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전쟁을 이겨낸 베트남 사람들에게 일용한 양식이자 영혼을 달래주는 국수가 있다. 응우옌 왕조의 도읍이었던 훼의 요리를 중심으로 베트남 궁중 요리와 서민 요리를 두루 살펴봤다.
요즘이야 길거리에서 ‘포OO’, ‘하노이의 OO’, ‘르 사이O’ 같은 베트남 음식점 간판을 흔하게 마주칠 수 있지만 필자가 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 초만 해도 중국집 이외의 아시아 음식점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황석영 작가의 <무기의 그늘>이라는 소설이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미군 치하의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에서 군 수사요원으로 일하는 한국인이 주인공이다. 그는 미군과 한국인 군무원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얽히고설킨 군수물자 암거래 현장을 파헤친다. 생동감 넘치는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음식의 이름에 더 눈이 갔다. 느억맘이라는 이름의 생선 젓갈과 퍼라는 이름의 국수까지. 어쩌면 베트남 참전용사인 필자의 아버지는 먹어보았을지도 모르는 이 음식들은 당시만 해도 그저 궁금함의 대상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2월,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베트남 음식점은 2000년대 초반 들어 프랜차이즈 형태로 변모하며 대중화에 성공했다. 베트남 음식점들이 들어오기 이전 한국의 국수계(?)는 한 · 중 · 일이 균형을 이룬 세상이었다. 칼국수와 멸치국수로 대표되는 한식, 우동과 소바를 내세운 일본, 짜장면과 짬뽕 등 서민의 국수를 대변하는 중식이 삼국지의 정족지세 鼎足之勢, 즉 세 발 달린 솥이 천하를 인 형국처럼 국수의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전한 베트남의 퍼는 전혀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일단 면발의 재료가 쌀이었다. 쌀이라고 하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주식이다. 밀이나 수수만 먹고도 잘만 살아가는 민족들이 널렸는데도 우리는 끼니로 쌀을 먹지 않는 것에 대해 왠지 우리의 몸에게 미안해한다. 쌀로 만든 면은 그런 사람들에게 훌륭한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렇듯 쌀이라는 재료가 주는 친근함에 민트, 레몬, 고수 등 기존의 요리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었던 재료들이 어우러진 참신함 그리고 술 먹고 난 다음 날 속풀이에 그만인 국물 맛은 삽시간에 베트남식 쌀국숫집이 전국에 퍼지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쌀국숫집의 성공으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퍼를 베트남 요리의 대명사로 기억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와 놀라울 만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섬세한 전통 요리 발달의 필요조건인 강력한 전제 왕조가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외세의 침략을 견뎌야 했으며 동서 냉전의 와중에서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점에선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더군다나 최근의 경제 발전에까지 눈을 돌리면 베트남이 밟고 있는 코스는 우리 압축 성장기의 데자뷰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전쟁을 통한 외세 축출과 통일을 이뤄냈다. 그런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 이들은 외국의 문물을 자국 문화와 융합시키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원래부터 워낙 다양했던 인도차이나반도의 민족 구성은 이들을 웬만한 이질적 요소들은 꿀꺽 씹어 삼킬 수 있는 기질의 소유자들로 만들어주었다.
