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술시장의 중심에서 조용히, 그러나 견고하게 존재감을 키워온 도시 브뤼셀. 오랜 자본 축적과 컬렉터 문화, 그리고 지리적 이점이 맞물리며 경기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브뤼셀의 힘에 주목할 것.

매년 1월 개최되는 브뤼셀 아트 페어(BRAFA). ©Olivier Pirard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브뤼셀은 전형적인 ‘힘숨찐(힘을 숨긴 진짜 강자)’ 도시다.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미술시장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선 그들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유럽의 중심부에서 보석, 향신료 등 다양한 중개무역과 부가가치 산업을 키우며 축적해온 자본이 자연스럽게 컬렉터 문화로 연결되었다. 아르누보 건축의 거장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들이 브뤼셀에 밀집되어 있는 이유도, 당시 산업으로 부를 일군 부호들이 집을 통해 예술적 안목을 발현했기 때문이다. 아트 바젤이 출발한 스위스처럼 국토 면적이 크지 않은 벨기에는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 크기다. 부동산보다는 미술품과 보석 등 동산 중심으로 자본을 축적해왔으며, 개인 미술품에 대해서는 양도소득세가 없다. 여기에 글로벌 제약사 얀센을 탄생시킨 과학 기술은 이 나라의 중요한 경제적 뒷배다. 아트 바젤에서 매년 발간하는 UBS 리포트에서는 벨기에를 인구 대비 컬렉터가 가장 많은 국가로 손꼽고 있다. 자산 대비 미술품 구매 비중이 높은 고액 자산가 컬렉터가 많고, 프랑스나 독일, 네덜란드 어느 곳에서든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있다.

빌라 엉팽(장 보고시안 재단)에서 현재 진행 중인 장 미셸 오토니엘 개인전 전시 장면. 금색 연꽃과 금색 장미, 2025. 전시는 오는 10월 4일까지. ©Othoniel Studio_Jean-Philippe Robin
벨기에 미술시장의 중심은 단연 브뤼셀으로 오랜 컬렉터가 많은 만큼 현대미술 시장뿐 아니라 고전미술과 민속품,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절충형 마켓을 형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페어는 1956년 시작되어 올해로 71회를 맞이한 브뤼셀 아트 페어(BRAFA)다. 지난 1월 약 150개 갤러리가 참여하여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으며, 예년과 다름없이 7만2000명이 방문했다. 아트 바젤 홍콩이나 바젤, 프리즈 런던 등 240여 개국, 9만 명에 이르는 메가급 페어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전시장 크기가 홍콩의 절반 수준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이 정도 규모의 중형 아트 페어로 유럽에서 선방하고 있는 예는 아르코 마드리드, 아트 파리, 아트 쾰른 등을 들 수 있다. 판매작은 50만 달러(약 6.8억원)에 판매된 키스 해링의 회화에서부터 르누아르의 작품(50만 유로 미만, 약 7.4억원 미만), 2억원대에 판매된 아프리카 민속 가면, 그리고 김창열 작가의 단색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외에도 올해로 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현대미술 전문 ‘아트 브뤼셀’이 매년 4월에 개최되며, 세계 최초로 세라믹에 특화된 ‘세라믹 브뤼셀’은 2024년 시작되어 내년 4회 행사를 앞두고 있다. 또한 주말마다 시내 중심의 사블롱 광장에서는 유서 깊은 앤티크 마켓이 열린다. 최근에는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굵직한 행사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아르누보 건축의 대가, 빅토르 오르타의 작품이자 집이었던 공간. 현재는 오르타 박물관. ©wikimedia
2024년에는 초현실주의 100주년을 기념하며, 마그리트, 델보 등 초현실주의 작가를 배출한 도시로서 파리 퐁피두, 함부르크 미술관, 마드리드 현대미술관,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을 순회하는 전시회를 시작했다. 2025년에는 아르데코 100주년을 맞아 도시 전역에서 여러 특별전을 개최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빌라 엉팽(장 보고시안 재단)에서는 2026년 현재 장 미셸 오토니엘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고 있다.

아르데코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 빌라 엉팽. ©wikimedia
세계적 수준의 현대미술 갤러리들도 즐비하다. 1987년 브뤼셀 창고 건물에서 시작한 자비에 허프킨스 Xavier Hufkens는 브뤼셀 시내에 갤러리 지점만 3개를 두고 있으며, 파리에서 시작했지만 2006년 브뤼셀에 대규모 공간을 연 알민 레흐 Almine Rech, 첫 유럽 교두보로 브뤼셀을 선택한 미국 갤러리 글래드스톤 Gladstone 등이 대표적이다. 오는 11월 문을 여는 퐁피두 센터 분관은 또 다른 활력을 더할 요소다. 옛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 부지를 개조한 곳으로서 3만3057㎡(1만 평) 이상의 규모다. 전체 공간은 파리 퐁피두의 3분의 1이지만, 전시 공간만 비교한다면 거의 대등한 수준이다. 조용히 내실을 다져온 도시 브뤼셀, 시장의 부침 속에서도 미술시장이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매력적인 선택지임을 보여주는 산 증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