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잇는 시간, 이스트스모크 조희진 작가

흙을 잇는 시간, 이스트스모크 조희진 작가

흙을 잇는 시간, 이스트스모크 조희진 작가

점 하나씩 흙을 붙이며, 형태보다 시간을 쌓아가는 도예가. 이스트스모크 조희진 작가는 이 느린 과정을 통해 매일의 감정을 기록한다.

모자이크 연작부터 최근 선보인 평면 작업까지, 그간의 작품들을 모아둔 작업실 선반.

점 하나, 점 하나. 알알이 흙을 이어 붙이는 손끝에서 하루하루가 겹겹이 쌓인다. 도예 작업실 이스트스모크를 운영하는 조희진 작가의 작업은 형태보다 과정을 향한다. 도자기라는 전통적인 매체를 다루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흙의 물성도 기능성도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매일 다르고, 순간순간의 감정이 다르잖아요. 그게 모여서 하나를 이루고 계속 변화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름을 흙 위에 새긴다. 점을 붙이고, 또 하나의 점을 더하며 그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 손을 움직인다. 매일을 기록하듯 작업하고, 그 안에 담긴마음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 흙은 그렇게 하루를 담는 그릇이 된다. 이어 붙이는 행위는 명상에 가깝다. 작가는 작업 도중 쓰는 흙물이나 접착제를 쓰지 않고, 흙 본연의 수분만으로 점을 이어 붙인다. 그래서 더 쉽게 갈라지고, 실패하고, 매번 처음처럼 다시 시작해야 한다. “흙 상태도 매일매일 다르거든요. 그래서 늘 낯선 마음으로, 초심으로 작업하게 돼요.” 도공이라는 이름보다는, 흙과 대화하는 사람, 혹은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고, 형태보다 감정의 연속성에 귀를 기울인다. 찻잔, 작은 접시 같은 일상 기물을 주로 다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어 붙이는 작업은 한 번에 완성해야 하니까, 큰 작업은 너무 무리가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싶은 마음이 들었고요. 작은 작업이 제 리듬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는 더 잘 맞더라고요.”

하나하나 흙 점을 이어 붙여 손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갤러리 어피스어피스에서 선보인 평면 작업 ‘하나로부터’ 에디션.

그의 작업에는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탐구도 이어진다. 갤러리 어피스어피스와 함께한 개인전 <있는 그대로 보기: 평면에 누워>에서는 점들을 바닥에 눕히듯 붙이며 평면 작업을 선보였다. “입체 작업은 흙을 붙일 때 눈으로 먼저 가늠하고 손이 따라가야 해요. 그런데 평면에서는 오히려 손이 먼저 움직이더라고요.” 통제가 아닌 우연에서 비롯된 자유. 점과 점은 서로 기대지 않고도 연결되며,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자연스레 생겨났다. “가마에서 꺼냈을 때 연결이 끊어진 부분들을 보고 처음엔 불편했어요. 근데 다시 보니까 그게 하나의 조각이더라고요. 형태를 만들 때 늘 생각해요. 어떤 영역이 나뉘어야, 또 합해질 수 있다고. 그게 삶 같기도 해요.”

섬세한 도자 작업을 선보이는 조희진 작가.

관람객이 흙을 만져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든 바둑판과 바둑돌.

작은 찻잔부터 유기적 형태의 커다란 오브제까지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작업을 공간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조화로운 쓰임의 여백이 되기 바란다. 그 바람은 브랜드 협업에서도 이어진다. 논픽션, 로파서울 등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늘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지닌 기물들을 만들어왔다. 특히 논픽션과의 협업은 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업실이 있는 경복궁 근처를 자주 산책하며, 돌담과 기와 같은 건축 요소에서 수수한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 마음으로 기와 형태의 플레이트를 만들었다. 겹겹이 쌓이며 서로를 지탱하는 기와에서 영감을 받은 형태는, 곡선을 그리며 살짝 올라간 모서리로 완성됐다. 재료는 백자, 청자, 흑토 등 다양한 흙을 사용했고, 투명 유약을 발라 흙의 고유한 색과 감촉을 살렸다. 최근에는 땅에 대한 생각이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매일 걷는 땅에서 채취된 흙으로 작업한다는 사실이 특별하다고 말한다. “걷는 행위에서 그림이 보였어요. 갈라짐, 흔적 같은 것이요. 그걸 유약으로 그림처럼 표현해보고 싶어요. 유약을 바른 다음, 닦아내서 틈 사이에만 남기면 마치 그림 같거든요.” 흙이 지닌 파동과 리듬을 통해 그는 또 하나의 풍경을 구성한다. “다르게 보이지만, 제 작업이든 자연이든 결국 본질은 같다고 생각해요.” 연결, 균형, 그리고 파동. 이스트스모크의 작업은 흙이라는 가장 오래된 재료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풍경을 포착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점 하나하나를 이어가며 매일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SPECIAL GIFT
조희진 작가에게 증정한 설화수 윤조에센스 6세대와 퍼펙팅 쿠션. 강한 자외선과 높은 습도에도 산뜻한 메이크업을 유지해주는 윤빛 시너지 듀오로, 얇고 완벽한 커버력의 퍼펙팅 쿠션과 윤조에센스를 함께 사용하면 자연스럽고 건강한 윤기를 더할 수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퍼펙팅 쿠션 15g 5만9000원, 윤조에센스 90mL 14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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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건축이 머무는 호텔 라 퐁다시옹