퍼도 그런 이질적인 요소들을 한 덩어리로 뭉쳐 만들어낸 음식이다. 퍼의 어원은 ‘포토푀’, 즉 ‘불로 끓인 냄비’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불을 가리키는 ‘푀 feu’ 부분을 차용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프랑스 지배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라오스에서는 같은 쌀국수를 놓고 ‘프 feu’에 더 가깝게 발음한다. 포토푀는 쉽게 말해 프랑스식 곰탕이다. 뼈가 붙어 있는 소갈비에 각종 향신료를 넣고 4~5시간 푹 고아내는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국물 요리 중 하나다. 프랑스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기 시작하며 이 포토푀의 조리법을 가지고 왔고 이것을 하노이 지역 사람들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향신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변경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퍼의 국물이다. 여기에 자신들의 주식인 쌀로 만든 국수를 말아서 완성한 음식이니 퍼 안에서만큼은 프랑스와 베트남이 완벽한 화해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후 퍼는 국물의 재료를 쇠고기에서 닭고기, 돼지고기, 베트남식 소시지, 해산물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며 베트남 요리를 전 세계에 알리는 얼굴마담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렇다고 해도 퍼는 베트남 요리라는 회사에서 아주 작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주주일 뿐이다. 정찬 요리라기보다는 재빨리 서빙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에 더 가깝다(그래서인지 고급스럽게 꾸며진 국내의 일부 쌀국숫집들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곤 한다). 분보훼 Bun bo Hue. 베트남 중부의 역사 도시인 훼의 쇠고기 국수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베트남 국수다. 육수는 소꼬리를 레몬그라스, 생선 젓갈, 말린 고추 등과 함께 푹 고아서 만든다. 여기에 민트, 바나나 꽃, 숙주 등의 채소를 첨가하고 선지 덩어리와 함께 돼지 족발 한 토막을 얹어야 제대로 된 분보훼라고 할 수 있다. 얹은 고명만큼이나 맛도 진하고 풍부하다. 여기에 맵기로 소문난 월남 고추 양념장까지 더하면 그 맛은 거의 육개장에 가까워진다.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베트남의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긴 한데, 그래도 훼에 직접 가서 길거리 가게에서 한 그릇 말아 먹는 것이 진짜다.
다시 힘을 내게 한 분보훼
베트남 취재 땐 허기가 많이 졌다. 뜨거운 태양도 한몫했고 취재를 하면 할수록 나오는 이 땅의 슬픈 역사가 나를 더욱 기운 빠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훼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엔 빈목 터널이라는 곳이 있다. 3층 구조에 13개의 출구를 갖춘 이 거대한 지하 구조물은 오로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베트남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미군은 이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 인구 1명당 7톤에 해당하는 양의 폭발물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맨손으로 굴을 팠다. 가구별 주거 구역과 광장, 의료실과 학교를 갖춘 땅굴 안에서 6년 동안 전쟁을 견뎌냈고 그 기간 동안 17명의 아이가 새롭게 태어났다. 이런 식의 스토리는 베트남 사람들에겐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흔한 이야기다. 석양이 내려앉는 들녘에서 한가로이 논을 매고 있는 할머니에게 여쭤봐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과는 전혀 다른 잔혹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미군 폭격기 B-52는 세 번에 나눠서 폭격을 해요. 제 동생은 남부 전선에서 민병으로 싸웠고 가장 참혹한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고향에 돌아왔다가 B-52 폭격 때문에 죽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취재하며 우울해진 마음으로 시내로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분보훼를 먹었다. 매콤한 국물이 착 가라앉은 기분을 어느 정도 전환해주고 든든한 고명과 진한 국물이 마음의 허기까지 채워주었기 때문이리라. 한 그릇 정신없이 비우고 나면 그제서야 다음 할 일이 떠오르거나 숙소로 갈 기운이 나곤 했다. 베트남전쟁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장이었던 중부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국수가 분보훼라는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힘을 내기’에 이것보다 어울리는 국수는 잘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훼는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베트남을 찾는 여행자들이 꼭 한 번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베트남 최후의 응우옌 왕조가 그 권위를 떨치기 위해 건축한 궁전은 중국의 자금성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와서 과거 응우옌 왕조 시절 발달한 화려한 궁중 코스 요리를 즐긴다. 스프링 롤을 공작새 모양으로 장식한 넴콩, 연꽃 열매와 밥을 연잎으로 싼 껌센, 꽃 모양으로 빚은 콩떡인 반짜이까이 등 고급 재료를 이용해 화려하게 담아낸 코스 요리가 입맛을 돋운다. 하지만 모든 외세의 침략을 이겨내고 아시아의 새로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기운을 느껴보려면 구시가지를 나와 동바시장으로 가보자. 그리고 시장 노점에서 더운 국물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말아낸 분보훼 한 그릇에 고추 양념을 넉넉히 쳐서 한입 가득 먹어보시라. 프랑스건 일본이건 미국이건 가리지 않고 대들었던 독한 사람들의 매운맛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메콩 강가에 자리 잡고 논을 매며 살아온 바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깊은 온기가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무슨 걱정을 가지고 있든 다시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글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