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이었다면 해외에서 여름을 만끽하기 위해 하루하루 D-day를 세어가며 남은 시간을 버텨냈을 텐데,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비슷한 마음인지 인터넷에서건 유튜브에서건 여름을 소재로 한 영화 추천 리스트가 업로드되는 걸 종종 목격했다. 그러니 슬그머니 나도 직접 추천을 해보려고 한다. 트란 안 훙 감독의 1994년 작 <그린 파파야 향기 The Scent of Green Papaya>다. 열 살 남짓 된 소녀 무이는 어느 부잣집에 식모로 들어가게 된다. 성인이 될 무렵까지 이 집에서의 생활을 이어가던 무이지만, 가족을 수시로 등지는 남편의 빈번한 부재와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어가면서 여주인은 무이를 큰 아들의 친구인 쿠옌에게 보내기로 결정한다. 함께 매일을 보내게 된 무이는 쿠옌의 옆을 조용히 맴돌며 남몰래 그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린 파파야 향기>는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서사는 없지만,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는 캐릭터들이 그 허전함을 대신한다. 딸처럼 여기던 무이를 떠나보내며 조심스레 옷가지와 장신구를 건네던 여주인, 남편의 죽음에 허우적대던 여주인을 말없이 위로하는 그녀의 둘째 아들처럼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는 이들의 모습은 못내 성숙한 관계의 면면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를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트 필름이라는 착각이 들 만큼 미학적인 영상미다. 사계가 여름 같은 열대성 기후의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만큼, 독특한 패턴과 컬러를 내세운 이국적인 인테리어와 오브제, 수시로 보이는 파파야 같은 우거진 열대 식물과 과일, 균형 잡힌 환상적인 화면 비율을 자랑하는 미장센 등 눈을 즐겁게 하는 요소가 다수 포진해 있어 매 프레임마다 감상할 포인트가 무궁무진하다. 이를 증명하듯 그 해 당당히 칸 영화제 황금 촬영상을 거머쥐기도 한 만큼 새로운 여름 영화를 찾고 있다면 꼭 한 번쯤 감상해보길. 참, 중간 중간 보이는 배우들의 살짝 어색한 동작은 애교로 봐주는 걸로.
예년이었다면 해외에서 여름을 만끽하기 위해 하루하루 D-day를 세어가며 남은 시간을 버텨냈을 텐데,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비슷한 마음인지 인터넷에서건 유튜브에서건 여름을 소재로 한 영화 추천 리스트가 업로드되는 걸 종종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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