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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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와 기능을 넘어, 디자인 자체로도 하나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온 까시나의 여정.
그 철학과 비전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끌고 있는 CEO 루카 푸소와의 대화.

까시나 논현 쇼룸의 1층을 장식한 롱플레인 다이닝 테이블과 컴미티 암체어.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샬롯 페리앙® 컬렉션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았습니다. 브랜드를 이끄는 입장에서 이 역사적인 기념일을 맞이했다는 점은 굉장히 뜻깊을 것 같은데요. 이 컬렉션이 시장에 60년간 존재해왔다는 것은 정말 큰 성취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샬롯 페리앙 컬렉션은 1929년에 디자인되었고, 그때는 일부 회사에 의해 소량만 제작되었어요. 이후 까시나가 제작을 맡게 되었는데, 이 결정은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선택이었죠. 1973년 이마에스트리 iMaestri 제품군에 추가된 제품들은 까시나뿐만 아니라 전체 디자인 업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성공적일 것이며, 다른 브랜드에서는 쉽게 따라할 수 없는 특별한 유산이죠.
60주년을 맞아 까시나에서는 여러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컬렉션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특별한 기념일을 축하하는 만큼 제품의 본래 디자인에 충실하는 동시에 새로운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한 것을 반영해, 새로운 색상과 소재로 제품을 더욱 돋보이게 표현하고자 했죠. 그렇게 우리는 포퇴유 그랑 콩포르를 포함한 네 가지 모델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블랙 혹은 브라운 가죽과 크롬마감의 구조로 알려져 있던 제품에 컬러를 더하고, 가죽 대신 벨벳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전달하죠.
키톤 Kiton과의 협업도 그런 컬러감과 스타일에 대한 비전을 반영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키톤은 고급 여성복 분야에서 높은 명성을 가진 이탈리아 브랜드로서, 우리는 그들과 협업해 100개 한정판을 제작했습니다. 깊은 블루와 자둣빛 컬러 조합으로 가지를 뜻하는 ‘오버진 Aubergine’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고급 캐시미어 원단으로 마감해 아주 특별한 가치를 더했어요.
이마에스트리 컬렉션으로 새로 태어난 비코 마지스트레티 Vico Magistretti의 피안드라 Fiandra 또한 빼놓을 수 없죠. 이 소파는 1970년대부터 40년 넘는 동안 우리 컬렉션에 포함되었던 모델입니다. 디자인에도 유행이 있다는 점에서, 다시 유행의 흐름 속으로 들어올 타이밍이라고 판단해 이번에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이죠. 사람들의 체격이 50년 전보다 더 크고 무거워진 만큼, 원래 디자인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오늘날의 변화된 환경에 맞춰 비율을 조정했습니다. 물론 원작자의 유산을 관리하는 재단과 완벽한 합의를 통해 이뤄졌어요.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밀란 디자인 위크 동안 연극 <Staging Modernity>를 선보인 점입니다. 이 또한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샬롯 페리앙 컬렉션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해당 연극은 어떤 상업적 목적도 없이, 단순히 이 컬렉션을 기념하기 위한 순수한 문화적 프로젝트였어요. 까시나는 때때로 상업적 이익을 떠나 문화적 가치의 향유를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까시나 공식 수입원 크리에이티브랩의 안성현 대표와 까시나의 루카 푸소 CEO.

샬롯 페리앙 컬렉션의 20주년을 기념하며 2024년 까시나가 복각한 몽파르나스 테이블.

까시나의 예술적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 2025 뉴 컬렉션 중 하나인 ‘Me From Outside’도 떠오르네요. 아티스트 피에트로 터지니 Pietro Terzini와 협업한 거울을 통해 아트와 디자인을 융합하려는 의도가 느껴졌어요. 우리는 단순히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우리 활동 범위를 다른 영역까지 넓히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터지니는 다양한 매체 위에 문구를 쓰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아티스트입니다. 거울에 새겨진 문장들은 나 자신을 비춰보게 만들죠. 거울은 단순히 얼굴이나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매개체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도록 돕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세 문장이 담긴 거울 시리즈는 한정판으로 바로 완판되었죠.
연극 <Staging Modernity>를 연출한 포르마판타즈마의 FF. Spine 북케이스도 인상 깊었어요. 6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동시에, 그들에게 ‘이 공연과 연결되는 실제 가구를 함께 만들어보자’라고 제안했죠. 결국 두 작업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이 디자인한 제품은 까시나의 장인정신, 즉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실은 매우 섬세한 디테일이 담긴 제작 기술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색상 조합이 매우 독특했고, 책장 같은 유형의 가구에 대해 우리가 기존에 보지 못한 접근 방식을 보여줬어요.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 썼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들은 최대한 자투리를 남기지 않는 지속 가능한 제작 방식을 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구 한 조각을 길게 잘라 만들면 목재의 80%를 버리게 되는데, 이들은 짧은 목재 조각들을 정밀하게 연결해 낭비를 최소화했어요. 이런 제작 방식은 포르마판타즈마의 철학뿐 아니라 까시나의 가치와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디자인, 제작 방식, 친환경적 접근 모두가 조화를 이루었죠.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의 아이코닉한 ‘코나로’ 소파는 까시나의 이마에스트리 컬렉션 중 하나다.

