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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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의 컬렉션을 선보여온 모로소. 장인 정신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태생의 브랜드 모로소를 만났다.

↑ 크바드랏과 협업한 원단과 제품을 선보인 ‘회전하는 방’ 쇼룸.

모로소는 모던 디자인의 한 흐름을 이끌어온 이탈리아의 브랜드다. 1952년부터 이탈리아 우디네에서 디자이너들과 함께 럭셔리한 소파와 의자를 만들기 시작해 오늘날 모로소 가족의 2세대들이 브랜드를 이끌고 있다. CEO인 로베르토와 아트 디렉터인 파트리샤가 그들이다. 1974년 소파 아메리카와 1986년 마시모 요사 기니의 다이내믹 컬렉션 Dynamic Collection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로소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로소는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 지배적으로 퍼져 있던 ‘무언가를 하고, 그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이란 철학을 계승해왔다. 특히 수공예나 재단 방식 등 장인의 손길과 기술력을 결합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왔기 때문에 모로소의 제품을 보면 공장에 찍어낸 것과는 다른 감성과 디테일이 살아 있으면서도 실용적이다. 아메리카와 다이내믹 컬렉션 이후 안토니오 치테리오의 소파 리치 Rich, 론 아라드의 소파 타미기 Tamigi 그리고 모로소에 큰 성공을 안겨준 마크 뉴슨의 의자 글루온 Gluon 등을 출시하며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굳건히 다져 나갔다.

약 70명의 장인들과 협업을 하는 모로소의 제품은 한마디로 강렬하다. 제품이 지닌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모로소는 늘 진짜 예술, 진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또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이 요소 간의 결합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모로소는 장인들, 재단사들과 함께 섬세한 손길로 제품 구석구석을 살핀다. 때문에 모로소의 제품은 고품질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모로소는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알레산드라 Alessandra’, 론 아라드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Victoria And Albert’ 등 모로소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컬렉션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르퀴올라는 2002년 모로소를 통해 의자 ‘피오르드 Fjord’를 발표하면서 불세출의 색채 감각을 인정받았다.

벌어진 꽃잎을 형상화한 ‘안티보디 Antibodi’ 시리즈와 올록볼록한 시트 부분이 재미있는 ‘비크니트 Biknit’, 열대의 아름다움이 떠오르는 데이 베드 ‘트로피컬 벤치 Tropical Bench’ 등 특유의 강렬한 컬러 매치가 돋보이는 가구들이 모로소를 대표한다. 모로소가 중시하는 디테일과 장인 정신이 반영된 디자인을 보여준 우르퀴올라는 소파에 컬러를 더하고, 양감을 살려서 쉬는 용도 이상의 가치를 보여줬다. 특히 작년에는 밀라노 모로소 부티크 쇼룸에서 크바드랏과 협업한 원단과 모로소의 신제품을 ‘회전하는 방 The Revolving Room’ 컨셉트로 선보여 주목받았다.

모로소는 패션 브랜드 디젤과 함께 리빙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디젤과 모로소는 찰떡궁합이다. 언더그라운드의 느낌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디젤 컬렉션은 테이블, 소파, 캐비닛 등 다양한 군의 리빙 컬렉션을 전개하며 그들의 모토대로 성공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표현 방식에 목말랐던 디자이너라면 탐날 수밖에 없는 브랜드 모로소. 모로소는 앞으로도 다른 브랜드의 대안인 동시에 브랜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 나갈 것이다.

1 로스 러브그로그의 ‘슈퍼 내추럴’. 2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알레산드라’ 암체어. 3 마크 뉴슨의 ‘글루온’.

1 유기적인 디자인의 ‘V&B’. 2 모듈로 구성할 수 있는 ‘돌로레즈’ 소파. 3 패턴대로 모양을 낸 ‘번트 두들’ 테이블. 4 2014 디젤 컬렉션.

1 아웃도어 라운지 체어 ‘섀도위’. 2 벤자민 휴버트의 ‘탈마’. 3 활짝 핀 꽃 모양의 ‘안티보디’. 4 가죽 소재의 ‘리치’ 암체어.

에디터 신진수│자료협조 모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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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간다

자유분방한 딸의 집과 부모님의 한국적인 집이 위아래로 머무는 곳. 건물 전체를 내 집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세입자를 배려한 넉넉한 마음이 엿보이는 조은사랑채를 찾았다.

