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기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사이 서 있는 대담한 건축의 세계.

푸른 포도밭 풍경과 어우러진 건물은 지면에 떠 있는 듯한 구조를 갖췄다. © Hufton+Crow

와인 보관과 압착, 병입, 라벨링 등의 제조 공정이 진행되는 건물 내부 공간. © Hufton+Crow

포도밭이 펼쳐진 파노라마 뷰를 통창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 Hufton+Crow

방문객을 위한 환대 공간은 따뜻한 우드 톤으로 꾸몄다. © Hufton+Crow

드넓은 포도밭을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 © Hufton+Crow
언덕 위 솟은 유리 돔,
사우스카 토카이 와이너리
헝가리 토카이-헤지알야 Tokaj-Hegyalja의 포도밭 위, 곡면 유리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지면과 닿지 않은 듯 가볍게 솟아 있다. 건축사사무소 보드 아키텍처럴 스튜디오 Bord Architectural Studio가 설계한 사우스카 토카이 Sauska Tokaj 와이너리는 고대 화산 지형과 완만한 언덕 풍경 위에 얹힌 듯한 조형으로, ‘건축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침범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얹혀 있어야 한다’는 건축 철학을 공간에 녹여냈다. 와이너리는 지름 36m의 두 렌즈 형태가 교차하는 구조를 갖췄다. 포도 수확과 와인 생산을 위한 기능 공간은 지하에, 방문객을 위한 레스토랑과 바는 지상에 배치했다. 얇은 강철 기둥 위에 들어올려진 렌즈형 매스는 햇빛을 아래쪽으로 미끄러뜨리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만든다. 내부는 곡선 천장이 시야를 외부로 유도하며, 파노라마 테라스로 이어지는 동선은 토카이의 전통적인 포도밭 풍경을 정면으로 담아낸다. 지하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발효조가 중심의 오크 숙성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압착, 병입, 라벨링 등의 와인 제조 공정은 건물 중심축을 따라 배치된 긴 터널을 통해 진행되며, 이 터널은 물류 기능뿐 아니라 설비와 기계실로 활용된다. 차가운 금속 질감의 셀러 공간과 따뜻한 재료가 사용된 환대 공간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와인의 탄생과 경험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나눈다. 사우스카 토카이는 지역의 풍경과 역사, 현대 건축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포도밭 위에 유유자적 떠 있는 이 구조물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와인 문화를 제안하는 현대적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언덕 위에 캔틸레버 구조로 세워진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2 녹음과 목가적 전원 풍경에 감싸인 밸런싱 반. © Edmund Sumner

지역 건축 양식을 반영한 경사진 박공지붕 구조. © Edmund Sumner

공간 구석구석에서 감상할 수 있는 탁 트인 외부 전경. © Edmund Sumner

스튜디오 마킨 앤 베이 Studio Makkink & Bey가 목재와 패턴 타일을 활용해 완성한 실내 디자인. © Edmund Sumner
전원 속 은빛 헛간, 밸런싱 반
영국 시골 마을 서퍽 Suffolk의 목가적 풍경 속, 은빛으로 반짝이는 독특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설립한 비영리 단체 리빙 아키텍처 Living Architecture가 운영하는 휴가용 대여 주택 프로그램 중 하나인 밸런싱 반 Balancing Barn이다. 지역 농가의 박공지붕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헛간 형태의 숙소로, 실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건축 그룹 MVRDV가 설계했다. 총 길이 30m에 달하는 이 건물은 절반이 경사면 위로 돌출되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외관을 감싼 금속 시트는 언뜻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주변 풍경을 고스란히 반사하며 계절의 흐름과 자연의 리듬을 시각적으로 담아낸다. 건물은 고단열 외피, 열 회수 환기 시스템, 지열 히트펌프를 도입한 고효율 에너지 구조로 설계되었다. 내부는 침실 4개와 개별 욕실, 리빙 룸, 주방과 다이닝 룸, 숨은 정원 연결 통로 등으로 구성돼 사계절 내내 자연과 연결되는 체험이 가능하다. 내부 공간 역시 자연과의 연결에 집중해 설계되었다. 전면 슬라이딩 창과 천창을 통해 집 안 어디에서나 탁 트인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건물 중앙에 자리한계단은 야외 정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러한 혁신적인 건축적 접근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Red Dot Design Award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건축 및 도시 디자인’ 부문 상을 받았다.

세토 내해를 마주한 연못 위를 부유하듯 떠 있는 시모세 미술관. © SIMOSE

전면의 거울 유리 벽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풍경을 반사한다. © SIMOSE

에밀 갈레의 작품 80여 점이 전시된 미술관 내부. © SIMOSE

리셉션 공간을 채운 유기적인 우드 프레임 구조물. © SIMOSE

에밀 갈레의 유리공예에 등장하는 식물을 식재한 ‘에밀 갈레의 정원’. © SIMOSE
바다 위 그려낸 수채화, 시모세 미술관
일본 히로시마 세토 내해 연안에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이 있다. 건축가 반 시게루가 설계한 시모세 미술관은 바다와 연못을 활용해 고정된 건축 개념을 유연하게 풀어낸 공간이다. 2024년에는 세계적 건축 디자인 어워드인 프릭스 베르사유 Prix Versailles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선정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시모세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동 가능한 여덟 개의 전시 공간에 있다. 각각 10×10m 규모의 컨테이너 형태로 설계된 건축물은 바지선 위에 설치되어 있어 위치 조정이 가능하다. 전시 서사에 따라 구성 자체가 달라지는 유연한 공간은 조선 기술에서 착안한 부력 기반 플로팅 공법으로 구현됐다. 이색적인 외형의 갤러리들은 아르누보 예술가 에밀 갈레 Émile Gallé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여덟 가지 색의 유리가 감싸, 전면의 거울 유리 벽과 함께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풍경을 반사한다. 전시장 외에도 미술관 부지에는 각각 독립된 열 채의 빌라가 흩어져 있다. 그중 네 채는 반 시게루의 대표작을 재해석한 ‘종이의 집’, ‘가구의 집’, ‘더블 루프 하우스’, ‘벽 없는 집’으로 구성되었으며, ‘크로스 월 하우스’는 건축가 존 헤이덕에게 바치는 오마주로 설계되었다. 수변과 숲 사이에 배치된 이 빌라들은 건축 작품으로 기능하며, 전시 공간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확장된 경험을 제공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미술관 외부에 조성된 ‘에밀 갈레의 정원’이다. 갈레의 유리공예에 등장하는 식물을 세토 내해의 기후에 맞춰 식재한 이 정원은 미술관 컬렉션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건축과 자연,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