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탐험가들의 종착지

밀라노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알코바

밀라노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알코바

숨어 있는 보석을 발굴하고 방치된 장소를 특별한 쇼케이스로 변화시키며 밀란디자인위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전시로 우뚝 선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 디자인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조셉 그리마와 발렌티나 치우피를 인터뷰했다.

 

시선을 압도하는 웅장한 입구와 금속으로 뒤덮인 천장 구조물이 인상적인 밀란디자인위크 2023 알코바 전시장

 

알코바의 설립자이자 각자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다. <메종> 독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해달라.
조셉 그리마 Joseph Grima(이하 조셉) 건축가이자 에디터, 큐레이터다. 현재 네덜란드 디자인 아카데미인 에인트호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으며, 건축과 연구 기반의 스튜디오 스페이스 캐비어 Space Caviar를 운영하고 있다. 발렌티나 치우피 Valentina Ciuffi(이하 발렌티나)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이자 큐레이터로 밀라노에 위치한 스튜디오 베데트 Studio Vedèt를 설립했다. 그래픽디자인과 브랜딩, 큐레이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경험이 있으며 잡지 <아비타레 Abitare> 에디터로도 일하고 있다. 조셉과 함께 전통적인 규범에 도전하고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는 새롭고도 독립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를 설립했다.

 

알코바를 설립한 조셉 그리마와 발렌티나 치우피.

 

알코바의 시작이 궁금하다.
조셉
밀란디자인위크라는 큰 행사의 틀에서 벗어나 디자이너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한 공통된 비전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젊고 급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인재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해 그들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독립 디자인 박람회를 만들고 싶었던 거다. 발렌티나 전형적인 디자인 박람회에서 벗어나 밀라노에 방치되고 잊혀진 공간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장소를 전시장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관람객들이 보다 의미 있는 방식으로 디자인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던 알코바 전시장.

 

디자인 산업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발렌티나 알코바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크게 포괄성, 탐구성, 비판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이 미학과 상업적 실행 가능성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규범에 도전하고 대화를 유발하며 시급한 사회 및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알코바를 통해 이러한 가치를 구현하고 사람들이 디자인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와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셉 단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경험을 제안하고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디자이너들이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재료와 과정을 실험하고 디자인에 대한 대안적인 사고방식을 탐구하도록 장려한다. 우리는 새로운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미래를 형성하는 데 열정적인 디자이너들의 공동체를 육성하고 싶었다.

 

도축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그대로 살린 전시장 모습. 차세대 디자인을 이끌어갈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매년 방치된 장소를 택하는 이유가 있나?
발렌티나
방치되거나 버려진 건물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공간이 지닌 잠재력과 그곳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건물들을 역사와 의미 있는 미개발 자원으로 보고 있으며, 활기찬 문화적 장소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간의 쓰임새를 변경함으로써 새로운 건축의 필요성에서 벗어나고 자원을 최적화하는 지속가능성을 목표로 한다.

 

도축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그대로 살린 전시장 모습. 차세대 디자인을 이끌어갈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도축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그대로 살린 전시장 모습. 차세대 디자인을 이끌어갈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장소를 선택할 때 특별히 고려하는 사항은 무엇인가?
발렌티나
우선 건축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강한 장소여야 할 것.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야 하며, 전시된 디자인에 뚜렷한 배경을 제공할 수 있는 건물에 끌린다. 또한 일반적으로 디자인 이벤트와 관련되지 않은 위치에 우선순위를 매긴다. 조셉 접근성과 실현 가능성을 고려한다. 관람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알코바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지역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향후 지역의 발전이나 재생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선택된 장소와 전시된 디자인 사이에 공생 관계를 만드는 것이며, 여기서 공간은 전시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는 전시장의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여 대화를 유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촉발하는 역동적이고 몰입적인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증강된 자연을 주제로 펼친 알코바 프로젝트 스페이스 전시장

 

올해는 오래된 도축장에서 전시가 펼쳐졌다.
조셉
거대한 안뜰과 커다란 입구, 금속으로 뒤덮인 긴 지붕에서 웅장함이 느껴졌다. 과거 밀라노 산업의 본질을 포착한 듯했다. 발렌티나 15헥타르에 달하는 이곳은 한때 분주한 산업과 중요한 물류 중심지다. 지금은 콘크리트 바닥에 금이 가고 과거의 잔재가 스며 있는 도시 역사의 유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산업적 미학과 현재 버려진 상태에서 오는 대조를 통해 매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조셉 현존하는 공간을 수용하고 자연이 그 방향을 따르도록 하는 알코바의 철학과도 일치했다. 바닥과 천장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가 시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이를 아름다움과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에스튜디오 레인이 피마자 기름으로 만든 식물성 조명

