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마움, 축하, 격려…. 선물에는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담긴다. 그것이 선물을 주고받았을 때 행복한 이유이자 선물을 고르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곱 명이 들려주는 선물에 얽힌 일곱 개의 에피소드.
다시 찾은 유년의 추억 방송인 김나영
나의 어릴 적 이름은 김설이었다.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꼬맹이었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 일주일 전, 돌연 엄마를 잃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의 담임을 맡았던 아동문학가 이희주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안쓰럽게 여기셨는지 자신의 동시집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제목은 <아기 새가 불던 꽈리>. 시집을 선물 받은 날, 나는 색종이를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책처럼 만든 후 선생님의 시 몇 편을 옮겨 적었다. 그러고는 맨 앞장에 ‘김설 동시집’이라고 써서 선생님께 드렸다. 그 후 선생님은 매일 수업이 끝난 뒤 빈 교실에 나를 앉히고 동시 짓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엄마 없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나는 선생님 옆에 꼭 붙어 지냈고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덜 수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이사하던 중 그 소중한 시집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터넷을 뒤져 다시 구할 수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이미 절판 상태였다. 김설이란 이름처럼 소중한 추억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어디선가 그 시집을 구해다 선물해주었다. 같은 책을 두 번 선물 받고 나보다 더 기뻐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금도 그 책을 볼 때면 선생님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녹지 않는 사탕 물나무 사진관 대표 김현식
우리 집과 채 3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외할머니 댁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외사촌 동생들이 또래인지라 한번 가면 진탕 놀다 돌아오곤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언젠가 아마도 한 살 어린 동생과의 말다툼 끝에 화가 나서 집에 돌아오려고 했을 때인 것 같다. 외할머니께서 다가와 “재미있게 놀다 가는 거냐?”고 물으시며 외사촌 동생들 몰래 치마를 주섬주섬 올려 속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휴지에 싼 무언가를 건네주셨다. 외할머니의 체온이 남아 있는, 하얀 휴지가 듬성듬성 묻은 알사탕. 나는 그것을 먹지 않았다. 선물에 대해 생각하자니 할머니의 사탕이 생각난다. 마음속의 사탕을 꺼내 조심스레 휴지를 펼쳐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막내 외손자를 향한 애틋함과 미안함으로 버무려진, 30년이 지난 지금도 하얀 휴지에 싸여 온기를 지닌 채 내 가슴속에 녹지 않는 사탕으로 남아 있다.
작은 정성 더스튜디오K 대표 홍혜진
가능하면 직원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때는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아서 티가 났었나 보다. 한 명이 조용히 나가더니 다른 종류의 초콜릿 3개를 사다가 책상 위에 슬쩍 올려놓고 갔다. 말은 안 했지만 무척 고마웠고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가 직접 만들어준 연말 카드도 기억에 남는 선물이다. 평소 내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고 직접 그린 만화에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멘트까지! 나와 회사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뭉클했고, 그 친구가 퇴사한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난다.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 기술이 뛰어나진 않지만 노력형이라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내가 가르쳐준 기법으로 만든 액세서리를 편지와 함께 선물해주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크고 작은 선물을 수없이 받았다. 어릴 때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듯한 선물, 큰 선물일수록 반가웠는데 갈수록 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담은 소소한 선물에 더 감동하게 된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
내 마음을 아는 선물 홍보대행사 커뮤니크 대표 신명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선물은 아들이 매년 내 생일 때마다 써주는 카드다. 늘 “엄마 생일 축하해요, 축복해요~”로 시작하는 문구와 함께 고해성사를 연상시키는 반성의 문구가 들어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그 외 인상적이었던 선물로는 친한 갤러리 대표님께 받은 작은 사진 액자가 있다. 불우아동돕기 자선행사를 기획하셨길래 도와드렸는데 행사가 끝난 뒤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선물해주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크기나 값어치와 관계 없이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다. 대학교 때 받았던 연주용 바이올린도 나를 흥분시켰던 선물 중 하나다. 연습용 바이올린만 사용하다 처음 켜본 연주용 바이올린! 소리의 색깔과 깊이가 너무 좋아서 날아갈 듯 기뻤고, 늘 꼭 안고 다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선물을 고른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진정 아끼는 사람을 위한 선물을 고르는 데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작은 선물 하나가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화시키기도 하니까. 나의 경우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선물보다는 상대방의 취향, 연령,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한 선물을 고른다. 그가 지금 ‘꽂혀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본다. 이번 5월에는 어떤 선물을 준비할까? 벌써부터 나는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다.
