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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시작된 미식 철학이 서울의 사계절과 식재료를 만났을 때. ‘사피드 서울’ 이국진 셰프는 알랭 뒤카스의 자연주의를 한국 식재료로 새롭게 해석하며, 서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미식의 방향을 제시한다.

볶고, 말리고, 우려낸 양송이버섯의 풍미가 모두 담긴 스타터.

세계적인 셰프 알랭 뒤카스와 글로벌 패션 브랜드 우영미의 협업으로 탄생한 사피드 서울. 서울 이태원 우영미 플래그십 스토어에 자리한 이곳은 알랭 뒤카스가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지속 가능성과 창의성, 현대적인 프렌치 감각을 바탕으로 한 한국 식재료의 향연을 선보이며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피드 서울의 총괄셰프 이국진이 요리를 대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재료가 지닌 본연의 맛과 향, 질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 줄라이 오픈 멤버로 시작해 CGV 압구정 씨네카페 헤드셰프, 파크 하얏트 서울을 거쳐 라 카테고리와 메종 드 라 카테고리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알랭 뒤카스의 요리 철학을 한국의 식재료로 풀어낸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사피드 서울에 합류했다. “유려한 기술을 보여주는 것보다 재료가 가진 맛과 향, 식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을 먼저 고민합니다.” 프렌치 조리법을 기반으로 하되, 한국에서 경험해온 식재료와 맛에 대한 기억을 더하는 것. 이국진 셰프가 생각하는 사피드 서울의 요리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사피드 서울 매장 전경.
재료 본연의 풍미를 중시하는 사피드 서울의 이국진 셰프.

‘사피드 Sapid’는 풍미가 있는, 맛이 풍부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알랭 뒤카스가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나튀랄리테 Naturalité’는 재료 본연의 맛을 존중하는 자연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버터, 크림, 설탕의 사용을 절제하고 채소와 곡물, 지역의 제철 식재료를 중심에 두는 것 또한 이러한 철학의 연장선이다. 정해진 레시피를 고수하기보다 장소와 계절에 따라 식재료와 조리법을 달리하는 노마드 퀴진 Nomad Cuisine 역시 알랭 뒤카스가 추구하는 중요한 방향이다. 사피드 서울은 이 철학을 서울이라는 장소 안에서 다시 풀어낸다. 프랑스 요리를 그대로 옮겨오는 대신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채소와 곡물, 해산물, 발효 식재료를 중심에 두고 프렌치 테크닉으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 알랭 뒤카스가 한국의 시장과 식재료를 직접 경험하고 연구한 뒤 서울만을 위해 개발한 15개 레시피는 이러한 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스타터, 메인, 디저트가 각각 5가지로, 총 15개 메뉴에는 김치와 두부, 흑미와 곡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가 등장한다. 올리브오일과 버터를 제외한 전체 식재료의 90% 이상을 국내산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중요한 기준이다. 특정한 고급 식재료를 고집하기보다 계절에 따라 가장 신선한 재료를 찾고, 산지와 품종, 생산자의 철학은 물론 지속 가능성까지 종합적으로 살핀다.

마이 알레의 식물이 놓인 입구.

그 차이는 접시 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시그니처 메뉴인 마리네이드 도미와 당근 김치 소스는 익숙한 재료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요리다. 당근으로 만든 김치를 곱게 갈아 접시 위에 깔고, 레몬즙과 생강즙, 허브로 염장한 도미를 올린다. 여기에 셀러리와 파슬리, 고수를 활용한 허브 소스를 더한다. 당근의 은은한 단맛과 도미의 담백함, 그리고 허브 향이 어우러지며 입안에는 깔끔하고 산뜻한 여운이 남는다. 한국적인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익숙한 한식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것. 사피드 서울이 한국의 식재료를 해석하는 방식은 그 미묘한 경계에 있다. 단호박, 스트라치아텔라 치즈와 호박씨 프랄린은 채소가 가진 풍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요리다.

한국을 찾은 알랭 뒤카스가 직접 항공편으로 공수해온 18세기 식물표본. 

오븐에 구워낸 단호박에 스트라치아텔라 치즈를 곁들이고, 호박씨로 만든 프랄린을 더해 고소한 풍미와 바삭한 질감을 끌어낸다. 여기에 시금치와 루콜라를 활용한 허브 소스가 산뜻한 향을 더한다. 단호박의 달큰함과 치즈의 부드러움, 호박씨의 고소함, 허브의 향이 각기 다른 결을 이루면서 한 접시 안에서 풍부한 맛의 향연을 만든다. 채소를 중심에 둔다고 해서 요리가 단순하거나 가벼워지지 않는다. 재료의 특성을 정확하게 읽고 서로 다른 풍미와 질감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유일무이한 맛이 완성된다. 버섯, 햄프 두부와 헤이즐넛은 육류 없이도 충분한 밀도와 감칠맛을 끌어올린 요리다. 헤이즐넛 프랄린 위에 볶은 양송이버섯과 말린 버섯을 올리고, 햄프씨로 만든 두부를 곁들인 뒤 진하게 우린 양송이버섯 콘소메를 붓는다. 버섯의 깊은 풍미와 두부의 부드러운 질감, 헤이즐넛의 고소함이 겹쳐지며 맛의 깊이를 더한다. 스펠트 통밀, 새우와 무를 함께 구성한 메인 요리에서는 곡물과 채소, 해산물이 각각의 역할을 분명히 한다. 닭 육수로 익힌 스펠트 통밀 위에 오븐에 익힌 국내산 무와 숯불에 구운 새우를 올리고, 새우 머리로 만든 소스와 무청을 활용한 소스를 곁들인다. 