이번엔 드레스룸으로 영역을 확장해 ‘워크 인 워드로브’ 또한 새롭게 선보였는데요. 우리 핵심 아이디어는 ‘집은 진정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고객이 까시나의 제품을 구매할 때는 단순히 쇼룸에 전시된 가구가 아닌, 자신의 집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를 구매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우리는 ‘고스트 월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사용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춰 컬러, 벽지, 프린팅, 직물, 가죽 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시스템을 드레스룸에 적용해 탄생시킨 것이 ‘워크 인 워드로브’ 시리즈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단순히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아드는 방식을 택한 것이죠.
2025년 컬렉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나 연결고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항상 다양한 제품이 하나의 철학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걸 목표로 합니다. 2025년 컬렉션이야말로 그 목표가 가장 잘 구현된 해라고 생각해요. 기존 제품, 신규 제품, 색상, 소재 등 모든 요소가 하나의 통일된 사고방식 속에 잘 녹아 있었습니다. 정말 만족스러운 조화였어요.
이마에스트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까시나는 이마에스트리 컬렉션을 통해 거장들의 가구 디자인을 꾸준히 복각하거나 재해석해 출시해왔습니다. 이런 과정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DNA, 본질, 전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시나의 목표는 단지 과거 제작된 제품을 다시 생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에 디자인되었지만, 한 번도 제품화되지 않은 작품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죠. 그동안 대중에게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디자인들을 파운데이션 아카이브에서 찾아내는 것은 큰 특권이자 책임이기도 합니다. 수십 년 전에도 충분히 훌륭한 디자인이지만 아직 세상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굴해내고 오늘날 기준에 맞게 구현해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까시나는 늘 새로운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기도 하죠. 60여 년 전, 우리는 당시 신인이던 마리오 벨리니, 토비아 스카르파, 가에타노 페세 등의 거장들과 함께 일해왔고, 그 흐름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에는 총 4명의 디자이너가 까시나와 처음 협업하였어요. 오늘날엔 디자이너의 수는 많아졌지만,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표현할 기회는 줄어들었어요. 그래서 까시나는 ‘파트로나주 Patronag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을 직접 발굴하고 우리와 협업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디자인 업계에서 여성이 설 자리가 부족하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기에, 여성 디자이너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다양한 카테고리의 컬렉션과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구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하는 데 앞서고 있는데, ‘까시나 퍼스펙티브’를 기획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은 무엇인가요? 디자인이란 본질적으로 미학과 기능의 결합입니다. 오직 미적인 요소만 고려하거나, 오직 기능만 고려해도 진정한 디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토는 ‘디자인을 존중하자 Respect Design’입니다. 즉 원작자의 아이디어를 진정성 있게 존중함은 물론, 모든 제품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를 넘어서야 해요. 미적 가치와 내면적 품격을 모두 갖춰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제품에 인간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가구는 기계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아요. 반드시 숙련된 장인이 마지막 손질을 해야 하죠.

포르마판타즈마 디자인의 FF. 스파인 북케이스.

피에트로 터지니와 협업한 ‘미 프롬 아웃사이드’ 거울은 디자인에 아트를 접목하기 위한 까시나 노력의 일환이다.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 샬롯 페리앙 컬렉션 60주년을 기념하며 새로운 컬러를 입은 포퇴유 그랑 콩포르 시리즈.

 

2025년 이마에스트리 컬렉션으로 새로 태어난 비코 마지스트레티의 피안드라 소파.

