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불문, 성별 불문하고 누구나 맛있게 즐겨 시쳇말로 ‘초딩 입맛’이라 불리는 요리가 있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맛이다.
“인도네시아에 오셨으면 이건 들어 보셔야죠.” 자카르타의 서민 거주 지역을 안내해주기로 한 론니 씨가 권한 것은 한 그릇의 박소였다. 뽀얀 고기 국물 위에 소담스럽게 담긴 고기 경단과 쌀국수, 짭짤한 채소와 숙주나물이 들어 있는 박소는 인도네시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다. 쫄깃한 고기 경단의 식감이 마음에 들어 더운 날씨에도 불 구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국물 한 모금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오바마 대통령과 식성이 같으시네요. 하하.” “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어릴 때 즐겨 먹던 음식이거든요.”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 사람과 재혼한 생모를 따라 자카르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오바마에게 인도네시아 음식은 유년의 추억과 동의어였던 모양이다. 2010년, 인도네시아 방문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도네시아에 가면 어린 시절 먹었던 박소와 미고렝(인도네시아식 볶음국수)을 다시 먹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꼭 유년기에 인도네시아의 맛을 혀에 각인시킨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이 나라의 음식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인상을 심어준다. 시쳇말로 ‘초딩 입맛’이라는 표현이 있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을 베이스로 깐 ‘이해하기 쉬운 맛’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그중에서도 자바 요리는 이런 입맛을 가진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나라다. 1만8000개의 섬 중에 사람이 거주하는 곳만 해도 6000개가 넘는다.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엔 육두구, 정향 등 요리사의 솜씨에 날개를 달아주며 돈이 되는 양념을 확보하기 위해 일찍부터 인도, 중국, 아라비아와 유럽의 상인이 드나들었다. 이들이 가져온 식문화가 뒤섞이며, 다양한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맛이 태어났다는 가설을 쉽게 생각해낼 수 있다. 하지만 ‘초딩 입맛’이라고 해서 그 맛을 창조해 내는 과정까지 초보적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맛을 만드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그 첫걸음은 바로 장 醬을 담그는 것이다. 요리사가 화덕에 불을 지피는 순간이 조리 과정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장이 들어간 요리는 그보다 몇 달 전에 콩을 삶거나 새우를 소금에 절이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장은 농축된 시간과 정성이다. 잘 빚은 술과 마찬가지로 장에는 한껏 발휘된 그 민족의 슬기와 솜씨가 담겨 있다. 그래서 때로는 더없이 좋은 기념품이 되기도 한다. 여행지의 맛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시장에 가서 대표적인 소스 몇 병을 구입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트렁크 속에는 ‘께짭 마니스’와 ‘삼발 뜨라시’가 한 병씩 들어 있었다. ‘이해하기 쉬운’ 인도네시아의 맛을 내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소스들이다.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인도네시아의 께짭은 우리가 흔히 먹는 케첩의 어원이다. 우리는 케첩이라고 하면 달걀말이에 뿌려 먹는 토마토케첩을 떠올리지만, 인도네시아 요리에서 께짭은 발효 소스를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께짭 마니스는 콩으로 만든 달콤한 간장이다. 검은콩을 물에 삶아 발효시킨 후 이것을 압착해 얻은 액체에 팔각, 회향, 마늘, 고수 등의 향신료와 종려당(동남아시아 일대에 자생하는 종려나무의 수액을 끓여 얻은 설탕)을 첨가한다. 여기에 점성을 높이기 위해 카사바 전분을 넣고 졸이면 짭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을 내는 께짭 마니스가 된다. 오바마가 그리워했던 볶음국수 미고렝이나 인도네시아 볶음밥 나시고렝에서 느껴지는 맛의 1번 타자가 바로 이 께짭 마니스다. 최근엔 대형마트에서 께짭 마니스와 남쁠라(태국식 피시 소스) 등 외국 소스류를 구하기가 점점 쉬워지는 추세다. 한 번쯤 구입해 일반 간장 대신 사용해보면 재미있는 맛의 차이를 느껴볼 수 있다.