 

주목해야 할 관전 포인트는 무엇이었나?
발렌티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유지하면서 혁신적인 프로젝트로 유명한 생물 디자인 연구소인 아틀리에 루마 Atelier Luma의 작품을 선보다. 아틀리에 루마는 5개의 대형 설치물과 실험물을 포함한 전시를 열었다.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조류, 볏짚, 소금, 지물과 같은 농업 부산물을 놀라운 설비를 만드는 데 사용한 것이다. 대개 간과되거나 버려지는 재료들이 매혹적인 예술 작품으로 거듭났다. 이외에도 건축자재, 직물, 야자나무 피복, 심지어 식물성 신발을 사용해 만든 것도 있었으며 대체 재료의
가능성을 톡톡히 보여줬다.

 

호박 섬유로 제작한 새머 셀박의 스크린과 램프 작품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자면?
발렌티나
단 하나의 작품을 선택하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좋아하는 젤라토를 고르라고 하는 것과 같다(웃음). 하나만 꼽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작은 비밀을 하나 말해주겠다. 때때로 가장 선망하는 예술가나 작품은 모든 관심을 끌거나 인기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니다. 구석에 숨겨둔 보석을 발견하는 호기심 많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뜻밖의 생각이나 더욱 의미 있는 생각을 하게 하는 프로젝트가 많다. 밀라노에서 찾기 힘든 주차장을 찾는 것과 같이 희귀하고 소중한 발견은 늘 조용히 숨어 있기 마련이다.

 

호박 섬유로 제작한 새머 셀박의 스크린과 램프 작품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디자인 현상이 있다면?
발렌티나
기술과 자연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등장이다. 디지털 영역과 자연 세계를 혼합한 이 매력은 ‘증강된 자연 Augmented Nature’이라는 제목의 알코바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섹션은 자연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의 영감과 재료가 되어 새로운 경향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조셉 예술가들이 유기적인 질감과 식물 기반의 재료, 심지어 살아 있는 유기체를 사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새머 셀박 Samer Selbak의 램프와 스크린은 팔레스타인 호박의 섬유로 복잡하게 짜여 있으며 디디 NG 윙 인 Didi NG Wing Yin의 조각과 가구는 실제 나무의 질감을 따라 조각되었다. 에스튜디오 레인 Estudio Rain은 피마자 기름으로 만든 식물성 기름 수지를 사용했다. 이러한 시도는 기술을 유기적인 형태로 완벽하게 통합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디디 NG 윙 인의 가구

 

알코바의 향후 계획은?
조셉
알코바를 통해 다가오는 한 해에 대한 우리의 계획을 담아낼 수 있어 기쁘다. 전무후무한 행보를 시작함에 따라 우리의 비전은 밀라노를 넘어 확장되어 있으며 새로운 디자인 산업의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오는 12월에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역동적이고 다양한 문화적 경관 속에서 신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선보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물론 마이애미로 모험을 떠나는 동안에도 밀라노의 뿌리를 키우는 데 전념할 계획이다. 탐험의 힘과 예상치 못한 만남의 마법을 믿으며 내년에는 더욱 많은 한국 참가자들과 관람객들을 환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속가능한 대체 재료의 가능성을 보여준 아틀리에 루마의 전시관

 

마드리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푸사니 Fusani의 조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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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with Clay

흙으로 만든 노스탤지어 캐릭터

흙으로 만든 노스탤지어 캐릭터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담아 감각 놀이하듯 흙을 매만진다.
이아련 작가는 도자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심미적 탐험가다.

 

지난해 12월,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선보인 기획 전시 <Curious Creatures>.

 

애니메이션 <몬스터주식회사>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기도 하고 뾰족뾰족한 형태가 선인장을 닮아 있기도 하다. 이는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아련 작가가 기억 속 간직하고 싶은 다양한 존재를 흙으로 만든 작품이다. “어렸을 때 보통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바비 인형이나 사람 형상의 인형에서 묘한 공포감을 느꼈어요. 주로 동물 모양의 인형을 가지고 놀았던 것 같아요. 또 부모님한테 듣기로는 공갈젖꼭지에 굉장한 애착을 가졌다고 하더군요. 항상 손과 입안 감각을 일깨우는 행위에서 안정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어요. 이러한 행위가 지각 활동에 큰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어요.” 그녀는 현재 흙을 만지게 된 것도 어쩌면 유년 시절의 성향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말을 꺼냈다.

