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바네사 브루노는 딸과 함께 파리 마레 지구의 유서 깊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1650년에 세워진 건물로 원래 루이 14세의 전용 호텔이었던 이곳은 보헤미안의 자유로움과 모던함이 어우러져 있다. 그녀의 패션에서 돋보이는 파스텔 색상과 여성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녀의 낙원으로 들어갔다.
1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오래된 구스타브풍의 벤치가 손님들을 환영한다. 바네사는 이 벤치를 생투앙의 벼룩시장에서 찾아냈다. 과거의 연한 초록색 실크가 그대로 살아 있다. 커다란 현관에 달린 커튼은 연보랏빛 벨벳 소재다. 2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네사 브루노. 3 핀란드의 예술가 마리 사나 Marie Sanaa의 작품 아래로 소나무로 만든 협탁이 자리 잡고 있다. 진한 보랏빛 튤립이 하얀 벽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4 하얀 선반 위에는 가족들의 사진이 담긴 현대적이면서 고풍스러운 액자가 놓여 있다. 작은 수첩에는 여행을 다니면서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화병에 꽂혀 있는 알리움이 직선을 이루는 다른 소품들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최근 뉴욕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네사 브루노는 숨 고를 틈 없이 도쿄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도쿄에 바네사 브루노 숍이 여러 군데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사무실이 있는 11구역에서 집으로 막 돌아온 그녀. 흰 청바지에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라 뒤레 Ladurée의 마카롱과 홍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바네사 브루노는 덴마크 출신의 어머니와 이탈리아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줄곧 프랑스 파리에서 자랐다. 바네사 브루노의 어머니는 1960년대에 파리에서 모델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프랑스 남부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는 임마누엘 칸과 카사렐 Emmanuel-Kahn and Cacharel의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는 데 참여한 인물이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패션을 가까이 두고 성장한 바네사 브루노는 캐나다 여행에서 큰 영감을 얻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숍을 열고 뒤이어 프랑스 파리의 백화점 봉 마르셰에 컬렉션을 선보이며 그녀는 가파르게 성장해 나갔다. 이어서 그녀는 비엘르 뒤 탕플 Vielle du Temple 거리에 숍을 하나 더 열었다.
바네사 브루노가 마레 지구에 마련한 아파트는 크기가 753스퀘어피트(약 21평)에 불과하지만 일조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파리 시내와 국립도서관이 한눈에 보이는 경관을 자랑한다. 바네사에게 행운이 따랐는지 그녀가 아파트를 계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층에 살던 이웃이 이사를 가면서 자신의 아파트를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바네사는 파리에서는 드물게 한 층 전부를 누리고 사는 소유주가 됐다.
1 유리문을 지나가면 딸 룬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그곳에는 룬의 전용 화장실과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방이 있다. 오래된 의자는 19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투앙에서 발견했다. 청동으로 만든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시트 부분은 분홍색 실크로 천갈이를 했다. 2 얇은 천 소재의 커튼이 달린 서쪽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소파 뒤 벽에는 이탈리아의 예술가 파올라 피바의 빨간 진주로 만든 작품이 걸려 있다. 왼쪽 천장에 매달아놓은 전등은 바네사의 아이디어다. 한지로 만들어진 전등갓 3개를 이어 붙였다. 3 연보랏빛 카펫 위에 바네사 브루노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구두가 댄스 파티에 초대되기를 기다리며 놓여 있다.
바네사는 아파트 벽을 허물어 동선을 넓힌 뒤 그 자리에 부엌과 거실 그리고 복도를 새로 만들었다. 높은 천장과 탁 트인 공간은 키 낮은 가구들로 채워서 공간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쉽게 방으로 이동할 수 있다.
