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작업실을 이전하거나 생애 처음 단독 작업실을 오픈한 작가 여섯 명을 만났다. 하는 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작업실이 그들의 삶이자 일터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 원래 도시락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작업실 공간.
↑ 1 선반으로 작업 공간을 자연스럽게 나눴다. 2 영감을 얻기 위해 벽에 붙인 이미지들.
↑ 해외 전시를 앞두고 작업에 몰두 중인 이윤희 작가.
도예가 이윤희의 상상 공간
도예가 이윤희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몽환적이고 신비로웠다. 자연스럽게 작가의 나이를 가늠하게 됐는데 작업실에서 만난 이윤희 작가는 예상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이윤희 작가는 최근 자신의 집이 있는 대전에 작업실을 얻었다. “원래 이 공간은 서대전역에 납품을 하는 도시락을 만들던 공장이었어요. 그래서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고 냉장고 자리와 물을 사용했던 공간 등도 그대로 남아 있었죠.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락 공장이 나가고 난 뒤 제가 들어오게 됐어요.” 레지던시 생활을 하면서 갖고 있던 가구 등을 그대로 가져왔고 가마는 주문 제작을 의뢰하고 기다리는 상태다. 공장이었던 곳이라 그런지 벽도 바닥도 온통 하얀색이었고 창문도 많아서 햇빛이 화사하게 들어왔다. “아직 가마를 비롯한 장비가 다 들어오진 않았지만 작업을 하는 공방과 디자인 작업을 하는 책상 쪽을 나눴어요. 이제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이 작업실에서 이뤄지겠지요.” 곱게 말린 꽃, 무심한 듯 씌운 소파 커버, 도예 공방이 주는 특유의 담백함과 여성 도예가의 손길이 묻어나는 작업실이었다. 소녀와 꽃, 식물 등을 작품에 즐겨 사용하지만 아주 여성스럽다거나 귀엽지만은 않은 작가의 작업 성향과도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작업을 하려면 물레도 돌려야 하고 가마도 사용해야 하고 또 전시 준비를 위해 큰 박스를 두거나 흙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해요. 그런 점에서 이 공장 형태의 공간은 최적이었죠. 무엇보다 집이 가까워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도 줄었고요.” 이윤희 작가는 9월에 있을 메종&오브제와 공예 비엔날레에 출품을 앞두고 있다. 어떤 디자인일지는 모르지만 밝고 하얀 작업실에서 단단하게 구워져나올 작품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 회색 벽과 기계가 어우러진 남성적인 분위기의 작업실.
↑ 1 직접 만들고 사용해보는 직품들. 2 좁고 세로로 긴 작업실 입구.
↑ 수줍음이 많지만 작품 철학만큼은 확고한 김현성 작가.
금속공예가 김현성의 회색 작업실
금속공예가 김현성의 작업실을 찾았다. 금속공예라고 하면 장신구나 보석처럼 섬세하고 화사한 작품을 생각하지만 김현성 작가의 공간과 작품은 무심한 듯 손맛이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픈한 지 이제 반년도 되지 않은 파주의 작업실은 그의 첫 개인 작업 공간이다. “그동안 학교 작업실에서 작업했어요. 마음이 맞는 작가들과 함께 작업실을 얻을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작업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겠더군요.” 원래 가스 배달 회사의 사무실이었던 이 공간은 세로로 길고 좁은 입구를 지나면 나오는 안쪽으로 작업대와 책상, 싱크대 정도를 둘 수 있어서 혼자 지내기엔 무리가 없다. 김현성 작가는 어두운 회색 계열의 페인트로 벽을 발라 차분하면서 금속과도 어울리는 작업실을 완성했다. 제품 구상을 위해 습작 형식으로 그린 드로잉을 벽에 붙이고 싱크대 주변은 작은 식물과 직접 만든 커피 관련 도구들을 정갈하게 세팅했다. “제가 만든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려고 해요. 그래야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고 다른 디자인도 구상할 수 있거든요. 커피 스푼도 그렇고 벽에 건 옷걸이, 촛대 등도 다 제가 만든 것들이에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제대로 된 요리는 할 수 없지만 직접 커피를 내릴 수 있도록 작은 싱크대를 두었죠.” 김현성 작가는 자신의 성격처럼 꼭 필요한 것만을 갖추되 곳곳에 소소한 연출로 편안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완성했다.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작업실을 얻으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서 요즘엔 계속 작업실에 있어요. 금속공예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편견 없이 작가 김현성의 공간으로 봐주셨음 좋겠네요.” 금속의 차가움과 섬세한 손길이 공존하는 작업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해내는 그의 생활처럼 작업실 역시 계속 매만져질 것이다.