마지막으로, 오늘날 디자인 산업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며, 까시나는 이 문제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날 디자인 산업이 직면한 문제는 단지 디자인 자체에 국한되지 않아요. 세계 전반의 불안정성이 문제입니다. 정치적 갈등, 전쟁, 매일 일어나는 새로운 위기 속에서 창의성을 유지하고 표현해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불안정함’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까시나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창의적으로, 더 과감하게 나아가고자 합니다.
디자인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말씀이겠네요. 브랜드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까시나의 역할이에요. 우리는 늘 혁신하고, 실험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합니다. 조명이나 액세서리 같은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영역에도 도전하고 있죠. 우리는 늘 우리 테두리 밖을 바라보려 노력해요. 보테가 베네타, 버질 아블로와의 협업, 그리고 이번에 선보인 <Staging Modernity> 공연 등, 사람들이 디자인 브랜드에게 기대하지 않는 영역까지 도전합니다. 그것이 까시나의 진짜 역할이에요. 단지 경쟁을 앞서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 나가는브랜드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INSTAGRAM 크리에이티브랩 @creativelab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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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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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마법 사이

사랑과 마법 사이

사랑과 마법 사이

사랑과 마법, 이미지와 언어 사이에서 상상의 구조를 세우는 프랑스 크리에이터 듀오 M/M(파리).
두 사람이 직조한 시각적 기호의 세계는 감각과 해석이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금 의미를 만들어낸다.

<사랑 / 마법 ♥ / MABEOB M / MAGIE> 전시 전경.

M /M(파리)의 미카엘 암잘라그와 마티아스 오귀스티니악. 자료제공: F1963

현실이 더 이상 상상보다 선명하지 않을 때, 예술은 그 사이를 건너는 다리를 놓는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세계적인 크리에이터 듀오 M/M(파리 Paris)의 전시 <사랑 / 마법 ♥ / MABEOB M / MAGIE>은 그 현실과 상상을 수놓는 다리이자, 이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시각적 기호와 상상력의 아카이브다. M/M(파리)의 이름은 단순한 이니셜을 넘어, 서로의 기호를 탐구하며 함께 성장해온 두 디자이너 마티아스 오귀스티니악 Mathias Augustyniak과 미카엘 암잘라그 Michaël Amzalag의 서사를 상징한다. 그들이 구축한 세계는 극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오페라의 무대처럼 과장되거나, 한 장의 얇은 포스터처럼 평면적이지 않다. 이미지와 언어, 상징과 공간이 겹쳐지는 다차원적 구성 속에서, 전시는 ‘사랑’과 ‘마법’이라는 두 개의 기호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재조합하며 그 경계를 유희한다. 이들 세계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보다는 관계의 복합성이며, 마법은 이미지를 통한 의미 생산의 메커니즘이다. ‘마지 Magie’는 프랑스어로 ‘마법’을 뜻하지만, M/M(파리)의 언어 안에서는 ‘Image’, ‘Magi’, ‘Nation’으로 해체되어 ‘IMAGINATION 상상’에 이르는 또 다른 문장으로 확장된다. 사랑과마법은 곧 상상이며, 그것은 이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자 도구다.

전시는 총 6개 구역으로 구성된다. 도시 이름을 딴 알파벳 스툴 <B,U,S,A,N>이 설치된 로비를 시작으로 ‘해운대’와 ‘코펜하겐’을 지나 ‘마법’, ‘마지’, ‘테베 Thebes’까지 이어지는 이 여정은 감각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전시의 중추는 M/M(파리)가 직접 디자인한 78장의 타로 카드에 있다. 카드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각적 체계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자이너적 시선의 상징 구조다. 그들의 시각 언어는 아이콘, 지표, 상징의 삼각 구조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퍼스의 기호학 이론에 기반한 이 철학적 탐색은 곧 의미의 조건을 묻는 행위다. 전시 마지막 공간 ‘테베’에서 상영되는 오페라 영화 <안티고네(Antigone Under Hypnosis)>는 이들이 이미지로 구현해낸 언어의 집약적 구현이다. 공간, 시간, 신화, 기억이 하나의 시퀀스로 작동하며, 관객은 어느 순간 이야기의 구성자이자 해석자가 될 것이다. M/M (파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이 정지된 기호가 아닌 연주 가능한 언어임을 드러낸다. 그 악보 위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사랑과 마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시는 오는 9월 14일까지 부산 F1963 석천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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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아이콘, 로테르담

변화의 아이콘, 로테르담

변화의 아이콘, 로테르담

전쟁으로 인한 폐허 위에 세운 실험의 도시, 로테르담.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 속에서 새로운 도시 미학이 피어났다.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 위로 디지털 아트워크가 펼쳐지는 마켓홀은 로테르담의 상징적 공간. © Wikimedia