 

 

상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동물 친구들은 치열한 유학 생활을 거쳐 해외에 정착하면서 느꼈던 고독과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 감성적인 노스탤지어를 각각의 캐릭터로 치환해 표현한 것이다. 주변의 특정 인물, 친구, 가족 등 인생에서 영향을 미치고 스쳐 지나간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 예로 영국에서 만난 데이비드 보위의 광팬인 친구를 오브제로 표현한 작품 ‘보위’, 전설적인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를 오마주한 작품 ‘챠오 미스터 에토레!’ 등 각각의 작품에 담겨 있는 저마다의 스토리가 흥미롭다.

 

돌체앤가바나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DG Gen’D’ 시리즈의 일부.

 

가장 최근에는 돌체앤가바나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해 돌체앤가바나 까사 컬렉션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에서 유일한 한국 디자이너로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다. “작품 제작을 위해 시칠리에 위치한 레지던스에 머무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시칠리의 따스한 햇살과 바다 냄새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기억에 남아요. 돌체앤가바나가 추구하는 화려한 문양, 톡톡 튀는 발랄한 색감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죠.” 그렇게 탄생한 작품 ‘DG Gen’D’는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시칠리 나무와 선인장, 식물의 형태를 차용해 만들어갔고 돌체앤가바나만의 패턴과 색감을 입혀 완성했다. 여기에 무언가를 소망하고 기도한다는 동양적인 관점을 담아 초를 꽂을 수 있는 촛대로써의 기능을 더했다.

 

독일에 거주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아련 작가.

 

“저는 기능성만 목적인 디자인은 그 속에 담긴 예술가의 창의적인 영혼을 가린다고 생각해요. 아마 ‘Less is More’를 선호하는 미니멀리스트보다는 개인적으로 ‘More is More’를 표방하는 맥시멀리스트 성향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요. 제 작품 중 화병이나 머그 형태를 지닌 것도 물론 있지만, 어떤 오브제를 만들 때 최대한 저만의 정체성과 표현을 중시하며 최소한의 기능만 부여하고자 노력해요.” 이아련 작가는 오는 9월, 서울에서 열릴 키아프 아트페어에 프랑스 갤러리 바지우를 통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후 11월에는 뉴욕의 제이로만 갤러리에서 신작을 공개할 예정. 새롭게 탄생할 재기 발랄한 표정의 동물 친구들이 기대된다.

 

SPECIAL GIFT

 

 

이아련 작가에게 증정한 끌레드뽀 보떼의 더 세럼은 피부 본연의 힘을 일깨워 생기 있고 매끄러운 피부를 완성시켜준다. 또한 피부에 고르게 퍼지고 빠르게 흡수되어 24시간 보습 효과를 유지하고 피부의 길을 열어 다음 단계 제품의 흡수를 높여준다. 50ml, 3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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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부처의 슬기로운 작가 생활

안드레 부처의 슬기로운 작가 생활

안드레 부처의 슬기로운 작가 생활

 

독일 미술가 안드레 부처를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에서 만났다.
컬렉터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작품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그에게 직접 들어보자.

 

지난 7월 15일, 포르투갈의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에서 열린 <안드레 부처> 전시 오프닝 전경. 사진 속에 안드레 부처와 두아르트 스퀘이라 대표의 모습도 보인다. 오른쪽 컬러 필드 회화가 이번 전시에서 첫 선을 보인 새로운 연작이다.

 

안드레 부처 Andre Butzer의 작품은 왜 인기가 있을까?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매혹적인 그의 작품은 지금 전 세계 네 곳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을 정도로 관심받고 있다. 마드리드의 국립 티센 보네미자 미술관, 슈반도르프의 케벨빌라 오버펠더 쿤스틀러하우스, 베를린의 살롱 달만, 브라가의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 Duarte Sequeira에서 동시에 그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안드레 부처는 그의 모든 전시 기획을 큐레이터에게 일임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의 개인전은 언제나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지만 그는 직접 전시를 준비한다. 작업 과정에서 발현하는 감각을 본능적으로 전시에 반영하는 것이다. “마드리드의 미술관 전시는 지난 25년간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회고전입니다. 반면에 슈반도르프의 미술관 전시는 그간 항상 생각해왔던 그림이 없는 전시예요. 이렇게 물리적 역사와 정신의 변화를 보여주는 두 개의 전시가 합쳐져 미술가로서의 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드레 부처는 역사와 정치, 예술사와 대중문화 등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선보인다. © 안드레 부처 아카이브

 