↑ 작업 중인 윤여범 작가.
↑ 1 자르고 남은 나무 자투리들. 2 이 벽을 배경으로 가구를 촬영하기도 한다.
↑ 쇼룸 겸 상담실.
맞춤 가구 디자이너 윤여범의 나무 탐닉
판교 주택가를 지나 조용한 응달산 자락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710퍼니처의 윤여범 작가는 홀로 나무와 대화하고 있다. 세 달 전 개포동 작업실을 정리하고 판교로 온 이유는 쇼룸을 겸하는 작업실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만큼 넓은 공간을 서울에서 구하기가 만만치 않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주변에 밭과 산이 있어서인지 서울에서 훌쩍 떠나온 느낌이 좋았다고. 성산동에 살고 있어 출퇴근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지만 결혼을 하면 신혼집을 작업실 가까운 곳에 얻을 계획이라 당분간 어려움을 감수하는 중이다. 이곳은 혼자 뛰어놀아도 좋을 만큼 공간이 아주 넉넉하다. 덕분에 가벽을 기준으로 공방을 분리해 그가 희망하던 쇼룸도 작지만 알차게 꾸밀 수 있었다. “쇼룸을 더 넓히고 싶었는데 기존에 있던 가벽을 활용해야 했기에 제약이 있었어요. 가벽을 허물기엔 비용 문제도 크고 시간도 촉박했거든요.” 가벽 위쪽에는 유리창을 낸 후 카키색으로 깔끔하게 칠했고 바닥에는 육각형의 회색 컬러 보드를 시공해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바닥재로 나온 제품이 아니었지만 육각형으로 모양을 맞춰 직접 시공하고 나니 개성이 드러나는 시도였다. 주변에 식당이 몇 군데 없기도 하고 요리를 즐기는 그는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싱크대도 마련했다. 싱크대 위에 있는 큰 창 너머로는 초록으로 뒤덮인 산이 그림처럼 어울렸다. “겨울에 계약할 때는 주변 환경이 삭막했는데 계절이 바뀌면서 풍경이 달라지더라고요.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쇼룸 뒤쪽에 있는 작업실은 각종 기계로 가득했고 흰색 벽에는 공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작업실 한가운데 끈을 연결해 천장에 매달아둔 라디오가 눈에 띄었다. “작업할 때 종종 라디오를 켜놓는데 우연히도 이 자리에서 전파가 가장 잘 잡혔어요. 소리도 잘 울리더라고요.” 큰 키로 겅중겅중 걸어간 그는 주문 받은 가구를 제작하기 위해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이윽고 작업실은 나무와 작가가 나누는 대화로 가득 찼다.
↑ 작업실 전경. 뒤쪽의 미닫이 문을 열면 작업 공간이 있다.
↑ 1 김정섭 작가의 ‘버블 시리즈’. 2 오랜시간 함께해온 각종 공구들.
↑ 1 작품을 위해 스케치 하는 모습. 2 작품을 옯기는 작가의 모습.
가구 디자이너 김정섭의 동네 속 작업실
망원동은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휘젓는 아주머니, 의자를 갖고 나와 햇볕을 쬐며 이야기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동네다. 자전거 벨 소리에도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김정섭 작가의 망원동 작업실을 방문했다. “파주에서 망원동으로 이사 온 지 6개월 정도 되었어요. 지금 작업실은 황형신 작가와 함께 사용합니다. 저와 황형신 작가 자택의 중간 지점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망원동으로 결정되었죠. 마침 모교인 홍익대학교 목조형 가구 디자인과에 출강하게 되어 위치도 아주 맘에 들어요. 가구의 재료가 시멘트이다 보니 파주에 있을 땐 몸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곳은 작업 공간을 분리해놓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망원동 작업실은 사무 공간과 작업 공간을 분리했죠.” 흰색 미닫이문을 여니 김정섭 작가의 작업 공간이 있었다. 먼지나 안료 냄새에서 쉴 수 있게 미닫이문을 설치했고, 작업 공간엔 환풍기를 설치해 먼지를 제거하고 있다고. 김정섭 작가의 ‘버블장’에 공구나 건담 모형이 놓여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 외 시멘트 스툴 시리즈와 황형신 작가의 그간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어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천장에 걸어놓은 쇠자 때문에 언쟁이 있었어요. 저는 걸어놓는 것을 좋아하는데 황형신 작가는 그렇지 않았죠. 원래 같이 살면 사소한 일로 싸우게 되잖아요. 그런데 황형신 작가도 어느새 자를 걸어놓고 쓰더라고요. 편했던 거죠. 이렇게 서로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개구진 표정으로 말하는 김정섭 작가의 말을 듣고 보니 천장의 매달린 쇠자가 승리의 브이자를 그리며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여 즐거웠다.
