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REAMER’S WORLD

머릿 속으로만 할 법한 기이한 상상을 위트있게 펼쳐낸 공공 예술가 알렉스 친넥

머릿 속으로만 할 법한 기이한 상상을 위트있게 펼쳐낸 공공 예술가 알렉스 친넥

실재와 환상 그 사이에 머무는 공공 예술가 알렉스 친넥은 마치 몽상가의 머릿속처럼 흐트러진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기이하고도 유쾌한 위트로 풀어낸다.

2년 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작품 ‘A Sprinkle of Night and a Spoonful of Light’. 마치 옷처럼 지퍼를 내리면 하얀 내부가 나타나는 서사를 부여했다. photography by Marc Wilmott

 

자신이 구현한 구조물 옆에 서 있는 알렉스 친넥.

 

구부러진 도로, 배배 꼬인 소화전과 괘종시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처럼 녹아내리는 저택 그리고 종이처럼 찢겨진 빌딩. 그저 한 번쯤 머릿 속에 그려봤을 법한 기이한 상상의 단면이 영국 한복판에 펼쳐졌다. 모두 공공 예술가 알렉스 친넥 Alex Chinneck의 손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그는 기둥이나 건물, 소화전 등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공공 설치물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착시효과를 부여한다. 마치 미끄러져 흐르는 듯한 파사드의 ‘From the Knees of My Nose to the Belly of My Toes’, 뒤집힌 채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송전탑을 형상화한 ‘A Bullet from a Shooting Star’ 등을 사진으로 처음 접하는 이들이라면 두 눈을 의심할 정도. 엔지니어, 건축가, 목수,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 및 전문가와 협력해 존재하는 건물에 비현실적인 환상을 부여하는 그와 대화를 나눴다.

 

건물의 중앙부를 부숴 공중부양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낸 ‘Take My Lightning but Don’t Steal My Thunder’. photography by Jeff Moore

 

 

다양한 규모의 공공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첫 시작이 궁금하다. 8년 전, 버려진 공장 정면에 유리 조각 1248개를 설치했는데, 그 중 312개는 동일한 형태로 깨진 것처럼 고안한 야외 조형물을 완성했다. 그게 공공 미술작업의 첫 시작이었다. 그 후로 영국 전역에서 점점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물론,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처음이 그러하듯 페인팅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하나씩 완성해가는 과정 자체가 좋아서 미술이라는 장르에 반했고. 하지만 모든 예술가에게 기회가 돌아올 만큼 현실은 공평하지 않더라.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수단을 더욱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조각, 건축, 무대 연출 같은 수단으로 시야를 넓혔다. 나는 이제껏 단 한번도 미술이라는 장르를 떠난 적이 없다.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얼핏 렌더링 이미지이지 않을까 의심했을 만큼 머릿속에서만 일어날 법한 환상이 현실로 나타난 듯했다. 세상을 좀 더 마법처럼 만들고자 익숙한 물질이나 물체, 상황에 일말의 환상을 엮어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문제로부터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 문제를 떠올리지 않게끔 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을 보라. 현실과 환상, 사실 그리고 동화를 명확히 판단할 수 없는 행복한 능력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성장하면서 이러한 능력을 잃어간다. 좋은 예술은 논리를 따르지만 위대한 예술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논리적인 현실과 그렇지 않은 환상을 구분할 수 없게끔 하는 나의 일련의 행동이 현실로부터 순간적이지만 희망찬 휴식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사람들이 잠시나마 공명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사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환상은 아니다. 용해, 지퍼, 꼬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뒤튼다. 주변을 둘러싼 일상적인 설치물이나 건축물에서는 일말의 유연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렇게 무뎌지는 거다. 이들에 기이한 유연성을 부여해 주변을 교란시키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늘 당연히 여긴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비일상적인 인상을 부여한 것이다. 사람들한테 주변을 긴밀하게 돌아볼 수 있는 순간을 주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건물을 구부리거나 집을 녹이고 때로는 일상적인 물건을 꼬는 듯한 작업은 모두 이러한 유연성, 나아가 비일상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건물이 뒤집힌 듯한 기이한 형태를 구현한 ‘Under the Weather but over the Moon’. photography by Stephen O’Flaherty