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들뜬 기분은 덤이다. 께짭 마니스가 우리의 간장에 해당한다면, 삼발 뜨라시는 고추장쯤 되겠다.정 확히는 새우젓이 들어간 고추 소스다. 만화가 김풍은 본업보다 요리 프로그램 출연으로 더 유명한 친구다. 언젠가 그가 이 소스 때문에 몸무게가 늘었다고 투덜댄 적이 있다. 야식으로 삼발 뜨라시에 밥을 비벼 먹는 것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데, 이 소스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삼발 뜨라시는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유전자 단계에서 추구하는 맛의 요소를 정확하게 충족시킨다. 매콤, 새콤, 달콤.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덫이자 유혹이다. 삼발 뜨라시병을 지나칠 때마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요리에 신경 쓰는 인도네시아 가정에서는 직접 이 소스를 만드는 것으로 조리의 서막을 연다. 조그마한 절구에 고추, 라임, 양파, 식초, 설탕, 쿠쿠이나무 열매를 넣고 찧으면 온 집 안에 매콤하면서도 신선한 향이 가득 퍼진다. 여기에 뜨라시라고 불리는 새우젓을 넣고 잘 혼합하면 완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발 뜨라시는 기성품으로 파는 것보다 훨씬 싱그러우면서도 진한 맛을 낸다. 숩 아얌 잔뚱 피상(바나나 꽃과 닭고기가 들어간 매콤한 국물 요리)이나 꺼뚜빳(가시를 발라내 생선살을 국물과 함께 졸인 것으로 이슬람의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끝나는 이둘피트리 축제 때 주로 먹는다) 등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 개운한 자바 요리의 맛이 여기서 출발한다. 삼발 뜨라시는 디핑 소스로도 발군이다. 멸치나 닭튀김을 찍어 먹어 보면 매콤한 맛의 신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 어쩔 수 없는 중독성은 자제력으로 극복하시길.
인도네시아 음식의 다양성은 힌두와 이슬람, 중국의 영향 외에도 다양한 소수 민족들의 존재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중에서도 자카르타에서 자동차로 10시간 떨어진 산골 마을 칩다글라에 사는 카세푸한족은 음식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한 해 수확을 감사하는 축제 ‘세렌 타운’을 앞두고 칩다글라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쌀 창고 ‘르잇’이었다. 카세푸한족은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그해에 거둬들인 곡식을 모두 르잇에 보관한다.
“쌀은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칩다글라 마을의 외교부 장관 격인 요요 요가 스마나 씨의 말이다. “쌀은 생명이잖아요. 우리는 생명을 사고팔지 않아요 .” 르잇과 마주한 마을 회관 ‘이마 그데’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함께 모여 과자를 굽고 있었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과자 ‘나우따’는 달콤하면서도 따뜻했다. 이 과자는 다른 음식들과 더불어 열흘간 계속되는 축제 기간 동안 이 마을을 찾는 손님들에게 제공될 터였다. “그러면 손님들은 자기가 먹은 음식에 대해 돈을 내나요?” “돈? 무슨 돈을요?” 과자를 굽는 아낙네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미인인, 족장의 부인 레슬리 델리안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음식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죠.” “음식은 나누라고 있는 것이지, 돈을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피디님도 그런 질문 그만하시고, 이 과자 맛이나 보세요.” 21세기 경제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대원칙이 간단히 무시당하는 이 쾌감.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만드는 이들의 즐거움이 그대로 녹아 있는 파인애플 과자의 꿈같은 맛. 악마가 디테일 속에 있다면, 고수는 평범함 속에 있다. 초등학생 수준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길은 엄청나게 간단하거나, 엄청나게 품이 든다. MSG를 때려 넣거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맛의 정석을 쌓아 나가거나. 필자가 먹거리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철학을 마주한 곳은 다름 아닌 ‘초딩 입맛’의 천국, 인도네시아였다.
글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
출처 〈MAISON〉 201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