호박씨 프랄린, 스트라치아텔라 치즈를 곁들인 단호박.
 당근 김치 소스와 당근 라페를 곁들인 마리네이드 도미.

각 재료의 풍미는 또렷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완벽히 어우러져 하나의 밀도 있는 맛을 완성한다. 이러한 요리에는 사피드 서울이 추구하는 제로 웨이스트의 개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좋은 식재료를 선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재료를 얼마나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새우 살을 사용하고 남은 머리는 소스로 다시 끓여내고, 단호박에서 발라낸 씨는 프랄린으로 만든다. 식재료의 껍질과 뿌리, 부산물까지 가능한 범위에서 다른 조리에 연결한다. 재료를 끝까지 사용하는 일은 단순히 폐기물을 줄이는 방법에 머물지 않는다. 한 가지 식재료가 가진 다양한 맛과 질감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요리로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피드 서울이 말하는 자연에 대한 존중은 이처럼 주방에서 매일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선택으로 이어진다.

디저트도 범상치 않다. 바닐라, 두유와 프랄린 에클레어는 클래식한 프랑스 디저트의 형태를 바탕으로 퀴노아와 두유를 활용해 새로운 결을 더한 메뉴다. 헤이즐넛 프랄린과 바닐라 빈, 두유로 만든 커스터드 크림을 채우고, 퀴노아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 풍미와 질감에 변주를 준다. 특히 퀴노아를 데친 물은 슈 반죽에 사용하고, 데친 퀴노아는 말려 장식으로 올린다. 하나의 식재료를 여러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재료가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살펴보는 셈이다. 사용된 재료가 나열식으로 기재된 메뉴명 역시 사피드 서울의 특징이다. 접시 위에 놓인 재료를 하나씩 발견하고, 서로 다른 맛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이곳에서 음식을 즐기는 방법이다.

제각기 다른 빈티지 램프가 다채로운 테이블 공간.
식전빵과 함께 제공되는 프랑스산 버터. 

이국진 셰프가 그리는 목표는 분명하다. “서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리 잡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해외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서울에서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레스토랑으로, 국내 고객에게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사피드 서울의 메뉴는 하나의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식재료와 생산자를 만나면 그에 맞춰 요리 역시 달라진다. 총 15개의 레시피는 서울이라는 장소와 한국 식재료를 바탕으로 구축한 사피드 서울의 방향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계절에 따라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고, 이를 알랭 뒤카스의 나튀랄리테와 노마드 퀴진 안에서 해석해나갈 예정이다. 음식에서 시작된 사피드 서울의 이야기는 공간으로도 확장된다. 알랭 뒤카스가 이어온 미식에 우영미의 감각이 더해져 음식과 패션, 아트와 디자인이 하나의 경험으로 연결된다. 우영미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은 메뉴판을 비롯해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형 패브릭 천장이 공간을 압도한다. 입구에서부터 매장 곳곳에 놓인 마이 알레의 식물들이 싱그러운 분위기를 더하고, 1970년대 무라노 빈티지 램프와 프랑스에서 공수한 지앙의 접시, 알랭 뒤카스가 선정한 한국 도자 작가 권재우의 그릇, 벽을 장식한 수십 점의 18세기 식물표본이 서로 다른 시대와 개성을 드러낸다.

부드럽게 익힌 스펠트 통밀에, 숯불에서 구운 새우와 무를 올린 메인 요리.
 바삭한 퀴노아를 뿌리고, 바닐라 두유 크림을 채운 에클레어.

알랭 뒤카스의 철학을 서울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프랑스 요리를 그대로 옮겨오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채소와 곡물, 해산물과 발효 문화가 가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프렌치 테크닉과 자연주의를 통해 새로운 맛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좋은 재료를 선택하고, 그 본질을 흐리지 않으며, 하나의 식재료가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탐구하는 것. 파리에서 출발한 사피드의 철학은 서울의 계절과 식재료를 만나 새로운 미식의 언어로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수식보다 재료 자체에 집중하는 이국진 셰프의 태도 역시 그 언어의 중심에 있다. 결국 사피드 서울이 말하는 새로운 미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재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일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