 

photography by Charles Emerson

 

기둥과 설치물을 꼬아놓은 듯 매듭 짓는 위트를 발휘한 작품. 소화전은 젤리로 제작됐다. photography by Marc Wilmott

 

특정한 상태나 순간을 구현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변하지 않고 그저 머물러 있는 것들에서는 어떠한 신선함과 자극도 느낄 수 없지 않겠나. 우후죽순 솟아나 있는 건물, 도로 한 켠에 놓인 소화전이나 방지턱 등 변화나 주목할 만한 현상 없이 그저 매일 보는 그 상태 그대로인 주변의 것에 우리가 어떠한 반응과 지각 없이 무뎌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들에게 비현실적인 위트를 잠시 불어넣는 것이다. 한번은 왁스로 만든 문과 7500여 개의 왁스 벽돌로 이층 집을 지은 적이 있다. 집은 45일 동안 천천히 녹았다. 이 조각은 매일 모습이 바뀌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기차역 근처의 혼잡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날마다 통근자들이 그 곳을 지나치며 매일 달라지는 건물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매일같이 다니는 길이지만 그 건물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을 지켜보면서 그들에겐 자신도 모르게 건물에 대한 서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설치했던 작품 ‘A Sprinkle of Night and a Spoonful of Light’ 또한 마치 옷처럼 건물에 지퍼를 달아 여닫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나는 거창한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의 환상을 불어넣어 우리 주변의 것에 흥미로운 위트와 서사를 불어넣고 싶을 뿐.

 

그래서일까, 흘러내리는 건물, 실컷 꼬인 소화전, 곧 곤두박질칠 송전탑 등을 마주한 이들은 종종 당신을 몽상가라 표현한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웃음). 그렇지만 나는 실행하는 몽상가다. 그저 앉아서 아무런 에너지나 노력 없이 머릿속에서나 기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이내 지워버리는 이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머릿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흥미로운 상상을 물리적으로 현실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다. 상상력은 프로젝트의 씨앗을 뿌리지만, 꽃을 피우는 데는 몇 년이라는 인고와 끈기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작업의 규모가 커서 협업은 매번 필수적일 텐데. 비단 작업의 규모뿐 아니라 사용되는 재료나 기술 등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작업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협업을 제안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의 기술과 아이디어가 어우러지는 작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작업에 있어 프로젝트의 색깔을 잃지 않게 잘 조율해야 하지만, 늘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작업에 임하는 것은 짜릿하다.

 

어려움은 없었나? 타협 없는 진보는 없지 않은가. 당연히 부딪힐 때는 있다. 그러나 타협점을 찾는 일을 두려워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일을 망치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평형추를 활용해 공중에 갈라진 상층부가 떠 있는 듯한 착시효과를 연출한 것. photography by Chris Tubbs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공개한 지퍼 시리즈. 열린 지퍼 틈 사이로 다채로운 컬러의 LED가 쏟아져나오는 대비 효과를 준 것이다. photography by Marc Wilmott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 편인가? 외부와 내부 모두에서 얻는다. 외부적 영감은 자주 걷는 거리 혹은 낯선 여행에서 마주하는 건축 등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 심지어 우연찮게 들려오는 소음에서도 찾아온다.  내부적인 영감은 쉽게 말해 에너지라고 볼 수 있겠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야 한다는 강박과 스스로에게 불어넣는 동기부여가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거친 파도 위에서 더 힘차게 닻을 잡듯 끝없이 몰아붙이는 내면의 갈망이 나를 늘 새로운 작업으로 인도한다.

