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크레타의 결혼식을 찾았다. 상다리가 휘는 잔칫상 음식부터 크레타 해안가에서 맛본 지중해식 만찬까지. 소설 속 그리스인 조르바가 부럽지 않았던, 그리스로의 음식 기행을 소개한다.
해가 중천에 이르자 크레타의 산골 마을 아노기아의 한 가정집 앞엔 검은색 예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테이블을 나르는 분주한 행렬이 도로를 가로막는다. “돌아서들 가겠죠. 뭐.” 한 남자가 당연한 일 아니냐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점심때가 되자 하얀 치즈 가루 외엔 다른 양념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순백의 파스타가 나온다. “결혼식 땐 늘 이걸 먹습니다. 신부의 순결을 상징하죠.” 아노기아에서의 결혼식은 최소한 2000명의 하객이 모여드는 대형 이벤트다. 이날을 위해 신랑 가족은 사흘 전부터 방송차를 동원해 인근 마을을 돌며 오늘의 잔치에 와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그 간곡한 홍보는 이제 곧 결실을 맺을 참이다. 신랑 집 앞에는 아침부터 대형 트레일러 두 대가 서 있다. 신랑의 형이 자랑스레 트레일러의 문을 열어젖힌다. “트레일러마다 양고기가 200마리 분량씩 들어있어요. 한쪽은 익힌 것, 다른 쪽은 익히지 않은 것. 이 정도는 준비해두어야 안심이죠.” 크레타 사람들과 양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제주도 면적의 4.5배를 차지하는 커다란 섬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험준한 산악 지대. 여기에서 키울 수 있는 가축으론 양이 제격이다. 꼬치에 꿰어 야채와 함께 익히는 ‘수불라키’, 레몬즙과 오레가노를 뿌려 구운 양갈비인 ‘파이다키아’ 등 다양한 양고기 요리법이 있지만 바쁜 결혼식장에선 뭐니 뭐니 해도 통째로 구운 양 바비큐가 최고다.
잔칫상이 어느 정도 준비되자 멀리서부터 요란한 경적 소리가 들려온다. 신부 일행이 고급 승용차 10대에 나눠 타고 도착한 것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신랑과 온 마을 사람들은 함께 마을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으로 향한다. 그리스 정교회의 복잡한 예법에 따라 리본으로 연결된 은관 두 개를 나눠 쓰는 의식이 치러지고 이들은 부부가 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신부가 시댁의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순간은 신랑의 형제들이 단검으로 만든 문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인생의 장애물을 뜻하는 올리브나무 가지를 뛰어넘고 다산을 상징하는 수박을 바닥에 던져 깨뜨리는 것으로 오후 내내 계속된 결혼 의식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제부턴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추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 남았다. “저 달이 완전히 저물기 전엔 집에 안 가요.”
약간은 몽환적인 12박자의 춤곡, ‘벤도잘리’에 맞춰 빙빙 도는 춤을 추던 한 남자가 외친다. 태양의 신 아폴론과 대비되는 어둠과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 술잔 앞에 양보 없고 광기의 불길이 자신의 몸을 태우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레타 사람들은 디오니소스교의 열렬한 신도들이다. 그리고 그런 성격을 상징하는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조르바일 것이다. 크레타 출신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이 거친 바람둥이 사내는 그를 고용한 풋내기 광산업자 ‘나’처럼 이런저런 틀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겐 늘 동경의 대상이다. 그는 전 재산과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해있던 ‘나’에게 함께 춤출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봐요,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묶은 로프를 잘라내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하거든.”
크레타 사람들이 자신을 묶은 로프를 잘라낼 때 가장 애용하는 술은 바로 ‘치쿠디아’다. 그리스 본토에선 ‘치푸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술은 태곳적부터 크레타 사람들의 옆을 지켜왔다. 저급한 와인을 증류해 전혀 새로운 술로 탄생된 치쿠디아는 마시는 사람을 격정의 불꽃 속으로 몰아간다. 한다. 유로 2004 준결승전에서 연장전에 터진 한 방의 결승골로 체코를 물리치고 그리스 축구 대표팀이 결승에 진출할 때였다. 미칠 듯한 기쁨의 광기가 마을을 집어삼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점잖게 생긴 은발의 노신사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접시를 내동댕이치고, 아이들은 물잔을 던져 깨뜨리고, 청년들은 1단 기어를 넣은 차를 시속 60km로 운전하며 엄청난 굉음을 만들어냈다. 마을은 밤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희미한 빛을 던지기 시작한 이후에야 사람들은 좀 진정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밤새 다프네스 마을을 휩쓸고 간 불길의 연료는 치쿠디아 이외엔 생각하기 힘들다.
