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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공예부터 가구, 회화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이학민 작가. 그는 익숙한 기물의 형태를 비틀고 만화적 상상력을 더해, 평범한 공간을 단숨에 기묘하고 즐거운 초현실적 무대로 바꾼다.


작업실에 둔 포 다이닝 테이블과 벤치, 뒤쪽에는 ‘그로브 파티션 Grove Partition’.

이학민 작가의 이력은 흥미로운 변곡점들로 가득하다. 한국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네덜란드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에서 컨텍스추얼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앤트로폴로지 Anthropologie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실용적인 제품 디자인부터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오브제까지 두루 섭렵한 경험은 그를 장르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작가로 성장시켰다. 그의 작업실에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만화, 게임, 광고의 코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릿 브랜드의 협업, 미술관으로 들어온 그래피티처럼 그는 하위문화가 상위문화와 결합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에 주목한다. ‘포 Paw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로, 가구라는 전형적인 폼에 피규어적 요소를 접목해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캐릭터적인 생동감을 뿜어낸다.

신작 조명 ‘Crumpled Lamp’에 손을 얹은 이학민 작가.

회화로 넘어오면 서사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심드렁하거나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작가가 포착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이학민 작가는 “디지털 과잉의 시대, 너무 많은 데이터 속에서 느끼는 무기력함과 피로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중세 판타지 갑옷을 입고 있지만 손에는 컵라면이나 빼빼로를 들고 있다. 게임 속에서는 세상을 호령하는 군주이지만, 현실에서는 편의점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괴리. 작가는 가상과 현실 사이의 이 묘한 갭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연필 드로잉에서 아크릴, 최근에는 에어브러시 작업으로 확장하며 가구라는 물성이 주는 제약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운 비판적 서사를 담아내고 있다.

중세 갑옷을 입은 캐릭터가 컵라면 먹는 장면을 담은 ‘Hollow Crown’.
회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 최근에는 에어브러시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올해 초 선보인 개인전 <Bold Bolts: 과잉의 하드웨어>는 그의 예술적 지평이 한층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볼트, 경첩처럼 구조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완성된 순간 지워지는 존재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 그는 “반닫이 같은 전통 목가구의 금속 장식들이 기능과 장식을 동시에 수행했듯이, 현대적인 부속들도 충분히 조형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직접 알루미늄 캐스팅한 볼트를 장식으로 활용하고, 경첩을 가구 밖으로 내어 노출한 작업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어 보이게 한다. 최신작 ‘Crumpled Lamp(구겨진 조명)’ 역시 기본적인 형태를 비틀고 사이즈를 키워 초현실적 느낌을 자아낸다. 젤리빈이나 구미 베어 같은 정크푸드 모티프를 장식으로 활용하는 위트도 잊지 않았다.

생성형 AI가 디자인을 뽑아내고 3D 프린팅이 정교함을 뽐내는 시대에, 이학민 작가는 역설적으로 ‘손의 개입’과 ‘불완전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기계의 정밀성을 인간이 따라잡을 수는 없겠죠. 그럴수록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는 기계의 완벽함에 대한 저항으로 아날로그적인 방식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에 주목한다. 알루미늄 주조 기법에서 생기는 미세한 기포나 무너진 흙벽의 흔적, 손으로 직접 구긴 금속의 불규칙한 질감 등 대량생산 제품이 줄 수 없는 ‘인간적인 온도’를 작업에 담는 것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빛을 발하는 인간의 감각. 이학민 작가가 그리는 다음 유토피아는 바로 그 ‘아름다운 불완전함’ 속에 있다.

벽면 시계는 ‘Meltdown Clock’. 왼쪽 캐비닛은 ‘Woolly 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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