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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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의 힘

주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빌트인 시스템 ‘퍼니처 코리도’를 적용하면 작은 집에서도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다.

1인 가구의 수가 급증하는 요즘, 출산을 꺼리는 딩크족 2인 가구의 증가 또한 가파르다. 경제 발전의 주역이었던 베이비부머 세대가 아이를 뒷바라지하고 집을 소유하는 데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면 그 자식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자신 또는 배우자와 함께 삶을 즐기고 인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세대별로 라이프스타일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이를 반영해 집을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에게 큰 숙제가 되었다. 2013년에 설계해 완공된 ‘9×9 실험 주택’이 가로, 세로가 각각 9m와 높이 6m의 주택이었다면 ‘6×6 주택’은 가로, 세로가 각각 6m와 높이 9m로 설계되었다. 이 바닥 면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12평이며, 2개 층 반으로 구성된 집으로 아이가 없는 부부와 반려견 두 마리가 함께 살기에 작은 공간이었다. 초기에는 서울 도심의 30평 대지에 계획되었으나 건축법상 문제와 경제적인 이유로 외곽으로 밀려나갔다. 작은 집에 대한 동경을 갖고 시작하더라도 서울 도심에서 땅을 매입해 집을 지으려고 하다 보면 그 마음을 실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부부는 몇 년간 아이 없이 반려견과 살아오면서 의도적으로 작은 공간을 찾았고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이 부부에게 제안한 것은 ‘퍼니처 코리도 Furniture corridor’였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주택에서 사용되는 모든 기능의 가구, 위생, 환기, 전시, 설비 등을 한곳에 모아 사용하게 만드는 것. 주택 가장자리에 작은 복도를 만들어 그 공간 안에 필요한 가구와 시설을 짜 넣어 필요시에만 문을 열고 사용하는데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나머지 공간을 훨씬 자유롭고 가변적으로 쓸 수 있다. 작은 공간에서 폭 45cm, 길이 150cm의 테이블 하나로 책상, 식탁, 아내의 파우더 테이블까지 겸했던 부부에게 퍼니처 코리도 시스템은 낯설지 않았다. 두 번째로 제안한 것은 수직 정원과 텃밭이었다. 이 부부는 시간이 날 때면 아파트 테라스에서 상추를 키우거나 다양한 크기의 플랜트 박스를 만들어 화초를 키우곤 했는데, 발코니에 키우는 화초들은 대부분 거실에서만 볼 수 있고 관리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이러한 제한적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방과 방을 이동하는 동선 사이에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토심을 확보했고, 두 부부가 먹을 양만큼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이 작은 텃밭을 테라스에 곳곳에 배치하니 마치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는 온실 같았다.

내가 건넨 마지막 제안은 반려견과 어떻게 한 장소에 살 것인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이기에 설계 초기부터 사람과 개의 스케일을 동시에 고려했다. 집의 높이는 전체가 9m이지만 한 개 층이 3m로 구성된 3개 층이 아니라 중앙에 놓은 계단을 중심으로 한쪽은 개들이 통행 가능한 높이인 1.5m로, 나머지는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2.3m 높이로 계획해 주택 전체 높이가 결정된 셈이다. 주택 가운데에 설정된 퍼니처 코리도에는 이 집에서 사용될 다양한 가구와 위생기, 환기구, 설비 및 전기 배관 그리고 계단이 빌트인되어 있으며 심지어 반려견 두 마리의 집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여유로워진 나머지 공간은 부부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6×6 주택이 재미있는 점은 내부와 외부의 경험이 교차된다는 것이다.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다 보면 흙을 담은 화분과 같은 야외의 테라스가 내부인 방으로 연결되고 중심에 있는 천장은 하늘로 열려 있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내리는 비와 눈을 볼 수 있다. 앞으로 부부는 기존 집과는 다른 의외성을 이 집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집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생각을 최고은 기자(deneb@mckorea.com) 앞으로 보내주세요. 보내주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최소의 집’에 대한 개념을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정영한(스튜디오 아키홀릭) | 에디터 최고은 | 사진 스튜디오 아키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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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Hand Good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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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Hand Good Mind

나무와 사는 남자, 포토그래퍼 조남룡이 카페 ghgm을 오픈했다. 공간을 만든 사람의 취향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그곳을 방문했다.