 

한 인터뷰에서 ‘위험 요소를 꺼리지 않는 것과 야심’을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요소이자 당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두 가지 메커니즘이라 말한 것을 봤다. 당당히 개척자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 없이 발전하는 건 없고 생산이 간단할수록 모방은 쉬워지지 않겠나. 남들이 꺼리는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진득이 밀어 붙일 수 있는 야심은 작품을 보다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라 생각한다.

 

 

지퍼를 내리면 건물 내부가 보이도록 고안한 작품 ‘Open to the Public’. photography by Marc Wilmott

 

건물이 마치 미끄러지듯 무너지는 모습을 구현한 ‘From the Knees of My Nose to the Belly of My Toes’. photography by Stephen O’Flaherty

 

코로나19는 지역사회의 연결을 느슨하게 했다. 서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공공 예술이 느슨해진 연결고리를 이어줄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예술은 많은 문제로부터 우리를 환기시킨다. 때론 그 문제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게 하거나 잠시라도 우리를 쉴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특히 요즘과 같은 시기에 더욱 환상을 불어넣는 일을 고집한다. 특히 공공 예술은 마치 열쇠처럼 우리가 고립의 껍데기를 부수고 나올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예술만이 전할 수 있는 즐거움은 우리가 오래도록 안고있는 이 고통을 덜어낼 수 있을것.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가? 매일 실내와 실외 환경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예술 작품을 개발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더군다나 이렇게 고립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는 내게는 더없이 긍정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페인팅이나 조각이 될 수도 혹은 이제껏 시도하지 않은 형태로 실현될 테다. 물론 여행에서 비롯되는 영감이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지는 않지만, 내 프로젝트가 어느 날 한국 한복판에 떡하니 세워질지도 모를 일이다(웃음).

 

A Sprinkle of Night and a Spoonful of Light’는 주변이 어두워지면 다양한 색의 LED가 교체되도록 설계됐다. photography by Marc Wilmott

 

매듭 시리즈의 일환으로 선보인 ‘Growing up Gets Me down’. photography by Charles Em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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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집으로

점점 늘어나는 홈시어터에 대한 관심과 소비

점점 늘어나는 홈시어터에 대한 관심과 소비

사람들이 환경적 요인에 따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자 공간에 관련된 관심과 소비가 늘어났다. 여기에 매체의 발달이 가세해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홈 시어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JtKLab 설계실, 청음실.

 

필자는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터라 마니아적 관점에 의한 필수 요소를 점검하며 노하우를 살려 클라언트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상업 및 주거 공간에 적용해왔다. 홈 시어터를 설계하다 보면 극장보다 좋은 환경에서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직업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간적 속박에 따른 몰입도와 빔프로젝터에 의해 반사된 빛을 보는 데 있다고 본다. 물론 의자에서부터 몸까지 느껴지는 저역도 무시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주거 환경에서는 대형 TV를 통해 영상을 접하게 되는데, 패널을 통해 나오는 직접적인 빛은 인공적인 느낌이 나고 눈도 쉽게 피로해진다. 심지어 장면 사이의 연계성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프로젝터를 통해 투사된 빛에 의해 보여지는 영상은 여전히 멋스럽게 마음을 움직인다. 홈 시어터 및 리스닝룸 혹은 거실을 설계하며 늘 고민하게 하는 요소가 TV다. 시청 시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대형화 될수록 좋지만 평상시는 벽의 대부분을 제조회사마다 브랜딩한 검은 프레임이 차지한다. 공간감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벽의 일부처럼 건축적으로 보이도록 유도한다. 프로젝터를 쓸 경우에는 스크린을 능숙하게 천장에 숨길 수 있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상영시 어떤 TV보다 스케일이나 분위기가 더 멋스러운 느낌을주며, 거기에 공간적인 트릭을 살려 잘 배치하면 근사하기까지 하다. 이때 TV나 프로젝터를 막론하고 아주 중요한 요소는 복잡한 기기(라우터, 플레이어 혹은 게임기, 전원부)를 벽이나 가구 속에 잘 숨기고, 장비와의 복잡한 선도 완벽하게 숨겨야 한다. 또한 숨길 때에도 장비의 유지 보수를 위한 배려도 빠뜨려서도 안된다. 혹시 한 가지 실수라도 생겨 마감이 다 끝난 후 몰딩을 설치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라호텔 스타인웨이 링돌프 사운드 부티크.