그의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1999년 비엔나의 갤러리 에스더 프랜드에서 열렸던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 <나는 뭉크이다 Ich bin Munch>가 힌트가 될 것이다. 절규하는 그림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미술가 뭉크와 자신을 동일시한 도발적인 제목은 그의 작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미술사의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고, 뭉크뿐 아니라 세잔, 마티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월트 디즈니 등의 선배 작가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윤회와 같다. 마드리드의 미술관은 영리하게도 그의 전시장으로 가는 길목인 상설 전시관에 뭉크 그림을 걸어 회고전을 더욱 빛나게 했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미술 애호가로 미술사에서 영감을 받고 있으며, 현대인을 둘러싼 역사와 정치, 대중문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드리드의 국립 티센 보네미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 전경. © 안드레 부처 아카이브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외계인 같은 귀여운 캐릭터들에 대해 물었다. 예를 들어, 별 모양의 얼굴에 이빨이 귀여운 원더러 Wanderer는 뭉크와 독일 SS에서 비롯된 인물이며, 눈이 보이지 않는다. 월트 디즈니처럼 그가 만든 캐릭터들은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만, 그는 캐릭터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림 속 캐릭터가 아니라 그림에 관심이 있습니다.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릴 뿐입니다. 어딘가에서 보았던 어떤 것에서 영향받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작품 속 캐릭터들에는 이름과 특징이 있었지만, 이미 내 안에 들어와 그려진 그림에 대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에 대해 여러분에게 잘 말할 수 있다면, 아마 그림을 안 그렸을 것 같아요.”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 전시의 특징은 처음 선보이는 컬러 필드 연작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형형색색의 비가 내리는 듯한 이 아름다운 연작은 강렬한 붓 터치나 캐릭터 없이 전시장을 서정적으로 물들였다. “이 새로운 연작은 오래전 종이에 그렸던 수채화 작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리라고 조언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연스럽게 때가 되어서 캔버스에 그린 스트로크 작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슈반도르프의 케벨빌라 오버펠더 쿤스틀러하우스에서는 회화 작품이 하나도 없고, 그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특별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 안드레 부처 아카이브

 

좋아하는 작가인 폴 세잔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인지, 당시에는 컬러 블록을 독립적으로 그리는 작업을 했었다. 그림은 점점 검게 변해서 블랙 페인팅 연작에 이르렀고,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흰 바탕의 컬러 스트로크 연작은 안드레 부처 작품 세계 안의 요소가 서로 교류하는 듯한 느낌이다. 단순한 컬러와 붓 터치이지만, 그의 모든 작품의 DNA를 추출한 것 같은 존재감이 매력적이다. 또한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는 세상 모든 것을 파장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동석한 미술 사학자 크리스티안 말리차 Christian Malycha는 안드레 부처에 대해 현대인이 삶의 지상과 천국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탐구하는 작가라고 평했다. “그는 어떻게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고뇌하는 작가입니다. 인간과 사회, 팝아트와 예술사의 개별성과 연속성을 캔버스에 펼쳐놓는 것이 바로 그의 작업이지요.”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에서는 4m가 넘는 대형 작품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큰 작품을 그리려는 의도는 아니고 눈앞에 있는 캔버스에 그릴 뿐이라고 설명한다. 작은 작품도 강한 존재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엽기적인 그의 작품에 이러한 고민이 들어 있다니 재미있다. 또한 그는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 작가답게 ‘SF 표현주의’라는 사조로 자신을 설명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단색화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다. “SF 표현주의는 내가 오래전 조합한 단어입니다. 독일 표현주의가 구식이 되어버렸기에, 이를 다시 한번 매혹적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표현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서 SF와 조합한 것이지요. 표현주의는 삶의 원천이자 열쇠입니다. 단순한 미술 사조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표현이며, 요즘과 같은 AI 시대에는 더욱 표현이 중요합니다.”

 

마드리드의 국립 티센 보네미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 전경.

 

SF 표현주의는 1920년대의 미술 사조에 멈추어 있지 않고, 반복의 고리를 뚫고 들어가서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반복적으로 비슷한 작품을 찍어내는 팝아트가 아니라, 단색화와 같은 종교적 수행의 반복이다. 예를 들어, 블랙 페인팅 연작은 검은색을 반복적으로 칠해서 완성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저 블랙 회화로 보일 뿐인 것. 안드레 부처는 거대한 작품 스케일로도 알려져 있다.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에서의 전시에서도 4m의 거대한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는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큰 캔버스가 앞에 있으면 크게 그리는 것일 뿐 큰 작품을 그리려고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작품은 관람객을 포용하는 느낌이 있다면, 작은 작품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만 회사가 아니라 가정에 그의 그림을 걸기 위해서는 공간이 커야 하기 때문에, 작품 크기에 관심을 가진 수집가들이 많다. “나는 그림이 삶의 원천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인생이 그림으로 표현된다기보다는, 그림이 삶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항상 빛처럼 말입니다.” 안드레 부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고 했다. 대리석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형상을 드러냈다고 하는 미켈란젤로의 명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세계의 미술 애호가들이 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 흥미로운 만남이었다.

CREDIT

에디터

writer

이소영

photographer

김욱, 두아르트 스퀘이라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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