↑ 커다란 원목 판재를 손으로 가공해 만든 1층의 테이블은 카페 ghgm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나는 잡지 기자로 일한 지 햇수로 18년쯤 된다. 연차가 어릴 때는 잘 몰랐다. 영화관이든 미술관이든 장소를 취재할 때는 눈에 보이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그러모으기 바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후배에게 일을 시키는 위치가 됐다. 그제서야 공간의 진실을 느끼고 알리는 눈이 조금 트였다. 공간은 그 공간을 만든 사람을 닮는다. 그를 알아야 그의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리게 된다. 당연한 소리인데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서 공간을 취재하러 나가는 후배들한테는 “사장이든 매니저든 건축가든 그 공간을 가꾸고 만든 사람을 만나고 오라”고 당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진가 조남룡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그가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지어 얼마 전 문을 연 ‘카페 ghgm’을 소개하려 한다. 내 논리대로라면 그의 공간보다도 그를 소개하는 일이 되겠지만.

1 2층 ghgm 작업실에 앉아 있는 사진가 조남룡. 2 카페 ghgm 활용법. 핸드메이드 가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조남룡의 사진 바라보기.

조남룡은 남자가 봐도 멋진 남자다. 선 굵은 외모와 훤칠한 체격, 힘이 있는 목소리와 가볍지 않은 몸가짐은 상대에게 믿음과 호감을 준다. 잡지사 사진기자로 시작해 청담동에서 패션, 광고 사진과 유명인 포트레이트를 찍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묘한 부분이 있었다. 누구보다 도시적인 감성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인데 그에게선 조금씩 바람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낡고 큰 SUV에 카메라를 싣고 몽골의 초원으로 달려나갈 것만 같은 자유로운 감성. 그래서 그가 용인에 ‘더 우드 스튜디오’라는 목공 공방을 열었다는 풍문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생길 일은 어떻게든 생기니까. 결과적으로 더 우드 스튜디오는 카페 ghgm의 모태가 되었다.
11년 전 조남룡은 용인에 목조 주택을 지어 이사 오면서 목공의 세계에 눈을 떴다. 목공 학교를 다니며 집 안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실을 운영하던 동료들과 뭉쳐 회원들에게 원목 가구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장소를 제공하는 더 우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몇 년 후 얄궂은 세상사 때문에 더 우드 스튜디오는 흩어지게 됐다. 조남룡은 이참에 가구 브랜드를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ghgm. ‘Good Hand Good Mind’의 줄임말이다. 광고 기획자로 이름을 날리던 친구가 붙여준 이름이다. 조남룡은 더 우드 스튜디오 바로 옆에서 자신이 수입한 빈티지 가구를 전시하던 곳을 ghgm의 사무실과 갤러리를 겸하는 복층 공간으로 개조해 썼다. 그 공간에 카페 기능을 넣은 것이 올해 2월에 오픈한 카페 ghgm이다. 그러니 이 카페의 유전인자에는 ‘조남룡’, ‘나무’, ‘가구’, ‘빈티지’가 단단히 새겨져 있는 셈이다.

↑ 조그만 화분들은 이 남성적인 공간을 쓰다듬어주는 ‘깨알’ 디테일이다.

↑ 자연광이 풍족하게 내리쬐는 2층은 ghgm의 작업실 겸 갤러리다. 천천히 둘러보며 ghgm의 가구를 구입하거나 제작을 의뢰할 수 있다.