 

사람에게 헤어스타일이 중요하듯 공간에서의 천장은 상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집단주거에 볼 수 있는 효율중심의 일반적인 우물 천장(흥미로운 단어라고 생각한다)은 공간을 일률적으로 건조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잘 설계된,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적인 마감재의 사용과 그리드를 나눈 천장은 음향 효과를 위한 복잡한 스피커 배치를 부드럽게 녹일 수 있다. 물론 이 정도는 마니아 수준의 홈 시어터 구성일 때 고려되는 요소지만 천장에 스피커를 설치하지 않을지라도 천장 디자인은 중요하다. 또한 간단한 시스템으로는 최소의 간접 조명과 사운드 시스템만 갖추면 극장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소리의 반사를 고려한 천장 디자인을 공간에 녹이기까지 한다면 극장보다 훨씬 좋은 경험을 선사한다. 극장의 사운드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세팅되어 있지만 개인 주택에서는 사용자에게 극도로 튜닝된 사운드를 선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다 극적인 음향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적화된 가구는 사용자를 최고의 극장 경험으로 이끈다.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너무 편한 소파는 쉽게 잠이 들 수 있으니, 적절한 자세를 유지시키며 몰입도를 높여줄 수 있는 라운지 의자나 1~3인용 소파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너무 매스가 크면 공간을 압도해서 밸런스가 무너질 수 있다. 이렇듯 홈 시어터의 중요한 요소는 공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공간 설계 시 디자이너와 협의해서 충분히 자신한테 맞는 설계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여러 장비가 한 곳에 설치되기 때문에 적절한 바운더리와 다른 공간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되고 디자인되어야 한다. 대화와 함께 공통 관심사가 줄어들고 있는 요즘, 가족끼리 좋은 영화나 다큐멘터리 또는 콘서트를 즐기면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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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태(JtKLa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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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와 비움의 시

서울 옥션 강남센터에서 개최된 건축가 승효상과 최덕주 작가의 전시 '결구와 수직의 풍경'

서울 옥션 강남센터에서 개최된 건축가 승효상과 최덕주 작가의 전시 '결구와 수직의 풍경'

덜어내고 비워내면서 비로소 걸러낸 간결함. 그 이면에 집요하게 자리한 치열함과 긴장감까지. 건축가 승효상의 가구와 최덕주 작가의 조각보가 구현한 전시 ‘결구와 수직의 풍경’은 한 편의 시처럼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을 품고 있었다.

최덕주 작가의 모시 옥사 가리개 뒤로 승효상 건축가가 디자인한 목가구 시리즈가 보인다. 가구를 완전히 가리지 않는 조각보와 묵직한 존재감의 가구가 절묘한 합을 이룬다.

 

은은한 색을 입고 춤을 추듯 일렁이는 조각보와 그 틈으로 묵직이 자리한 가구들. 군데군데 비워둔 듯 하지만 조화를 이루며 기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했다. 지난 6월 29일부터 한 달여간 서울 옥션 강남센터에서 개최된 전시 <결구와 수직의 풍경>을 처음 접했던 순간의 인상이다. 웰콤시티, 수백당 등의 건축물과 나아가 <빈자의 미학>을 통해 건축의 본질을 주창한 건축가 승효상이 그의 아내이자 조각보 작가 최덕주와 함께 특별한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동시에 이번 전시는 ‘이로재 오브젝트’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승효상 건축가의 가구 컬렉션을 마주할 수 있었다. 차분한 목가구와 이를 감싸는 듯한 조각보의 조화가 구현한 평온한 풍경 속을 조용히 거닐던 두 사람을 마주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2인전을 선보인 승효상 건축가(오른쪽)와 최덕주 작가(왼쪽.)

