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세계화를 외치는 탁상공론은 끝. 지금 뉴욕에서는 숙력된 셰프와 체계 잡힌 주방에서 까다로운 뉴요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무던한 노력이 펼쳐진다. 명실공히 뉴욕의 중심에서 한껏 기량을 펼치고 있는 한식 이야기를 소개한다.
↑ 한식 레스토랑 단지가 있는 뉴욕 52번가의 전경.
쇼윈도의 불빛이 점점 도드라지기 시작하는 저녁시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바로 옆, 맨해튼 32번가의 한식당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선다. 큰집, 감미옥, 강서회관 등 이름부터 친근한 이 한식당은 뉴요커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된 지 오래다. “매운 음식에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 끊을 수 없어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먹었던 음식 맛을 잊을 수 없어 종종 찾아오죠.” 코케이션, 히스패닉, 말레이 등 다양한 인종의 뉴요커들이 펼치는 한식 예찬이다. 1959년 11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뉴욕에 한국 요리점 데뷔. 전통적인 우리 한식을 소개’라는 기사가 실린 지 55년째. 이제 불고기를 가리키는 ‘코리언 바비큐’는 뉴욕 사람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가 되었다. 옛날에 비하면 한참 나아진 처지가 된 것이다.
1 맛집의 척도인 <자갓 서베이>의 발행인 니나 자갓. 2 코리언 웨이, 즉 한국 타운이 있는 뉴욕 32번가.
하지만 한식이 진정으로 뉴요커들의 외식 메뉴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가 힘들다. 중심가의 한식당이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손님의 3분의 2는 한국 사람이다. 일본 사람들을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스시 레스토랑과는 차이가 있다. ‘코리언 웨이’라고 불리는 32번가를 벗어나면, 이런 차이는 더 확연해진다. 한식당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이다. <자갓 서베이>는 뉴요커들이 외식할 식당을 찾을 때 가장 많이 참고하는 가이드북이다. 2013년판을 기준으로 이 책에 올라와 있는 일식당의 수는 90개 이상. 그에 비해 한식당의 수는 19개에 불과하다. 게다가 최고 평가를 받은 상위 50개 식당 안에 일식은 5개가 포함된 반면, 한식 레스토랑은 한 곳도 없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자갓 서베이>의 발행인 니나 자갓은 이렇게 조언한다. “일식에 대한 평가가 한식보다 낫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 음식을 먹어본 뉴요커가 많다는 뜻이겠죠.”
1 멕시코식 타코에 김치와 불고기를 더한 김치 타코 트럭. 2 김치 타코 트럭의 운영자, 필립 리.
찾아가는 푸드 트럭 속 한식
한식에 대한 관심이 일본 음식보다 덜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접근성이다. 뉴욕은 세상에서 제일 바쁜 도시 중 하나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델리로 몰려들어 음식을 집어 들고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유독 32번가에만 몰려 있는 한국 식당은 뉴요커들의 선택을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풍경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사무실들이 밀집한 미드타운의 한 거리. 주차된 트럭에선 연신 지지고 볶는 냄새가 풍겨나온다. 트럭 옆면에 영어와 한글로 쓰여 있는 것은 ‘김치 타코’라는 문구다. “많이 알려진 김치와 불고기를 미국 사람들에게 친숙한 멕시코식 타코에 결합했어요.” 이민 1.5세대이자 김치 타코 트럭의 운영자인 필립 리의 설명이다. 김치 타코 트럭은 2011년 3월, 첫 운행을 시작했다. SNS를 통해서 매일 트럭이 정차할 곳을 알렸고, 머지않아 가는 곳마다 긴 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김치 타코 외에도 비빔밥을 뭉쳐 이탈리아식으로 튀긴 아란치니와 두부를 중동식으로 튀긴 두부 팔라펠 등이 쉴 새 없이 팔렸다. 준비한 음식이 모두 동나기까진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푸드 트럭은 뉴욕의 새로운 트렌드 중 하나죠. 저는 이것이 한식을 알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니나 자갓의 이야기다. 김치 타코 트럭이 ‘찾아가는’ 한식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아예 다른 퀴진의 DNA를 한식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1,3 고추장 양념의 돼지불고기를 넣은 슬라이더와 갈비찜. 2 미슐랭 가이드에 선정된 최초의 한식 레스토랑인 단지의 오너 셰프 후니 킴.
전문화된 주방이 만들어내는 퀴진, 한식
뉴욕 맨해튼 52번가. 해는 아직 중천인데, 레스토랑은 벌써 저녁 손님을 맞이할 준비로 부산스럽다. “미니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실내장식. 와인의 취흥을 돋워주는 라운지 뮤직. 쉴 새 없이 손님들 사이를 오가는 매니저와 스태프들. 여기까지는 뉴욕에 존재하는 무수한 소규모 레스토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손님들이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입으로 가져가는 요리는 고추장 양념의 돼지불고기가 패티로 들어간 슬라이더(고기 등을 끼운 작은 샌드위치)와 매운 떡볶이 그리고 육회다. 이 레스토랑의 이름은 단지 Danji. 미국으로 이주한 뒤 의대를 졸업했지만 요리에 더 매력을 느꼈다고 하는 후니 킴이 바로 이곳을 이끄는 오너 셰프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죠. 그래서 전통적인 한국 음식이라고 해도, 제 미국 친구들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을 만한 방법을 고민해요.”
1,2 현재 뉴욕의 가장 유명한 한식 레스토랑, 단지
단지의 주방은 동양식이라기보다는 프랑스식에 더 가깝다. 각각의 조리를 담당하는 요리사들이 있고, 후니 킴 셰프에 의해 조합되고 플레이팅되어 식탁으로 나간다. 주방이 하나의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지휘하는 것도 셰프의 역할이다. “대니는 불고기를 더 준비해주고, 신디는 바로 빈대떡 들어가줘! 잠깐, 신디, 한 접시에 이렇게 많이 담으면 어떻게 해!” 셰프의 정신 없는 외침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요리사들. 어찌 보면 작전 중인 군대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이런 모습은 프랑스식 주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레지던트 과정에 들어가기 전, 잠시 의사의 길을 쉬고 그가 배웠던 것이 바로 프랑스 요리다. “셰프는 불어에서 군대의 지휘관이라는 뜻으로도 쓰여요. 주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하는 단 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레스토랑들은 모두 셰프가 직접 운영하는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에요. 식당의 기본은 음식인데, 셰프가 직접 운영하는 곳에서는 자기 이름에 먹칠할 음식을 내놓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후니 킴의 단지를 나설 때 느꼈던 포만감은, 단순히 김치 파에야나 불고기 슬라이더를 넉넉히 먹었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문득 그가 낸 술집 ‘한잔’에서 막걸리나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후니 킴의 단지에 이은 두 번째 레스토랑, 한잔 Hanjan.
↑ 1주막을 컨셉트로 한식과 막거리를 선보이는 한잔의 내부. 2 12시간 끓인 육수로 만든 한잔의 한국식 매운 라면. 3 연어회에 초장을 버무린 한국식 겉절이를 곁들인 한잔의 메뉴.
글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