나는 ‘조남룡 실장이 더 우드 스튜디오를 계승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는 소식만 듣고 그곳을 찾았다. 몇 년 전 더 우드 스튜디오를 방문한 적이 있어 길은 쉽게 찾았다. 그런데 그 길이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대로에서 들어서자마자 한적한 느낌이 드는 좁은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갔는데 이제 그 좁은 길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유명 축구 선수가 운영하는 축구 교실도 이웃했다. 내비게이터가 알려준 곳에 차를 대고 내리니 깨끗한 창고형 건물에 ‘카페 ghgm’이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카페!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조남룡이 카페를 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낯설었고, 조금이라도 자연에 가까운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 이사 온 사람들 곁에 카페라는 휴식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반가웠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 트인 복층 구조의 실내는 커피 향과 음악, 나무와 가구로 가득했다. ‘조남룡’과 ‘카페’는 잘 연결되지 않는 단어 같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카페니까. 긴 원목 판재를 통째로 상판으로 쓴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한 커피가 놓이기도 전에 테이블에서 일어나 1층과 2층을 둘러보았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교외의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은 전부 ghgm이 제작한 것이거나 오리지널 빈티지 제품이었다. 아르네 야콥센도 보이고 톨릭스 체어도 있었다. 랑프 그라는 언제 봐도 기능적인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우체국이나 공장에서 쓰던 인더스트리얼 빈티지 가구 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꽃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테이블 사이에는 조남룡이 찍은 인물, 풍경 사진들이 걸려 있다. 1층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콘크리트 벽에 세워진 커다란 판재들이다. 월넛, 웬지,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아프로모시아, 유럽산 오크. 수령이 100년 넘는 나무를 잘라 가공한 것이라 어떤 건 웬만한 사람 키의 두 배도 넘게 크다.

1 제작한 가구들의 사진과 도면을 붙여놓은 2층 ghgm 작업실 벽. 2 ghgm의 나무 도마는 카페 손님들이 즐겨 사가는 아이템이다.

1 가구뿐만 아니라 작은 문구류도 제작하는 ghgm이 습작으로 만든 나무 잔들. 2 세월을 함께 견딘 빈티지 철제 조명과 원목 테이블.

↑ 시원하게 트인 아래층을 내려보는 건 로프트 구조가 주는 즐거움이다.

카페로 쓰이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ㄷ자 모양으로 구성된 ghgm의 사무실 겸 갤러리를 만나게 된다. 카페 손님들은 자유롭게 2층을 구경하면서 ghgm의 가구를 구입하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가구를 주문하기도 한다. 작은 나무 자 같은 문구에서부터 책상과 의자, 침대와 콘솔, 테이블, 오리지널 빈티지 체어, 캘리그래퍼가 만든 목공예품에 이르기까지 ghgm의 감각과 손맛이 배어 있는 가구들로 가득하다. 2층에 놓인 스피커도 나무 캐비닛 느낌이 좋은 영국제 ‘하베스 Harbeth’다. 이 공간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것은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나무와 가구와 음악과 커피 향이 가득한 곳에서 사람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마냥 아기자기하니 예쁘기만 한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흡족한 기분이 가득 차오른다. 공간을 만든 사람의 취향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곳, 없는 걸 만들어내거나 애써 꾸미지 않은 곳, 그래서 계속 찾아도 질리지 않는 곳. 그런데 이런 곳을 만나기가 은근히 어렵다.
뒤늦게 1층 원목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에스프레소 투샷이 풍기는 진한 맛과 향. 어떤 장소를 취재하고 나면 개인적인 결정이 선다. 다시 올 것이냐 오지 않을 것이냐. 카페 ghgm은 아내와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빈티지 가구와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가 무척 좋아할 것이다. 그때면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와 은행나무에 잎이 푸르겠지.

송원석 (자유기고가) |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박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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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부모와 2세가 함께 시너지를 내고 있는 세 가족을 만났다. 부모의 가업을 잇는 다음 주자들은 부모의 든든한 파트너로 각자의 능력과 세대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모를 위해 꾸민 공간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 이신희 실장이 아버지인 이철 대표를 위해 꾸민 공간. 와인과 책, 꽃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을 남성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풀어냈다.

↑ 이철 대표와 이신희 실장.