 

두 분이 함께한 전시는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승효상(이하 승) 7년 전, 서울 옥션에서 가구 전시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리빙, 다이닝 등 섹션을 구분해야 하는데, 여타 가구 페어처럼 칸막이로 구획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천을 활용해 구역을 나눴고 가구에 관한 설명을 썼다. 그때 천이 아니라 보자기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덕주 작가의 이전 전시의 큐레이션을 도와준 적도 있다 보니 다시금 전시 제안을 받았을때, 그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최덕주 작가의 조각보와 함께 전시를 꾸려야겠다 싶었다. 이번 전시는 그에 대한 결과다.

 

단단한 가구와 얇게 날리는 조각보. 얼핏 대조적으로 보이는 두 요소를 한데 모아놓고 보니 그 조화가 절묘하다. 대개의 조각보 전시는 그저 오브제처럼 벽면에 붙여 진열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아무래도 건축 설계를 하다 보니 조각보가 공간에 기여할 수 있는 힘을 고려하게 되더라. 그래서 이전에 생각했듯 조각보로 공간을 구획했다. 때로는 오브제처럼, 때로는 공간을 나누는 칸막이처럼 공간을 구획하다 보니 미처 보지 못한 조각보의 물성이 자연히 드러났다. 바람에 은은히 일렁이는 모습, 조각보 너머로 보이는 가구와의 묘한 조화를 보며 하나의 오브제로 존재감을 발휘하다가도 때로는 주변과 합일되는 매력이 드러난다. 덕분에 더욱 특별한 전시가 완성됐다.

 

‘결구와 수직의 풍경’이라는 전시명도 인상적이다. 수직의 풍경은 말 그대로 손으로 짜서 만드는 풍경을 의미한다. 내게는 촘촘히 짜인 개개의 조각보가 마치 풍경처럼 보였다. 내가 만드는 가구는 결구로 이루어진 것이다. 각 부재와 부재를 연결시켜서 짜맞춰 구조를 만드는 게 결구다. 부재와 부재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구조를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재 중 어느 하나라도 그 균형이 무너지면 부서지고야 만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가구일지 몰라도 실은 투쟁의 산물인 셈이다. 내게는 결구와 수직이 지닌 본질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보와 가구 둘 다 만들기 전에 치밀한 계획이 필요한 작업을 거친다. 천과 천 사이를 잇는 바늘을 손으로 연결시키고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개개의 조각을 실로 꿴 조각보 또한 떨어지려는 힘과 이으려 하는 힘이 균형을 위해 투쟁한다. 가지고 있는 재료와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균형과 조화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오는 평화의 산물인 셈이다.

 

 

최덕주 작가의 조각보에 밴 여러 색은 제각기 튀지 않고 서로를 보완하는 조화를 보여준다.

 

전시장 한 켠에는 승효상 작가가 수기로 완성한 설계도안이 전시되어 있다.

 

장식과 수사를 멀리한 가구는 마치 정수 같은 간결한 멋을 자랑한다.

 

처음 조각보를 접했을 때는 회화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풍부한 질감과 색을 표현하기 위해 몇 번이고 덧대어 색을 입히듯 과정 하나하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고로움이 느껴졌다. 최덕주(이하 최) 어렸을 적 할머니랑 같이 살았다. 옛 어른들은 당신들의 옷을 직접 지어 입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걸 직접 봐왔고, 그런 할머니의 작업이 너무 좋았다. 이후 직접 선생을 찾아 조각보 만드는 작업을 배웠다. 마흔 중반부터 시작했는데,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이뤄지는 염색이나 감침질 같은 행위가 결코 단순하지 않더라. 염색 후 천이 숙성될 때까지 오랜 기다림의 시간과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채워가는 인내가 응당 필요할 수밖에 없다.

