍼 안종환(제품) | 현지 통역 김치선

CR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