예술과 건축이 머무는 호텔 라 퐁다시옹

예술과 건축이 머무는 호텔 라 퐁다시옹

예술가들의 거리, 파리 17구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럭셔리 호텔 라 퐁다시옹이 문을 열었다.

내추럴한 원목 가구와 예술 작품이 어우러진 이그제큐티브 룸 © Romain Ricard

파리는 각 구마다 고유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17구는 독특하게도 동쪽과 서쪽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다른 곳으로 유명하다. 테른과 몽소 공원이 있는 서쪽은 1800년대부터 부유층이 거주하던 고급 주택가로, 우아한 주거지가 밀집해 있다. 반면, 바티뇰 거리가 있는 동쪽은 젊은 예술가와 보헤미안들이 모이던 활기찬 동네로,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다.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이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기 전, 바티뇰 거리 34번지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 Guerbois에 모여 예술을 논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이들은 그때 ‘바티뇰파’로 불리며 그들만의 그룹전을 이어가다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역사적인 지역이 바로 17구 동쪽이다.

현대적인 스틸 골조와 유리 파사드가 돋보이는 외관 © Salem Mostefaoui for PCA-Stream

우아한 라운지 가구와 바가 있는 프리 스프릿 스위트 © Romain Ricard

17구는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몽마르트르 지역처럼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지역과 달리 파리의 여유를 느끼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에 갈리아 그룹이 지난 4월 몽소 공원과 바티뇰 사이에 약 1만㎡ 규모의 대형 호텔 라 퐁다시옹 La Fondation을 열자 17구를 찾을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 이 호텔은 1960년대 지어진 빌딩과 주차장이 있던 자리에, PCA-STREAM 건축사무소의 설계로 새롭게 재탄생한 하이브리드 공간이다. PCA-STREAM는 샹젤리제의 8차선 대로를 대폭 줄이고 녹지를 확보하는 프로젝트 등 파리를 친환경 도시로 변모시키는 주요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라 퐁다시옹 호텔 역시 이들의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으로서, 지속 가능성과 도시 미학을 겸비하고 있다.

높은 층고와 파리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 라 퐁다시옹. © Romain Ricard

1층에 위치한 브라세리 라 베이스에서는 소박한 전통 프랑스 레시피로 완성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Romain Ricard

호텔은 5성급 규모로, 레스토랑 2곳과 루프톱, 오피스 공간, 클라이밍 월,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다. 파리에서 가장 혁신적인 호텔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실내 인테리어는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 ‘로만 앤 윌리엄스 Roman and Williams’의 최고 디자이너 로빈 스탠데퍼와 스테판 알레쉬가 맡았다. 뉴욕 에이스 호텔로 이름을 알린 두 디자이너는 예술적 감각과 견고함이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이번 프로젝트로 다시 한 번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호텔에는 3개의 스위트룸을 포함해 총 58개 객실이 있다. 각각의 객실은 모두 다른 예술적 콘셉트를 담고 있어, 머무는 동안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1층 브라세리에서는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를, 8층 레스토랑에서는 현대적인 프랑스 요리와 함께 파리 시내를 전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호텔은 단순한 화려함을 넘어, 방문하는 모든이가 조화롭게 소통하는 공간을 지향한다.일상의 번잡함을 잊고 편안한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ADD 40 Rue Legendre, 75017 Paris WEB en.lafondationhotel.com INSTAGRAM @lafondation.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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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관(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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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것들의 전시

숨겨진 것들의 전시

숨겨진 것들의 전시

관람객의 시선이 닿지 않던 박물관의 수장고가 이제는 전시의 중심으로 나섰다.
관람의 패러다임을 재편한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이야기.