천장 전체를 수놓은 꽃과 과일의 이미지는 마치 현대판 시스티나 천장을 연상케 한다. © Wikimedia

지그재그로 펼쳐진 계단이 인상적인 데포 미술관. © Ianartconsulting

1940년, 폭격으로 많은 것을 잃은 로테르담은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기꺼이 ‘건축의 실험실’이 되기로 했다. 건축가그룹 MVRDV의 마켓홀과 데포 미술관은 로테르담을 대표하는 명소로 손꼽힌다. 마켓홀이 있는 비넨로테 지역은 운하를 통한 상업 활동의 거점지였으나, 폭격을 맞은 후로 약 60년 동안 비어 있었다. 도심 중심지의 낙후된 노천 시장을 개발하기 위해서 민관이 협력해 현대적인 시장과 주거가 결합된 공간을 기획하게 되었다. 총 예산이 1억7500만 유로(약 2740억원) 들고, 10여 년의 과정을 거쳐 2014년에 현재의 마켓홀이 문을 열었다. 지하층은 주차장과 슈퍼마켓, 1층은 푸드 코트, 그 위로는 228세대의 아파트가 들어선 주상복합 구조이며, 거대한 아치 형태가 특징이다. 축구장 두 개 크기만 한 내부는 거대한 빈 공간을 예술품으로 채웠다. 벽부터 천장을 따라 천공 알루미늄 패널에 인쇄된 디지털 미술 작품이 그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밀화를 연상시키는 꽃과 곤충의 이미지가 도심 이미지와 합성된 것으로서, 로테르담의 ‘시스티나 벽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물 옆에서 보면 평범한 아파트인데, 중앙 아치를 통해 보면 완전히 색다른 건축물인 것이다. 천장 곳곳에 뚫린 창문은 실제 위에 거주하는 아파트와 연결되어 있다. 집 안에서 마켓홀을 내려다볼 수 있다니! 이곳이 왜 인기 주거지로 손꼽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켓홀이 들어서며 밀려난 재래시장은 정기장 형태로 여전히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이 광장 주변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기울어진 정육면체 형태를 이어 붙인 큐브 하우스, 흔히 ‘연필 타워’ 라고 불리는 주상복합형 아파트는 모두 피트 블롬 Piet Blom의 작품인데, 도시 속 숲 개념을 실현한 통합 프로젝트다. 그 옆으로는 중앙도서관이 자리한다. 이는 윔 퀴스트 Wim Quist의 건축으로서 설비와 구조를 외부로 드러내어 마치 퐁피두 센터를 연상시키는데, 하이테크 건축의 영향을 보여준다. 모두 1970~ 80년대에 지어진 로테르담 재건 프로젝트의 일부다. 마켓홀에서 트램으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뮤지엄 파크는 1990년대 도시 문화 중심지를 위해 조성되었다. 조경가 이브 브루니에 Yves Brunier가 구성한 거대한 가든 사이로 현대미술관과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이 있다.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은 수집가 보이만스와 판 뵈닝언의 기증을 시작으로 이어진 수많은 기증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본관은 1935년 개관한 네덜란드 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현재는 보수 휴관 중이다.

그 대신 2021년 문을 연 데포 미술관이 전 세계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6층 규모의 둥근 항아리 형태의 작은 미술관이지만, 미술품 15만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관람도 가능하다. 이 덕분에 관람객은 시대별 혹은 주제별로 구성된 통상적인 미술관의 전시 형태를 넘어 ‘재료’를 중심으로 구분된 각 작품을 수집, 정리된 모습 그대로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작품을 복원하는 과정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볼 수 있다. 어린이 관람객이 작품을 손톱으로 긁어 손상시킨 마크 로스코의 작품도 현재 이곳에서 수리 중이다. 건물 옥상에는 그린 셰프의 레스토랑이 있는데, 옥상 가든 덕분에 밤이 될수록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때 미술관이 ‘작품의 무덤’이라는 혹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작품 수집 터에 가까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지그재그로 펼쳐진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적극적으로 작품을 탐색하는 관람객들 덕분에 그 어떤 미술관보다 역동적이며 에너지가 넘친다. 로테르담은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 덕분에 지금은 건축만으로도 충분히 여행할 가치가 있는 문화도시로 우뚝 섰다. 멋진 건축물일수록 사람이 없을 때 찍은 사진이 멋있고 또 막상 현장에 가면 사진만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있을 때 더욱 생생해지는 건축과 도시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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