엄마에게 하이파이브를 <싱글즈> 피처 디렉터 이은석
생일은 축하 받아 마땅한 날이다. 그래도 날짜는 중요하다. 하필 엄마 생일은 추석 다음 날이다. 추석이면 차라리 축하 받기 좋을 텐데 추석 다음 날은 잊기 쉽다. 명절 뒤 여자들은 피곤하고 남자들은 쉬었는 데도 피곤하다. 사랑받는 초등학생 막내아들도 피곤했지만 선물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문제는 엄마가 뭘 갖고 싶은지 알 턱이 없었다는 것. 어렸으니 돈도 없었다. 물론 시내엔 선물이 넘쳐흘렀다. 어디서나 환영 받는다는 선물이 참치 캔과 참기름 세트여서 그렇지. 이건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으로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성경이었다. 올해 성경을 사드리고 내년에 찬송가를 사드리면 2년은 편하구나. 세상엔 이런 아들이 많았는지 해마다 다양한 성경이 등장했다. 물론 내 마음도 편하진 않았다. 하늘이 도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드디어 근사한 선물을 할 기회가 생겼다. 초등학교 6년에 중학교 3년간 학교에서 들었던 ‘정기적금’이 만기가 된 것이다. 간 큰 ‘중3’은 호기롭게 백화점에 가서 ‘하이파이브’ 오리털 파카를 골랐다. 엄마가 좋아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큰돈으로 쇼핑하고 온 막내를 혼내지 않으셨다는 것만 기억난다. 아쉽게도 보라색 오리털 파카는 몇 번 세상 구경도 못하고 옷장에 걸려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더 아쉽게도 그 옷이 마음에 드셨는지 물어볼 기회가 이젠 사라졌다. 다시 선물할 기회와 함께.
안 받으니만 못한 선물 덴스크 대표 김효진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을 받은 경험은 누구나 있다. 대부분 급하게 산 듯한 선물이거나 너무 뻔한 선물, 즉 영혼 없는 선물이다. 이런 물건이 오가는 것은 관계 자체에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정성껏 고른 듯한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통의 부재’를 뜻한다. 그래서 나는 선물 선택에 까다롭다. 상대의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하는 것은 물론 ‘나조차도 탐나는 물건인가’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가격이 다소 비싸도 제일 예쁜 것을 산다. 그러나 반드시 고가품만이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집으로 어른들을 초대해 저녁을 대접한 적이 있는데 손님들이 저마다 선물을 가져오셨다. 손수 만든 케이크와 쿠키도 있었고 과자, 미니 맥주, 장난감을 가득 채운 합도 있었다. 저녁식사에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카드와 함께. 너무나 멋진 선물이었다. 끝으로 멋진 선물을 고르는 센스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는 것도 좋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도 좋다. 주는 즐거움과 받는 기쁨. 그것이 하나되었을 때 선물은 정말 특별한 것이 된다
관심의 표현 그랜드 하얏트 서울 식음부장 구유회
각박한 세상이지만 사실 누구나 관심 받기를 원한다. 선물을 받으면 행복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선물이란 무엇일까? 평소 상대방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눈여겨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물일 것이다. 가령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미니 앨범이라면 작지만 특별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내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은 세계적인 건축가인 존 모포드 John Morford에게서 받은 보타이다. 호텔리어라는 직업상 늘 보타이를 착용하는 나를 떠올리며 준비한 그의 선물은 백화점에서 바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집하고 소장해온 물건이라 더욱 감동적이었다. ‘마음의 선물’에 대한 얘기를 하자니 부모님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내가 드린 선물의 값어치를 전혀 따져보지 않는 유일한 분일 것이다. 그리고 전화 한 통보다는 편지에, 용돈이나 외식보다는 정성스레 고른 소박한 선물에 더 행복해하실 것이다. 나 자신이 완벽한 선물이 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멋진 일이 또 있을까.
에디터 최영은 ㅣ포토그래퍼 진희석 ㅣ세트스타일리스트 배지현
출처 〈MAISON〉 201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