소박하지만 만족스런 지중해 만찬
거칠고 강렬하면서도 과실 증류주 특유의 달큰함을 지닌 치쿠디아는 올리브유, 토마토, 해산물이 어우러진 지중해식 요리와 잘 어울린다. 크레타에서 지중해식 음식을 제대로 즐기려면 좀 더 지중해에 가까이 갈 필요가 있다. 크레타의 북부 해안은 이라클리온, 하니아 등의 큰 항구가 집중된 번화 지역이다. 아무래도 그리스 본토에서 출발하는 배가 좀 더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예전부터 발전의 정도가 앞섰다. 그에 비해 크레타 남부의 프랑코 카스텔로 같은 곳은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이곳에서 어부 니키타스 씨를 만났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듯한 외모의 니키타스 씨는 막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물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몇 마리의 잡어와 그나마 맛이 없어 먹지도 못하는 ‘게르마노스’라는 물고기가 전부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먹고살아요. 나보다 못사는 사람도 많고.” 술집 아주머니에게 어망째 헐값으로 넘기고 나서 니키타스 씨는 집으로 향했다. 20년 전부터 돈이 생길 때마다 야금야금 짓고 있다는 그의 집은 허름하고 군데군데 마무리가 덜되어 있긴 했지만 넓고 쾌적했다. 이곳에서 그는 아들 삼형제와 14살이나 어린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원래는 딸도 셋 있었는데, 하도 집 안을 어질러서 바다에 내다버렸지.”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의 조르바식 입담이 정겹게 느껴졌다.
볕이 잘 드는 뜰에 앉아 그리스식 아이스커피인 프라페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그의 부인은 점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각종 채소를 직접 재배하고 있는 뒤뜰과 부엌을 부지런히 오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빨강과 초록이 싱그러운 대비를 이루는 지중해풍 정찬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올리브유에 튀긴 싱싱한 생선은 물론이고 다진 고기를 포도 잎에 싸서 찐 ‘돌마데스’, 토마토 혹은 가지에 쌀과 허브를 채워 구운 ‘게미스타’, 그리고 콩과 셀러리, 토마토로 만드는 그리스의 국민 수프 ‘파솔라다’가 우리의 눈과 혀를 즐겁게 했다. 지중해식 식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올리브유다. 정제와 가공을 거치는 다른 식용 기름과 달리 올리브유는 열매에서 짜낸 즙 그대로다. 성분이 기름일 뿐이지 주스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당연히 다른 기름에 비해 몸이 느끼는 부담이 적고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꾸준히 섭취하면 혈액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 지역 사람들이 육류와 생선을 많이 섭취하면서도 성인병에 잘 걸리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니키타스 씨에겐 식사를 마치고 자기 집 뜰에서 마시는 한 잔의 우조(아니스 열매로 맛을 낸 그리스의 전통주)가 만병을 예방하는 명약인 듯했다. 그리고 삶의 방식을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그의 조르바 성(性)은 그의 심신을 건강하게 유지해주는 최고의 백신이 아니었을까. “관광객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루하루 관광객이 더 오나 덜 오나 걱정 근심이 많아요. 물고기 잡는 일은 어쨌거나 먹고살 정도는 되니까. 걱정할 거 없는 내 삶이 훨씬 나아요.” 얼음에 닿아 뿌옇게 색이 변한 우조를 들이켜고 나서 니키타스 씨가 덤덤하게 말했다. ‘노래하고 춤출 때, 나 자신의 주인은 나’라고 이야기하던 조르바가 거기 앉아 있었다.
글 탁재형(다큐멘터리 PD) | 에디터 이경현 |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