 

마치 긴 레이스와 같은 작업처럼 보인다. 레이스는 길어질수록 처음의 마음가짐을 잊어선 안되지 않나. 어떤 자세로 작업에 임하는가? 검이불루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아야 하며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을 매번 새긴다. 물론 당연히 만드는 과정에서 더뎌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도로 덮어놓는다. 이내 다른 작업을 진행하다 문득 다시 꺼내보면 더뎌졌던 이유가 정리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 같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마음의 평정이 없으면 바늘땀이 굉장히 우스워진다. 나중에 보면 당시의 마음이 그대로 읽힌다. 불안했거나 번잡스러웠던 내면이 바늘땀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꽤 많이 작업을 진행했더라도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작업할 때는 늘 평정과 평안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곧고 올곧은 바늘이 나온다. 마음을 다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섬세함과 우직함이 공존해야 하는 정직한 작업이라고 할까(웃음).

 

천을 고르는 과정에서부터 굉장히 신중하다고 들었다. 주로 명주 비단천을 쓰는 편이다.여름에는 모시나 베도 종종 쓴다. 때로는 종류를 차치하고 정말 좋은 천을 마주할 때가있다. 전시에 걸려 있는 안동포처럼 구태여 염색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지닌 힘이 있는 천처럼 말이다. 소재 자체가 지닌 힘을 존중하는 편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균형과 조화라는 본질을 지녔다는 공통점에 걸맞게 조각보와 가구라는 두 요소가 묘한 긴장감을 이루며 공존한다.

 

조각보는 뛰어난 생활성이 돋보이는 물건이다 보니 활용도도 높은 편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끈이 달린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혼사에 쓰이던 예단보를 활용한 것이다. 예물도 싸매도 되고, 지금처럼 장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공예는 생활과 공명하는 예술이다. 이불을 싸면 이불보가 되거나 옷을 싸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화려한 장식이나 수사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가장 좋은 디자인은 결국 단순함에서 오는것 같다. 다만 색에 있어서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편이다. 중요한 건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좋은 방법은 자연에서 나는 재료를 활용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있으면 어떤 색의 꽃도 모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듯이. 그런 것처럼 천연 염색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색을 함께 써도 튀지 않고 조화롭게 보이는 묘한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한 번 염색을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이 따라 색이 꽤 날아가는데 이를 거치면 굉장히 편안한 채도의 색이 나온다. 색을 여러가지 섞더라도 편안함은 유지된다. 화이불치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단순함은 선택하고 버리는 작업을 수없이 거친 결과물이지 않나? 그렇다. 전통적인 한국의 미는 결국 절제하고 덜어내는 비움이다. 머릿 속에서 스케치를 하다 대략적인 구성이 완성되면 천을 다 꺼내본다. 그 중 필요없는 색을 제한다. 색을 고르는 과정 또한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여러 색 중에서 원하는 색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고르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필요한 색과 없는 색이 또 다시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이 있다. 그걸로 작업을 한다. 바느질 작업을 하다가도 계속해서 덜어낸다. 비우고 절제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야만 좋은 조각보가 나올 수 있다.  시인 폴 발레리는 명료함만큼 신비로운 게 없다고 했다. 아주 간단하고 딱 부러지게 명료한 것이 가장 신비롭다는 말이다. 자신이 없을수록 말이 많아지고, 실력이 없을수록 선은 덧대어진다. 진정한 단순함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치열한 투쟁을 거치며 걷어내고 버리다 도무지 버릴 것이 없을 때의 상태다. 모든 것을 닦아내야 정수처럼 명료하게 나온다는 뜻이다. 그게 가장 아름다운 상태다. 가구도 마찬가지다. 물론, 단순한 가구가 번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당혹스러움이 의문과 사유로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화려한 장식과 수사는 그럴 여지조차 쉬이 내주지 않는다. 건축 또한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 삶에 직결되는 문제이니만큼 선 하나로 삶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음을 무겁게 인지해야한다. 그 불안을 이고 최대한 고심해서 덜어내는 작업을거쳐야한다.