↑ 묵직하고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동숭동 조은사랑채. 두껍고 무거운 문이 내부를 더욱 아늑하게 만든다. 조은사랑채는 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

↑ 큐레이터인 딸의 방. 창가에 모듈형 소파를 두어 배치가 자유롭다. 쿠션은 직접 천을 떼서 만든 것.

↑ 나무 패널을 켜켜이 쌓아 벽처럼 만든 작업실 쪽 화장실. 문을 닫으면 옷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로구와 성북구를 가르는 낙산의 풍경과 복닥거리는 도시의 대조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대학로. 여러 번 이곳을 지나다녔지만 주택가가 있을 줄은 몰랐다. 바로 뒤에 낙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아래로는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동숭동 언덕에 위치한 조은사랑채를 만났을 때 생경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은사랑채는 총 4개 층의 다세대주택이다. 공동주택으로 불리길 원하는 이곳은 밖에서 보면 한 가족이 사는 집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건축주인 가족은 3층과 4층에 살고 있고, 나머지 층은 임대주택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게 총 8가구가 보금자리를 꾸린 하얀 집이다.
2010년 파리에서 열렸던 이상 탄생 100주년 전시에서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로 연을 맺은 건축주와 건축가 박창현 소장은 뜻이 잘 맞았기에 이런 건물 즉, 건물 전체를 내 집처럼 생각할 수 있는 주택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건물이라 하면 건물 전체를 내 집처럼 생각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30년 정도 이 자리에 있던 단독주택에서 살았어요. 집이 낡아서 이왕 다시 짓는 김에 우리 가족도 살고 다른 가족도 임대 형태로 들어와 살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렸죠. 에이라운드 박창현 소장님과 공동주택에 관한 뜻이 맞았어요. 몇 년 계약하고 살다가 나가버리는 일반적인 다세대주택과는 조금 다른 접근이었죠.” 삭막한 빌라 입구와는 다르게 이곳은 육중한 회전 출입문이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분리해주어 안쪽 공간이 더욱 아늑하다.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고 해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건물 내부의 느낌이 달라지는 내부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현관문 앞의 공간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식물이나 자전거 등으로 소박하게 꾸밀 수 있다는 점 역시 그랬다.

↑ 자유로운 분위기가 돋보이는 딸의 작업실 공간. 철제 책장에 꽂혀 있는 책과 CD가 멋스럽다. 디자인 의자로 포인트를 준 공간.

1 주황색 바체어가 놓인 딸의 주방 공간. 주방 옆쪽은 좌식형 거실이 있다. 2 딸의 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식 욕실. 작은 테라스에 식물을 옹기종기 디스플레이해 이색적인 욕실 공간이 됐다.

프라이빗 룸 Private Room으로 표시된 3층과 4층은 큐레이터인 딸과 부모님이 사는 공간이다. 딸의 공간은 현관문에 섰을 때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다. 오른쪽은 작업 공간으로, ㄴ자로 낸 창문에는 낙산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예전부터 사용하던 널찍한 테이블과 벤치, CD와 책이 빼곡히 꽂힌 철제 책장을 놓았고, 모듈형으로 이리저리 맞추면서 사용할 수 있는 소파 위는 동대문에서 원단을 떼어다가 만든 쿠션과 방석으로 장식했다. 운치가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작업 공간이다. 반대편은 온전히 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작은 주방과 좌식 코너, 그리고 이 집의 백미인 욕실이 있다. 작업 공간 쪽과 주거 공간의 욕실 모두 독특하다. 작업 공간 쪽 욕실은 나무를 켜켜이 쌓아 벽을 만들어 문을 닫아두면 옷장이나 또 다른 방으로 착각할 법하고, 주거 공간 쪽 욕실은 데크를 깔고 하얀색 욕조를 두어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 건식 욕실로 완성했다. 데크에는 크고 작은 식물 화분을 둬 욕실이라기보단 예쁜 파우더룸처럼 보인다. 건물 입구의 문고리처럼 욕실 문고리도 가죽 마감인 이유가 궁금했다. “보이는 대로의 느낌이 있어요. 철은 차가운 느낌, 가죽은 따뜻한 느낌처럼요. 만졌을 때 느껴지는 촉각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손에서 느껴지는 촉감이요. 손에 닿는 가죽 문고리의 느낌이 집에 대한 인상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처럼 조은사랑채는 디테일 하나까지도 내가 사는 집이라는 느낌을 준다.

1 어머니가 취미로 만드는 한국 전통 목가구와 즐겨 켜시는 가야금. 2 한식 스타일로 꾸민 부모님의 침실.