↑ 1 3D 프린터의 소재로 새로운 직품을 구상 중인 책상 위의 모습. 2 첫 작품인 양 모양 조명 ‘Lamb Lamp’.
↑ 작업을 하는 작가의 모습.
↑ 1 작가의 애장품. 2 작품이 어우러진 사무 공간.
가구 디자이너 정기호의 세월이 느껴지는 공간
보광동 언덕에 위치한 가구 디자이너 정기호의 작업실을 찾았다. 복잡한 골목을 헤매는데 2층 창문에서 손짓하는 반가운 얼굴에 긴장이 풀렸다. 정기호는 플라스틱 전선을 녹여 조명, 의자 등의 가구와 소품을 만드는 작가로 소재가 녹아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곡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움직이는 듯한 면이 특징이다. 1년 전 학교와 가깝다는 이유로 구한 보광동 작업실은 시각디자이너 김시현, 금속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최창규가 함께 사용하고 있다. “본래 주택이었던 곳을 개조해 만들었어요. 옛날 집이라 천장이 낮아 천장을 높이고 흰색 페인트칠을 했어요.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벽지를 뜯었는데, 벽지가 잘 붙게 신문지로 밑 작업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한 겹 한 겹 벗길 때마다 10년, 20년 전의 신문이 나오는 거예요. 너무 재밌어서 기사를 읽어보기도 했죠. 또 예전에 살던 아이의 낙서도 있었는데 이 아이는 나보다 나이가 많겠지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작업실의 한쪽은 업무와 디자인을 하는 사무 공간, 또 한쪽은 작품을 만드는 작업 공간으로 분리해 사용한다. 곳곳에 놓은 정기호 작가의 조명과 김시현 작가의 일러스트가 어우러지는 것도 이 작업실만의 독특한 풍경. “옥상이 개방되어 있어 올라가보곤 해요. 날씨가 좋은 날엔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좋고, 답답한 마음이 뚫리기도 하죠. 대구가 고향인데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어 참 정겨워요.” 정기호 작가는 최근 3D 프린터의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보고 있다고 했다. 플라스틱 전선은 색에 한계가 있어 아쉬웠는데 3D 프린터 소재는 색이 다양하고, 소재를 녹일 때 냄새도 덜해서 좋다고. 보광동 작업실에서 잉태될 그의 작업물을 상상하며 다시 골목길로 나섰다.
↑ 왼쪽부터 양승진, 이윤정, 박은국, 서정화 작가.
↑ 1 못을 모티프로 작업하는 이윤정 작가. 2 먼지 나는 공구들은 뒤쪽에 모아뒀다.
↑ 1 풍선에 에폭시를 입혀 만든 양승진 작가의 의자. 2 서정화 작가의 작품.
네 사람의 유쾌한 일터
공장 지대였다가 예술가들, 카페, 디자인 브랜드가 모여들며 근래 새로운 문화의 거리로 주목받는 성수동. 서정화 작가는 이곳에 일찍이 작업실을 마련하고 묵묵히 작품에 몰두해왔다. 기존에는 다른 작가들과 작업실을 공유하다가 사정상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혼자 남게 된 그가 동료 디자이너 3명을 불러들여 작업실을 새로이 꾸민 것. 풍선으로 가구를 만드는 양승진 작가, 못을 모티프로 가구와 소품을 디자인하는 이윤정 작가, 유성 매직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박은국 작가는 모두 대학 선후배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저희 모두 이곳에 입주하기 전부터 자주 오간 터라 익숙했어요. 다들 파주, 연남동, 이태원, 상도동에 뿔뿔이 살고 있지만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작업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죠”라는 이윤정 작가. 그녀의 자리는 작업실 입구 쪽으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통로이지만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좋아 여기를 선택했다. 그 맞은편으로는 양승진 작가와 박은국 작가가, 안쪽 가장 넒은 곳은 지분(?)이 많은 서정화 작가의 자리가 있다. “각자 스케줄에 따라서 출퇴근하고 현장에 나가는 일도 많아요. 그러다 보니 4명이 함께 작업실에 있을 때는 그리 많지 않아서 한산해요.” 큰 짐을 옮길 때 서로 도와주거나 대신 물건을 받아주는 것은 기본. 프로젝트가 밀려서 손이 부족하면 제작을 돕기도 하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보조가 되어주는 것은 작가로서 험난한 길을 걷는 동료애 때문이다. 서로에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그들은 함께 있어 더욱 힘이 된다.
에디터 신진수 · 최고은 · 어시스턴트 에디터 김수지|포토그래퍼 박상국 · 신국범 · 안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