감성적인 남성을 위한 공간
라이프스타일 멀티숍 보에의 이철 대표와 그의 아들 이신희 실장은 숍을 오픈하면서부터 관계가 돈독해졌다. 영국에서 패션을 전공한 이신희 실장이 우연히 아버지와 동행한 글라스 이탈리아의 공장 방문 후 아버지가 구상하고 있는 가구 사업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평소 대화가 없던 부자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는 제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간 몰랐던 서로의 취향에 대해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신희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어요. 사실 아이들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먼저 생각하는 부끄러운 가장이었습니다. 엄마보다 한발 물러나 아들이 걷고 있는 길을 서포트하는 정도였으니까요.” 이신희 실장이 보에에 합류하면서 이철 대표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그동안 아들에게 점수 딸 기회가 없었는데 사업을 계기로 관계가 좋아져서 개인적으로 너무 행복합니다. 사실 가족 사업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아들이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따라주는 것도 기특하고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데도 제가 잘 모르는 다양한 운영 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부자에게 보에는 단순한 리빙숍 이상의 역할을 해낸 셈이다. 섬처럼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이어준 가교랄까. “아버지는 평소 와인을 좋아하고 꽃꽂이도 종종 즐기세요.” 이신희 실장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에릭 요르겐센의 OX 체어 주변으로 이동식 와인 셀러와 플라니카의 이동식 에탄올 난로를 배치했다.
“화병에는 벚나무 가지를 담아 실내지만 마치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성향을 반반씩 섞어 연출한 공간은 남성적인 과감함이 풍기지만 섬세한 낭만이 깃들어 있다. 이철 대표는 얼마 전 오사카 출장길에서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7층 규모의 숍을 둘러봤다. “엄마는 기모노, 딸은 웨딩드레스를 판매하는 숍이었는데 쇼윈도 한 켠에 모녀가 정부에서 받은 훈장을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가족 사업을 도모한 적은 없지만 가구와 디자인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 아들과 함께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을 계획 중이다. 그 구상 중 하나는 지금의 숍 앞에 또 하나의 건물을 지어 부자가 꿈꾸는 근사한 라이프스타일숍을 만드는 것이다. 서먹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은 물론 새로운 사업 방향을 제시해준 디자인이라는 접점. 이들 부자는 지금 꿈꾸던 미래를 향해 가족이라는 이름의 돛을 달고 넓은 바다를 순항 중이다.

↑ 중간색을 공간에 녹여내는 재주가 있는 미노티의 허지원 실장이 엄마인 김민정 대표를 위해 꾸민 공간.

↑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한 두 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심플함 속의 위트
미노티와 보치, e15를 수입 판매하는 디옴니는 10여 년 전 톰 딕슨, 카펠리니, 마테오그라시, 파비오 노벰브레, 로돌프 도르도니 등 20여 개의 명품 가구와 건축가들의 디자인 가구를 판매하는 편집숍이었다. 당시 유행을 선도한 가구들은 모두 김민정 대표의 손에 이끌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테리어 관계자들이 엄지손가락을 들어줄 만큼 감각이 남다른 전업주부였던 그녀가 가구 사업을 하게 된 것도 순전히 디자인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든다”는 김민정 대표의 지론은 현재까지 탄탄한 디옴니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엄마가 일궈낸 땀과 노력 그리고 그녀의 까다로운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디옴니를 함께 이끌고 있는 딸 허지원 실장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생활 속에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해온 엄마가 꾸민 공간에서 생활해왔다. “어머니는 완벽주의자셨어요. 생활의 모든 것을 디자인을 고려했는데 차를 마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릇의 모양과 위치에 대해 신경 쓰셨죠. 집에 있는 가구들도 제자리가 없을 만큼 거의 매일 바꿔 새로운 공간을 만드셨어요.”
어려서부터 엄마의 디자인 감각을 보고 자란 허지원 실장은 밀라노에서 실내 건축 디자인을 전공한 뒤 미국과 이탈리아에 있는 회사에서 견문을 쌓고 4년 전부터 디옴니에서 홍보와 디스플레이를 담당하고 있다. 허지원 실장이 엄마를 위해 꾸민 공간은 김민정 대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넣었다. “엄마는 옷은 검은색을 좋아하셔도 공간은 분홍과 빨강 등의 포인트 색상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좋아하세요. 2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e15의 빅 풋 테이블 주변에는 핫 핑크 의자와 위트 넘치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로 포인트를 주어 간결함 속에 신선한 자극을 즐기는 엄마를 닮은 공간을 만들어보았습니다.”
김민정 대표와 허지원 실장은 닮은 모습이지만 추구하는 성향은 다르다. 사진 속 의상이 말해주듯 김민정 대표는 똑떨어지는 미니멀 스타일을 즐긴다면 허지원 실장은 약간의 여성미가 가미된 심플함을 선호한다. “지원이가 연출하는 스타일은 마치 외국 사람들이 디스플레이한 것처럼 공간에 여유가 있습니다. 색상을 조화시키는 방법도 남달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저도 힘들어하는 중간색 계열을 공간에 잘 녹여냅니다. 제가 취미로 시작한 일이 점차 지원이 세대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사업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모녀의 다른 성향이 만나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고 있는 디옴니. 사업과 관련해 앞으로 전개될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진 것은 없지만 디옴니가 단순히 가구점이 아닌 디자인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며 모녀가 입을 모은다.