↑ 좌식 생활을 즐기는 가족이지만 주방만큼은 서구식 가구를 두었다. 실내에도 식물이 빠지지 않는다.

↑ 부모님 집의 현관문을 열면 집 가운데에 놓인 중정이 보인다. 사계절 내내 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3층의 부모님 집은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현관문을 열면 유리로 마감한 작은 중정을 통해 보이는 낙산의 풍경에 먼저 감탄하게 된다. 가야금을 켜고, 한국 전통 목가구를 취미로 배우고 있는 어머니의 취향을 반영한 듯 부모님 집은 한국적인 요소를 반영했다. 특히 부부 침실은 한식 바닥과 천장, 창호지를 바른 격자문 등 모던하고 자유로운 스타일인 딸의 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침실 앞에는 작은 소파를 두어 응접 공간을 만들었고, 좌식 생활을 즐기는 부모님을 위해 거실에는 가구를 두지 않았다. 대신 부엌 쪽 식탁과 주방 가구 등은 요리를 하기에 편리한 서구식이다. 집 안의 중심인 중정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어머니가 직접 만든 작은 가구들의 그림자가 어우러져 고즈넉한 집. 이전의 단독주택에 비해 내부 면적이 좁아져서 수납 문제 때문에 조금 버거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부모님도 새로운 집에 점점 적응을 하고 계신다고. 중정에는 직사각형 작은 연못을 만들어 수생식물도 기르는 재미도 있다. 함께 사는 이들을 배려한 공동주택은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집이 되었다. 획일적인 다세대주택의 모습에서 벗어나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공동주택을 꿈꿨던 건축가와 이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건물주의 만남은 이처럼 성공적이었다.

에디터 신진수│포토그래퍼 박상국│ 설계 및 시공 에이라운드 www.aroundarchitec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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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고친 집

내 손으로 고친 집

내 손으로 고친 집

버려진 가구와 소품, 폐목재 등에 약간의 솜씨를 더해 쓸모 있는 제품으로 만드는 조영진 씨.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남부럽지 않게 집을 꾸밀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집을 <메종>이 찾아갔다.

거실 “거실이 작고 주방과 바로 붙어 있어서 식탁을 놓을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소파 크기에 맞춰 식탁을 겸할 수 있는 테이블을 만들었어요. 철제 프레임에 키엔호에서 구입한 타일을 사용했습니다.”
서재 “피아노 연주자인 아내의 연습실이자 서재로 쓰는 방입니다. 고급 자재이지만 값이 비교적 합리적인 가문비나무로 가벽을 붙이고 폐목재, MDF로 책장을 만들었는데 자연적으로 습도 조절을 해주기 때문에 늘 쾌적하죠.” CCM 가수인 조영진 씨는 분당에 있는 복층 오피스텔에서 아내와 함께 둘이 살다가 곧 태어날 첫 아이를 위해 용인 처인구에 위치한 작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전문가 수준의 목공 실력을 갖춘 그는 66㎡ 의 아담한 공간을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 나섰다. 아직 충분히 쓸 만한데도 버려진 가구와 나무, 유리를 재활용해 부엌장을 만들고 방 사이즈에 알맞게 옷장과 책장 등을 짜 넣었다. 또 MDF 합판과 라왕 각재, 망입 유리로 방문을 만들어 아늑한 분위기로 꾸몄다. 실내에는 발림성이 좋은 친환경 페인트 ‘던 에드워드’ 제품을 사용했는데 낡은 벽지 위에는 벨벳광, 나무 몰딩에는 무광 페인트를 칠해 같은 흰색이어도 각 재료가 가진 질감을 살렸다. “처음부터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죠. 생각처럼 안 될 때도 많았지만 집에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고 직접 만들어서 채워 나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어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주방 “밥솥 등 주방 가전과 소품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수납장을 만들었습니다. 이사 오기 전 사람이 놓고 간 아일랜드 바 위에 장을 짜 맞춰 올렸어요. 부엌을 가리기 위한 파티션 역할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안방. 왼쪽 “침대 프레임은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 원목을 선택하고 자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간단한 구조로 제작했어요. 헤드보드는 을지로에서 스펀지와 합판, 패브릭을 구입해서 만들었고 비용은 5만원 정도 들었습니다.”안방. 오른쪽 “아내와 아기를 위한 수유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안락한 암체어를 놓았습니다. 천장에는 고래 인형이 있는 조명을 달았고 한쪽 벽에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으로 꾸몄어요.”
에디터 최고은│포토그래퍼 안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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