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평면, 비슷한 컬러, 비슷한 가구. 한국의 아파트라는 주거형태가 가진 구조적 한계 탓일까?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SNS에서 쏟아진다. 그래서 ‘아파트 인테리어’라는 말이 조금은 진부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조건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팀이 있다. 바로 ‘오더메이드 건축사 사무소 ordermade architects’다.
내 아파트의 ‘남다름’을 본다는 것
“화이트 톤 아파트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동대표 석치환 소장은 시작부터 단호했다. 그는 아파트의 구조나 형태를 과감히 허물지 않았다. 대신 벽을 감싼 대리석 타일을 걷어내고 바닥은 리놀륨으로 덮었다. 공간에는 강렬한 색감을 더하고 원목과 스틸 같은 의외의 소재를 배치했다. 그렇게 생겨난 긴장감은 전형적인 아파트와는 다른, 전시장 같은 집을 만들어냈다.

©wonsirim studio
오더메이드라는 이름처럼 이들의 방식은 ‘순서’를 세우는 데 있다. 건축은 삶의 질서를 디자인하는 일이자,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질서 그 자체라는 것. 이번 프로젝트 역시 ‘남다름’을 어떻게 공간에 담아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ordermade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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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가의 집, 물건과 취향이 사는 방식
이 집의 주인은 그림을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며 수많은 오브제를 모아온 전형적인 컬렉터다. 인형부터 핸드벨, 작은 그림과 고가구까지, 집 안에는 빈 벽이 없을 정도로 물건이 가득했다. 문제는 ‘모든 물건이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각각의 소장품이 다 중요하다 보니 한 공간에 모였을 때 오히려 시선이 분산되곤 했다.
아파트의 구조상 벽을 허물거나 크게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오더메이드는 발상의 전환을 택했다. 벽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가구를 움직이면 된다는 것. 주인의 수집품 크기와 쓰임에 맞춰 제작한 맞춤 가구들이 집 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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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가 많아서 가벽을 허물 수 없었어요. 원하는 공간을 구현하려고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힘들었습니다. 대신 집 안 분위기를 바꿔줄 실용적이고 컬러감 있는 가구를 제작했죠.”
하늘빛 패널에 도트 타공을 더한 벽 전체 빌트인은 이 집의 중심이 됐다. TV를 중앙에 배치하고 필요할 땐 문을 닫아 감췄다. 각 수납 칸은 소장품 크기에 맞춰 설계돼 인형과 핸드벨이 전시장 오브제처럼 놓였다.

©wonsirim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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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 After
거실
리모델링 전의 거실은 한국 아파트의 정석 같았다. 가죽 소파, 원목 흔들의자, 꽃무늬 커튼, 대형 TV, 공기청정기까지. 안정감은 있었지만 다양한 가구와 오브제가 얽혀 다소 복잡한 인상이었다.
지금의 거실은 맞춤 가구가 벽을 장식하며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빌트인이 물건을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주인의 취향을 편안하게 담아낸다.
주방 & 다이닝
리모델링 전의 주방은 ㄷ자형 조리대에 상·하부장이 빽빽이 들어찬 구조. 실용적이지만 시각적으로는 답답했다.
리모델링 이후, 주방은 과감한 색 배합으로 새롭게 정의됐다. 하부장은 강렬한 레드, 상부장은 레몬 톤 베이지로 경쾌하게. 조리 공간은 콤팩트하게 줄이고 대신 다이닝 공간은 오픈 구조로 확장했다. 컨셉에 맞춰 제작한 스트라이프 패턴의 원목 테이블과 두 가지 색상의 의자는 작은 아트워크처럼 놓였다. 펜던트 조명은 도르래 구조로 높낮이가 조절돼 식사와 취미에 따라 다른 무드를 연출한다.
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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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옷걸이, 각종 수납 박스가 공간에 빽빽하게 자리한 침실. 시선이 분산되고 동선도 명확하지 않았다. 수납이 공간을 점령한 탓에 침실의 본질인 휴식의 기능이 희미해진 상태.
벽과 천장을 감싼 오렌지빛 톤의 페인팅이 공간의 분위기를 한 번에 전환한다. 따뜻한 색감은 아침에는 부드러운 빛을, 저녁에는 은은한 포근함을 만들어낸다. 맞춤 제작한 옷장은 벽처럼 자리해 시선을 정리한다. 손잡이조차 얇은 세로 슬릿으로 처리해 군더더기를 최소화했다.
복도
복도는 단순한 통로였다. 좁고 가구와 물건이 가득해 지나가기 바빴던 공간.
지금은 벽면 수납과 그리드형 디스플레이가 더해져 작은 갤러리가 됐다. 사진이나 그림을 바꿔 걸며 계절마다 분위기를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 매립등을 더하니 단순한 동선이 아닌 머무는 통로가 되었다.

©ordermade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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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주인공은 빛
오더메이드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빛이었다. 리놀륨 바닥과 스틸, 유리로 마감된 벽은 빛을 부드럽게 반사해 부엌까지 이어졌다. 빛은 슬라이딩 도어와 복도를 지나 현관의 철제문에 닿고 작은 구멍을 통해 세탁실과 신발장까지 깊이 들어온다.

©wonsirim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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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건 빛이에요. 이미 정해진 채광을 다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빚어내느냐가 중요하죠. 구조는 같아도, 빛이 만드는 공간의 표정은 제각각입니다. 그 반전의 묘미를 클라이언트가 느끼셨으면 합니다.”
마포의 45평 구축 아파트는 결국 다른 아파트와 구조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안을 채운 질서와 색, 가구, 그리고 빛의 연출이 아파트를 아파트 같지 않게 만들었다. 아파트라는 획일적 주거 형태 속에서도 남다른 취향을 담아내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 중요한 건 벽을 허무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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