총 4개 층으로 이루어진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드넓은 전경. © Hufton+Crow

웨스톤 컬렉션 홀의 중심에 자리한 로빈 후드 가든의 실제 건축 단면. © David Parry

V&A의 팀 리브 부회장 겸 최고 운영 책임자. © David Parry

미술관의 전시장이 연극 무대라면, 수장고는 백스테이지다. 관객들의 시선이 닿지 않지만, 단 하나의 완벽하게 큐레이션된 무대를 만들기 위한 수백, 수천 가지의 소품과 노고가 숨어 있는 곳. 백스테이지가 관객들에게 평생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듯 수장고 또한 마찬가지다. 전시가 아닌 보관의 영역을 담당하는 수장고 자체가 무대가 되어 관객 앞으로 나설 일은 없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이 지난 5월 31일,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를 전면 개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0년간의 준비 끝에 완성된 세계적인 건축가 그룹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 Diller Scorfidio + Renfro가 설계한 곳이다. 총 1만6000㎡ 규모에 걸친 4개 층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큐레이션이나 보관 분류 체계에 따르지 않고, 관람객의 호기심에 따라 작품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전시 물품 또한 다양하다. 25만 점 이상의 오브젝트, 약 35만 권의 도서, 1000개 이상의 아카이브가 소장되어 있다. 고대 로마 유물부터 세계 최대 크기의 피카소 작품, 빈티지 밴드의 티셔츠, 아방가르드 패션, 오트 쿠튀르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범주의 컬렉션을 갖췄다. V&A의 팀 리브 Tim Reeve 부회장의 말이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자 V&A에 대한 백스테이지 통행권으로서, 국가 소장품에 대한 접근 방식을 지금껏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로 혁신한다. 전 세계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돌보는 것부터 새로운 연구까지,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 전시에 있어 더 이상의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 V&A는 그 한계를 넘는 새로운 방식의 경험을 제안한 셈이다.

수장고 겸 창고형 갤러리를 표방하는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아이덴티티를 엿볼 수 있는 공간. © Hufton+Crow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보존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다목적 보존 스튜디오.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중앙 전시 공간인 웨스톤 컬렉션 홀은 얼핏 보면 박물관보다는 창고형 쇼핑몰에 가까운 공간이다. 하지만 그 중심을 구성한 6점의 대형 오브젝트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건축 혹은 예술 유산이다. 미국 근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의 1930년대 카우프만 Kaufmann 사무실, 현대 주방의 모태가 된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 Margarete Schütte-Lihotzky의 프랑크 푸르트 주방, 브루탈리즘 건축의 대표 격인 로빈 후드 가든의 실체 건축 단면과 10여 년 만에 다시 대중 앞에 공개된 세계 최대 피카소 작품 <레 트랭 블뢰>까지. 이들은 지역 커뮤니티, 창작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된 영상, 출판물, 예술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약 100개의 소규모 큐레이션 전시가 배치되어 있다. 고대 불교 조각부터 토머스 헤더윅 Thomas Heatherwick의 2012 런던 올림픽 성화대, 빈티지 축구 유니폼 등이 선반이나 구조물의 측면과 틈새에 설치되어 관람객은 마음 가는대로, 길을 잃듯 곳곳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피카소 작품 <르 트랭 블뢰>가 전시되어 있다. © David Parry, The estate of Pablo Picasso

오더 언 오브젝트를 통해 보관된 소장품들을 볼 수 있다. 사진 속 작품은 루 리드 Lou Reed 콘서트 포스터와 더 스페셜스 The Specials 포스터. © Bet Bettencourt

여기까지 들으면 그저 창고형 갤러리를 표방한 공간이 아닌가 싶겠지만, 주문형 전시 프로그램 ‘오더 언 오브젝트 Order an Object’ 에 대해 듣는다면 이 공간이 왜 ‘수장고’라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더언 오브젝트는 그중에서도 전시되지 않은, 즉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소장품들을 관람객이 직접 선택해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다. 고대 이집트 유물, 로마 시대 프레스코화, 1930~60년대의 웨딩드레스까지. 폭 넓은 소장품이 대상이며, 지금까지 가장 많은 호출을 받은 것은 1954년 제작된 발렌시아가의 이브닝 드레스다. 전시된 작품만 감상할 수 있었던 기존 박물관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관람객들이 능동적으로, 보고 싶은 작품을 직접 골라서 요청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말은 단순한 관람 권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되지 못 할 뻔했던 것들,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보관과 전시 사이의 경계를 흐린 이 공간은 박물관이라는 구조 자체를 재구성한 거대한 실험장이자 일종의 제안이다. 그간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무대와 백스테이지의 구분을 허물고, 관람의 새로운 시작점을 ‘수장고’로 끌어온 것, 아주 오래전 만들어졌지만 존재 자체가 희미해졌던 이름을 불러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이 공간에서 가능한 가장 깊은 감상의 형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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