바네사는 양초 애호가이기도 하다. “양초는 덴마크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물건이죠. 덴마크의 겨울은 어둡고 기니까요.” 양초든 전등이든 모든 불빛은 바네사에게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바네사의 집에는 수많은 종류의 전등이 탁자 위 또는 벽이나 천장에 있는데 각각의 전등은 방의 분위기를 전혀 다르게 연출한다. 콘크리트로 마감한 부엌은 다른 곳과 자연스럽게 경계를 이루며 나무에 옻칠을 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나머지 공간의 바닥 마감과 대조를 이룬다. 부엌은 스테인리스 소재의 가전제품과 부드러운 연보랏빛 페인트로 칠한 수납장이 조화를 이루었고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식탁과 소파 밑에 깐 연보랏빛 모 소재 카펫과의 조화도 훌륭하다. 바깥으로 드러난 어두운 빛깔의 대들보는 하얀 벽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 바네사의 아파트는 안방과 딸 룬의 방, 거실, 두 개의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과의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녀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는데 탁 트인 부엌에서 손수 준비한 음식을 대접한다.
1 앤티크풍 의자 왼쪽에는 바네사가 디자인한 사랑스러운 살굿빛 면 소재 백이 놓여 있다. 2 바네사가 연출한 수많은 ‘그림 같은 장면’ 중 하나. 오래된 거울 앞에 커다란 조개껍데기를 놓고 그 위에 목욕 스펀지를 올렸다. 화병에 담긴 꽃은 수국이다. 3 부엌 싱크대 아래쪽 선반은 오닉스 소재고 위쪽 선반은 브루노가 직접 색을 섞어 만든 연보랏빛 페인트로 칠했다. 바닥은 콘크리트로 마감해 거실과 경계를 주었다. 4 튼튼해 보이는 소나무 재질의 식탁에 2가지 타입의 의자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나는 메탈 소재에 검은 가죽 시트고 다른 하나는 메탈과 하얀 플라스틱 소재다. 모두 1960년대풍의 의자로 파리의 고가구숍에서 들여왔다. 식탁 위에는 폴리프로필렌 소재로 만든 1950년대풍 전등 3개를 설치했다. 집주인의 매력적인 연출 덕분에 멋진 다이닝 공간이 연출되었다.
바네사의 아파트는 동서 방향으로 모두 해가 들어온다. 오전에는 딸 룬의 방을 통해 해가 들어오고 오후가 되면 탁 트인 거실을 환하게 비춰준다. 바네사는 햇살을 막지 않기 위해 거실 창문에 하얀 커튼을 달았다. 곳곳에 프랑스와 덴마크의 벼룩시장에서 구매한 소품들로 빈티지하면서도 모던함을 잃지 않은 공간으로 꾸몄고 남성적인 메탈 소재와 여성스러운 파스텔 컬러의 패브릭을 적절하게 섞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듯 아파트 벽에는 진주로 만든 빨간 조형물이 걸려 있다. 이탈리아의 예술가 파올라 피바 Paola Piva의 작품이다. “저는 집 근처에 있는 갤러리를 즐겨 찾곤 해요. 새로운 작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정말 기분이 좋죠.” 바네사의 아파트는 전체적으로 분홍색과 초록색, 연보라색의 파스텔풍이 주를 이루고 있다. “분홍색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 중에 하나예요. 정말 다양한 명암을 가지고 있는 색이죠.” 스칸디나비아와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라는 바네사의 독특한 성장 배경은 그녀의 생활방식뿐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색에서도 드러난다. 유럽 남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르딕풍의 은은한 색조와 강력한 색조가 어우러져 있다. “여러 문화를 성장 배경으로 지닌 탓에 다양한 방법으로 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아요.”
바네사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휴식과 공상을 즐기는 한편 좋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딸 룬은 휴가 때마다 사촌과 함께 이탈리아와 덴마크를 방문하며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체험한다. 바네사는 빠듯한 일정에도 잠시 짬을 내어 딸과 여행하곤 한다. 바네사의 어머니도 덴마크 여행에 동행하곤 하는데 손녀와 딸과 함께 코펜하겐에서 쇼핑을 즐긴다. “덴마크의 새로운 트렌드를 볼 수 있어서 좋아요.” 하지만 덴마크 여행이 무엇보다 좋은 것은 할머니의 고향에서 3대가 함께 일몰을 바라보며 여유 있게 차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에디터 줄리아 밍카를리 Julia Mincarelli | 포토그래퍼 비르짓타 울프강 드레저 Birgitta Wolfgang Drej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