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와 유약, 불이 빚는 우연과 변수를 30여 년 동안 탐구해온 도예가 이정미. 도형과 자연에서 출발해 쓰임과 감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폭넓은 조형 언어와 궤적을 개인전 <시간들: 이정미>를 통해 펼쳐 보인다.

갤러리 벽면을 채운 ‘블루문’ 작품이 압도적이에요. 전시 공간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곤 하는데, 이번이 딱 그랬어요. 몇백 호에 달하는 캔버스처럼 넓은 갤러리 로얄의 벽면에 ‘블루문’ 시리즈를 입체적으로 확장해 설치하고 싶었죠. 수십 개의 오브제가 점처럼 모여 하나의 큰 작품을 이루기 바랐습니다.
달이 차고 기울 듯 오브제도 하나하나 다른 모습이네요. 오브제마다 유약에 변화를 줬어요. 까만 밤에 별을 수놓은 듯 보이기도 하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어떤 것은 말간 보름달을 닮았고, 달 속에 또 다른 달을 품은 형태도 있어요. 반질반질한 블랙 오브제도 곳곳에 설치해두었는데, 전시장과 관람객의 모습을 비추며 공간 전체를 품기 바랐죠.
갤러리를 가득 채운 작품처럼, 블루는 작가님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져요. 블루는 흔히 차가운 색으로 인식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따뜻함과 생동감, 묘한 에너지가 발견돼요. 그런 매력 때문에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래 다뤄온 색이죠. 저를 ‘블루 작가’로 기억하는 분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백자의 흰빛을 비롯해 모든 색을 좋아하거든요. 사람도 각자의 성격과 아름다운 점이 다르듯 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블루뿐 아니라 다양한 색으로 확장해온 결정유는 작가님의 시그니처 작업입니다. 눈꽃이나 별을 떠올리게 하는 표면은 어떻게 완성되나요? 유약 컬러에 따라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이상을 실험해왔어요. 불에 녹은 결정유는 냉각되는 동안 결정이 자라는데, 배합과 최고 온도, 냉각 속도, 가마 안의 위치와 재임 방식 등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요. 함께 굽는 기물과 흙의 종류도 영향을 주고요. 이런 조건을 기록하며 축적한 실험 데이터가 있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수많은 실패와 비용을 감수해야 하고요. ‘우물 정’ 시리즈만 보더라도 지금도 작품 10개를 가마에 넣어도 완성품은 몇 개밖에 얻지 못해요.
그럼에도 결정유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저만의 작업이기 때문이에요. 눈꽃처럼 퍼지는 결정유 표현은 비슷하게 구현한 사례조차 찾기 힘들어요.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결합하며 늘 새로운 작업에 도전해오셨죠? 그동안 연 전시를 보며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라고 느꼈어요.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화를 면한다’고 하잖아요. 도예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참아야 해요. 작품이 가마에서 깨지거나 금이 가고, 유약이 흘러 눌어붙는 일은 다반사예요. 들인 시간과 공이 수포로 돌아가면 그만두고 싶을 만큼 속상하지만, ‘한 번만 더 해보자’ 하며 견딘 결과물이죠. 호기심이 많고 부지런한 성격도 작업에 도움이 돼요. 하나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과정을 즐기죠.

이런 결과물을 압축적으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전시 제목을 <시간들: 이정미>로 정하신 건가요? 개인전을 열 때마다 기존 작업을 변주한 새로운 시그니처 피스를 선보였어요. 시리즈 ‘우물 정’부터 ‘백자 면치기’, ‘애플’, ‘블루문’ 외에도 도자에 옻칠을 입히고, 섬세한 레이스 느낌을 도자로 표현하거나, 볼과 컵에 날개를 단 비정형의 테이블 웨어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지속해왔어요. 그동안의 6작업을 다양하게 보여드리고 싶었고, 제 작업의 변화도 함께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전시를 준비했어요.
여러 작품 중에서도 작업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시리즈가 있다면요? ‘면치기’요. 도자의 형태를 만든 뒤 면을 하나씩 툭툭 쳐내, 나무토막처럼 투박하고 거친 질감을 살린 작업이에요. 첫면의 폭과 각도를 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주변 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차례로 쳐내야 하죠. 원하는 질감과 디테일 표현을 위해 수많은 도구를 써가며 오랜 연구가 필요했고, 대장간에서 저만의 답을 찾을 수 있었죠. 전시품 중 20년 전 작업한 ‘백자 면치기’ 오브제가 있어요. 오랜만에 꺼내 보니 작업 스타일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고 터프하더라고요. 요즘 작업은 한결 부드럽고 유연해졌거든요.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작품을 통해 비교해보는 것도 이번 전시의 재미예요.

지난한 과정도 견디게 하는 도예 작업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흙을 만지는 일은 중독성이 있어요.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과정 자체가 수행처럼 느껴지죠. 108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흙판을 치면 목탁처럼 ‘탁탁’ 소리가 나는데, 속도를 달리할 때마다 생기는 리듬에서 묘한 희열을 느껴요. 분명 고된 노동이지만, 그 안의 리듬과 반복을 즐길 수 있어야 도예를 오래 이어갈 수 있죠. 흙도 정말 좋아요. 같은 흙을 사용해도 작가마다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잖아요. 물의 양에 따라 액체처럼 흐르기도 하고, 손의 압력에 유연하게 형태를 바꾸기도 해요. 하나의 재료가 이처럼 다양한 상태로 변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모든 생명의 토대인 흙이 단단한 도자가 된다는 사실 역시 언제나 경이롭죠.
<시간들: 이정미>는 8월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 로얄&컴퍼니의 갤러리 로얄에서 열립니다. 9월과 10월에는 각 이틀간 우정욱 셰프의 요리를 작가 작품에 담아 코스로 내는 예술 미식회가 진행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