 

검소하리만치 군더더기를 배제한 외관은 전시의 부제처럼 수도원의 가구와도 흡사한 인상을 준다.

 

창에 걸린 채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명주 걸개.

 

마치 도시와 건축을 분리해서 볼 수 없듯, 건축과 가구도 긴밀한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짓는다는 말이다. 건축이 단순할 수록 삶은 도드라진다. 그래서 건축은 단순한 배경으로 존재한다. 사는 이에 맞춘 건축이어야 하지, 건축에 사람을 맞춰선 안된다. 가구도 화려함을 입어버리면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행위가 가려진다. 그래서 가구도 단순해야 된다. 예전엔 지금처럼 기능에 따라 서재나 침실 등으로 공간을 구획하지 않았다. 이런 공간에는 그에 따른 목적을 위한 수사가 붙여진 가구가 놓일 수 밖에  없다. 장식이 화려한 가구는 그 자체의 조형미만 부각된다. 때문에 다른 요소와의 긴장과 조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공간이 사람의 삶과 조화로울 수 없듯 가구도 이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무게를 지탱하고 부재 간 조화가 있는, 그저 비워두고 기본적인 목적만을 지닌 가구가 좋은 가구이지 않을까.

전시의 부제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수도원의 가구라 이름 붙인 것처럼 수도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구와도 일정 부분 닮아 있는듯 하다. 수도원이라는 것은 물질과 육체, 정신도 버리고 항상 자신을 절박한 극한으로 몰아서 자기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게 만드는 곳이다. 수도사들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 심지어 내면의 욕망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 끊임없는 투쟁과 긴장의 상태가 이 가구와도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기능성에 많은 초점을 맞추는 요즘 가구와는 색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푹신한 등받이와 좌석이 없어 얼핏 불편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웃음). 편의와 효율, 기능이라는 것은 20세기 모더니즘이 창조해낸 용어라 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과연 기능적인 것이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때로는 불편함이 훨씬 우리를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염없이 자신을 편안한 상태로 두면 안주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된다. 조금은 불편해야 비로소 자기를 인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일말의 계기가 생긴다. 누군가가 이러한 이야기에 즐거운 불편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퍽 마음에 든다.

 

서양의 건축가들은 건축뿐 아니라 가구를 만드는 등 건축에 기반한 활동 반경이 굉장히 넓은 데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건축가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번 ‘이로재 프로젝트’는 무척 반갑고 신선했다.  서양 건축가들은 건축은 물론 도시 설계부터 가구 설계까지 다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급격한 개발 때문에 건축물을 지어 올리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도 그래서는 안된다. 가구나 도시 등 우리가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없으면 결코 좋은 건축이 나올 수 없다. 내가 설계한 공간에는 항상 그에 맞는 가구를 디자인하고 어울리는 장소가 있거나 클라이언트가 원하면 늘 두었다. 원하지 않아도 계속 권유했다. 사실 이번 전시는 내가 만든 가구를 소개하는 자리만은 아니다. 지금 건축가들에게 본래의 직능에 대해 일깨워주고 싶었다. 주어진 것만 설계하지 말고 생각의 범위를 확장해서 넓히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선동을 하는 거다(웃음).

전시 이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건축가들의 걸작이 만들어지는 때가 딱 내 나이대다. 삶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이 있어야 좋은 건축이 나오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더 잘 할 수 있는 게 건축이라고들 하니 말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건축을 하는 게 목표다.  사실 내 작업은 누구에게 내보이려는 것은 아니다.작업을 통해 나의 평안과 안정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지금도 마음은 한결같다. 특별한 계획 대신 그저 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하게 해나가지 않을까. 치열하게.

다음 전시에 대한 기대를 가져도 될까. 승 · 최 반응이 좋다면야 가능하지 않겠나(웃음).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김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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