↑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자신의 디자인 정체성을 굳혀온 마젠타 스튜디오의 권순복 대표. 딸 장현지 씨는 이 공간에 그런 엄마의 취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감각을 적절히 곁들였다.

↑ 이제 한길을 나란히 가고 있는 권순복 대표와 장현지 씨.

달콤한 쇼윈도
지난 20년 동안 공간 디자이너이자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해온 마젠타 스튜디오의 권순복 대표와 딸 장현지 씨가 사는 분당의 어느 타운하우스를 찾았다. 얼마 전 1층의 휴식 공간에 쇼윈도 코너를 마련해 모녀가 컬렉션해온 그릇들을 전시했던 차였다. 쇼윈도는 엄마의 구상이었지만 이를 디자인하고 그곳을 채우는 일은 딸 현지 씨의 몫이었다. “엄마는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사랑스러운 스타일을 선호하세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로맨틱한 스타일인데 모두가 같은 모던한 스타일에만 집중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던 저는 어느 순간 엄마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바라보는 시각을 바꿨더니 저도 그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됐어요.”
쇼윈도 안에는 권순복 대표가 그간 수집해온 앤티크 티포트와 찻잔, 포크, 디퓨저, 실버&골드 오브제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포르나세티, 런빠뉴, 셀레티의 그릇들은 현지 씨의 컬렉션. “현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클래식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디자인을 좋아해요. 딸과 제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디자인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티피컬리 오스매니안’ 도어 스티커로 클래식하지만 미래적으로 디자인한 제품이에요.” 권순복 대표는 뷰티 브랜드 롤리타 렘피카의 컨셉트 룸을 비롯해 마몽드, 에뛰드 하우스의 매장 디자인의 매뉴얼을 만든 이로 톡톡 튀는 젊은 감성을 사랑스럽게 풀어낼 줄 아는 공간 디자이너로 정평이 나 있다. “대학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한 현지가 작년 말부터 제 일을 거들고 있어요. 현지의 담당은 디자인의 밑거름인 캐드 작업이에요.” 현지 씨는 엄마와 함께 24시간을 동행한다.
“엄마 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좋은 디자인을 경험해볼 수 있고, 쉽게 만날 수 없는 디자인 관계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좋은 점도 있는 반면,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 단점이에요. 하루 종일 일 얘기만 하니까요.” 현지 씨의 불만이 권 대표에게는 오히려 장점이라고 한다. “밤새도록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퇴근 시간만 되면 직원들 눈치를 봤는데, 딸을 옆에 끼고 일을 하니 시시때때로 지시할 수 있어 너무 편해요. (웃음) 가족이라고 해서 대충 넘어가는 일은 없어요. 직원들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고스란히 딸에게 지시하고 있어요.” 이렇게 매일 알콩달콩 일하는 모녀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입장을 눈치챌 만큼 든든한 파트너가 됐다. 자기만의 단단한 개성과 취향이 녹아든 디자인 정체성을 구축한 권 대표와 엄마이자 대표의 방향을 믿고 따르는 현지 씨. 조만간 오픈할 마젠타 스튜디오의 이태원 매장에서 모녀가 만든 달콤한 스타일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기대된다.

에디터 박명주 | 포토그래퍼 신국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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