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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우리 선조들의 여름나기에는 삶의 지혜와 미감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자연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과 물, 차가운 촉감을 머금은 기물을 가까이하며 계절을 누렸던 것. 무더위를 견디는 방식마저 아름다웠던 여름 풍류의 미학을 소개한다.

손 안의 풍류

조선 사대부들에겐 부채는 단순히 더위를 식히는 도구가 아니었다. 품격과 취향을 조용히 드러내며 자신의 안목을 소리 없이 대변하는, 일종의 ‘시그니처 액세서리’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만든 대모부채는 탐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기물이다. 파초를 닮아 시원하게 뻗은 실루엣, 빛을 머금으면 반투명하게 속살을 드러내는 호박빛 색감, 그리고 인위적으로는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얼룩무늬까지.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을 그대로 품은 공예품이다. 대모는 대개 안경테나 갓끈 장식처럼 작은 부분에만 쓰였지만, ‘사로 아틀리에’에서 만난 이 부채는 부채면과 손잡이 전체를 대모로 장식한 보기 드문 예다. 조선시대 중국을 비롯한 이역 땅에서 건너온 최고급 수입품으로 추정되는 이 부채에는 더위를 식히는 기능을 넘어선 미감과 장인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비를 건너는 지혜

뜨거운 볕만큼이나 끈적하고 긴 장마를 견뎌야 하는 계절. 아스팔트 포장 도로도, 고성능 방수 운동화도 없던 시절의 흙길은 지금보다 훨씬 성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들은 불쾌함에 굴복하는 대신, 발을 땅에서 한 뼘쯤 들어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통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나막신이다. 밑창 아래 굳건하게 세운 두 개의 굽 덕분에, 진흙길이나 빗물이 고인 골목도 성큼성큼 건널 수 있었다. 가죽 대신 나무라는 소재를 택한 것 역시 여름을 대하는 영리한 태도다. 물에 젖어도 쉽게 닦아낼 수 있고, 그저 그늘진 바람에 슬쩍 말려두면 언제든 제 모습을 찾았으니까. ‘고복희 소품상점’에서 만난 남성용 나막신은 투박하면서도 당당한 조형미, 그리고 선 굵은 큼지막한 사이즈가 묘한 압도감을 준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걸음걸이의 호쾌함을 잃지 않던 사내의 뒷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 기물이다.

평상 위의 오수

등등거리가 옷 속에 숨겨진 기능적 구조물이라면, 모시 저고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가장 우아한 냉감 소재다. ‘소고니고요’의 간살 평상 위에 걸린 모시 저고리. 모시풀 줄기에서 얻은 섬유로 짠 성긴 조직은 바람을 통과시키며 시각적으로도 서늘한 미감을 완성한다. 그 옆에 놓인 죽부인은 살결에 닿는 대나무 고유의 차가운 성질을 극대화한 생활용품이다. 잠을 청할 때 품에 안는 이 텅빈 원통 구조는 몸과 이불 사이에 숨통을 틔워, 체열을 밖으로 빼내는 영리한 휴식의 도구였다. 초배기 역시 흥미롭다. 본래 도시락 바구니이지만 한낮의 오수가 쏟아질 때면 기꺼이 목침으로 변신한다. 하나의 물건을 다채롭게 활용한 선조들의 유연한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바람이 드나드는 집

한옥의 여름은 문을 활짝 여는 데서 시작된다. 들어열개문을 위로 높이 들어올려 처마 끝에 매다는 순간, 방과 마당은 하나가 되고 바람은 대청을 지나 마루 끝까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간다. 이 대담한 공간의 개방을 가능케 하는 숨은 주역이 바로 작은 철물 막대인 ‘들쇠’다. 거대한 문을 천장에 고정해 바람 길을 열어주는 이 묵직한 하드웨어는, 단순한 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집의 인상을 결정짓는 얼굴이었다. ‘호박포크아트갤러리’에서 마주한 들쇠들은 쇠를 달궈 두드려 만든 장인의 단단한 손맛과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호랑이, 박쥐, 박 모양 등 복을 기원하는 길상 문양을 섬세하게 새겨넣은 들쇠는 기능적 역할을 넘어 한옥의 여름 풍경을 완성하는 격조 높은 장식품이다.

바람을 입다

여름 한복의 가장 큰 적은 더위보다 습기였다. 아무리 얇은 옷이라도 땀에 젖으면 금세 몸에 달라붙는다. 선조들은 옷을 벗어 던지는 대신, 바람이 지날 틈을 만들었다. 등나무 줄기를 가늘게 쪼개 정교하게 엮어낸 조끼인 등등거리를 저고리 안에 받쳐 입는 것이다. 이 서늘한 격자 구조물은 등과 옷 사이에 일정한 공간을 만들어 공기가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다. 바람은 그 틈을 따라 지나고, 땀은 한결 빠르게 마른다. 시원함이란 차가운 것이 아니라, 바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은 듯. ‘고복희 소품상점’에 함께 놓인 갈모 역시 눈길을 끈다. 갑작스럽게 빗방울이 떨어지면 품속에서 꺼내 펼쳐 갓 위에 얹어 쓰던 접이식 우모(雨帽)다. 한지에 기름을 먹여 방수성을 높인 유지(油紙)공예의 정수가 담겨 있다. 여름을 향한 선조들의 대책은 이토록 단순하고 영리하며, 우아했다.

백자의 서늘한 결

맹렬한 날에는 시각적인 온도를 낮춰주는 맑은 그릇에 먼저 눈이 가기 마련이다. 조선 선조들이 여름 식탁에서 백자를 귀하게 여긴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령토를 빚어 1300℃ 안팎의 고온에서 구워낸 백자는 잡색 없는 정갈한 흰빛으로 공간을 단숨에 청량하게 되돌려놓는다. ‘레반다빌라’에서 고른 백자 그릇처럼 미세하게 푸른 기운이 감도는 청백색 그릇은 시각적으로 극강의 서늘함을 선사한다. 절제된 형태와 담백한 청백의 색조는 그 위에 담긴 음식의 계절감을 더욱 또렷하게 부각한다. 널찍한 백자 사발에는 제철 과일을 소담하게 얹고, 단정한 작은 잔에는 맑은 차 한 잔을 올려 여름의 끝자락을 차분히 음미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