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작품이 공간 곳곳에 주인처럼 자리한 20년 된 아파트 이야기. 132㎡ 넓이의 작은 갤러리로 초대한다.
↑ 아늑한 갤러리와 같은 거실에는 양혜규 작가의 설치 조명과 이기봉 작가가 먹으로 나무를 그린 그림, 이영학 작가의 물확 작품으로 공간을 꾸몄다.
창문 밖으로 생생한 초록이 그림처럼 걸려 있는 집을 찾았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작은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이 공간 곳곳에 오랜 주인처럼 놓여 있다. 이곳은 삼청동에 위치한 에이비엔비 A.bnb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김정환 대표의 집. 15년 전 이사하면서 레노베이션 공사를 진행한 이후,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함께 나이 들어온 흔적이 정겹다. 사람도, 집도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과 아들은 두 달에 한 번씩 집에 오고, 딸아이는 영국에서 유학 중이에요. 가족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셈이죠. 이 집을 지키는 사람은 오롯이 저밖에 없어서 아이들이나 남편에게는 이 집이 변하지 않는 고향 같은 곳이에요.” 세상 모든 것이 변화를 향한 속도전에 열을 올리지만 궁극의 편안함을 느껴야 하는 공간, 집만은 항상 같은 표정으로 두 팔 벌려 가족들을 맞이한다.
↑ 작은 소파 사이에는 니키 드 상 팔의 조각 작품과 히로시 고바야시의 작품을 걸어 동화적인 느낌을 연출했다.
그러나 혼자 지내온 시간이 많은 탓에 집은 가족 구성원의 색깔보다는 그녀가 좋아하는 미술 작품들로 채워졌다. 132㎡의 아파트 곳곳에는 쿠사마 야요이, 줄리언 오피, 히로시 고바야시, 아야코 코카쿠, 양혜규, 민병헌 작가의 작품들이 존재감을 밝히고 있다. 상업 공간이나 갤러리가 아니고서야 좀처럼 가정집에 들이기로 결정하기 쉽지 않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미술 전공자도 아닌 그녀가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딸 세희 씨 덕분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전공한 딸과 함께 미술에 대한 많은 생각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고, 현대미술이 주는 신선함에 매력을 느꼈고 그때부터 마음이 가는 작품을 하나 둘씩 구입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컬렉터라기 보다는 그냥 미술 작품을 좋아하는 애호가 수준인걸요.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씩 집 안에 들여놓다 보니 작은 집이라 금세 갤러리처럼 바뀌었어요.” 프랑스와 영국 등지를 여행할 때도 미술 작품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2008년 우연히 파리 오페라 갤러리를 지나다가 바스키아의 그림을 입은 마리네티 줄리언의 강아지 작품을 구입했는데, 몇 년 뒤 국내 오페라 갤러리에서도 고가의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고. 아주 오래전에 구입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역시 요즘 시세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김정환 대표. “처음엔 미술 작품의 재태크적인 측면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현대미술 작품이 주는 신선한 자극이 좋아서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만 구입하게 되었어요.”
1 에스닉한 느낌으로 꾸민 세희 씨 방. 2 영국에서 미술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인 세희 씨의 작품이 걸려 있는 복도. 3 콜앤선의 벽지로 포인트를 준 주방. 테이블에는 찰스&레이 임스의 빈티지 에펠 체어를 배치했다.
그림에서부터 조명, 설치 작품까지 그녀의 관심 영역은 폭넓다. 여느 아파트와 달라 보이는 이유는 요즘 보기 드문 좁고 기다란 창문 덕분이기도 하지만 틀을 깨는 작품 선택도 한몫한다. 부실별로 꼭 필요한 가구만 두었는데 거실에는 오래전 롤프 벤츠에서 구입한 소파 뒤로 김창렬 작가의 드롭 시리즈와 히로시 고바야시의 작품이 전부다. 고재로 만든 부엌 테이블 주변에는 찰스&레이 임스의 빈티지 에펠 체어를 배치했고, 벽에는 박승훈의 사진 작품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에스닉한 분위기의 딸 방에서는 줄리언 오피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 김정환 대표와 딸 세희 씨, 애완견 딸구의 모습.
때론 친구 같고 때론 삶의 자극제 같은 미술 작품들. 김정환 대표에게 오래된 친구처럼 정겨운 집과 개인의 취향에 충실한 작품들은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처럼 소중한 일상의 동반자다. 카브에서 시간을 인내하며 제맛을 찾아가는 와인처럼 공간과 공간의 주인은 서로를 조응하며 그렇게 익어가고 익숙해지고 있었다.
↑ 오래전 인도네시아에서 구입한 빈티지 원목 테이블 위의 벽에 박승훈 작가의 작품을 걸었다.
에디터 박명주ㅣ 포토그래퍼 임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