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두고 볼수록 깊은 우물처럼 그 멋과 맛을 길어 올리는 집.
크리에이터 정지욱 대표의 집 이야기.
20년간 인테리어 회사 그루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는 정지욱 대표의 활동은 셀 수 없이 많고 그 범위는 한없이 넓다. 청계천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서울시립 미술관 전시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대전 복합터미널의 외부 광장 디자인, 금호 미술관의 바우하우스(유토피아전) 전시,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트 페어 ‘디자인 메이드’, 파리 메종&오브제의 한국관 전시 공간 기획, 한남 더 힐의 커뮤니티 센터 리노베이션 등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무수히 많다. 공공 디자인부터 기업 프로젝트, 전시 기획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그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는 굳은 결심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묘목처럼 심어야 하는 분도 있고 수형을 잡아 멋지게 심어야 하는 분도 있죠. 또 어떤 이에게는 그늘이 되게끔 심어야 해요. 사람과 공간의 특성에 맞춰 완성하자는 마음으로 회사 이름을 지었어요.” 정지욱 대표는 아픈 곳을 진단하는 의사처럼 클라이언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친다고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올바른 진단을 내리는 이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204㎡의 이 집에는 따스한 기운이 가득했다. 흔히 큰 평수대의 집에서 볼 법한 화려하고 커다란 가구 없이도 잔잔한 힘이 느껴졌다. 분명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수십여 점의 작품이 걸려 있는 데도 말이다.
감성을 울리는 클래식 음악과 코끝을 스치는 기분 좋은 향에 빠져들던 차 정지욱 대표가 집 안 곳곳을 채우고 있는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30대 초반부터 수집을 시작했어요. 가장 처음 구입한 게 권대섭 도예가의 달항아리예요. 이걸 받치고 있는 작은 책장도 권 선생님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 시대 사랑방 책장이에요.”
일찍이 백자와 고가구를 구입할 정도로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이 한몫했다. 섬유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가 남미, 유럽, 일본, 미국 등지에서 수집한 천을 모아둔 보물 창고가 그에게는 놀이터였던 것. “당시 대여섯 살 정도였죠 아마. 크리스챤 디올 손수건, 디즈니 캐릭터가 새겨진 손수건 등 정말 다양했어요. 그것들을 모아 직접 패치워크처럼 이어 붙이며 놀았어요. 그 자투리 천들이 제게는 최고의 놀잇감이었던 거죠.”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인생에는 늘 예술이 함께했다. 그루 스튜디오의 첫 출발은 통의동의 예술복합문화공간인 ‘브레인 팩토리’의 2층이었고, 덕분에 그 당시 유망한 젊은 작가들과 자연스레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몇 해 전 유명을 달리한 옥인 콜렉티브의 진시우 작가의 작품에 담긴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사각형의 캔버스에 ‘이 작품을 10년 뒤에 가져오시면 이 금액의 20배가 되는 작품으로 돌려주겠습니다’라고 쓰여있었어요. 실제로 10년이 지난 뒤 찾아갔고, 복도에 걸린 이 작품이 바로 교환 받아온 거예요.”
또 현관을 열자마자 보이는 김희원 작가의 사진 작품 역시 협업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들이게 된 것. 그렇게 이 집에 걸린 모든 작품은 정지욱 대표와 작가가 함께 쌓아온 이야기와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작품을 고를 때 작가의 성향도, 인품도 중요하거든요. 작가의 인생을 내 공간에 들이는 일이잖아요. 나이가 젊든 경력이 많든 적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모습과 인생관이 작품에 담겨 있는지 봐요.”
놀랍게도 이 집은 갖고 있던 작품과 가구를 들인 것 외에는 3년 전 입주할 당시 그대로다. 신축 아파트여서 어디 한 곳도 손대지 않았다. 대신 확 트인 숲뷰와 높은 천고를 살리기 위해 아주 작은 소품 하나조차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저는 화려하기보다 깔끔하고 클래식한 걸 좋아해요. 가구의 높이가 낮아 시선에 거슬리지 않는 것을 선택해요. 조선 시대의 사랑방 가구를 제일 좋아하는데, 고가구의 형태를 보면 굉장히 모던해요. 과하지 않고 두께감도 얇아서 현대의 미니멀한 가구와도 잘 어우러지죠. 자세히 보면 작품의 액자 프레임도 전부 얇거든요.”
이 집의 또 다른 백미는 작은 테라스와 빛이 듬뿍 드는 식물 방이다. 몇 해 전 반려견을 잃은 슬픔을 대신하기 위해 식집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물을 주고 틈틈이 식물을 가꾸는 일이 그의 유일한 취미다.
“누군가는 한강 뷰가 펼쳐지는 모습에 ‘와 멋지다!’라고 감탄하겠지만 저는 시선 높이에서 보이는 걸 좋아해서 저층을 선택했어요. 좋은 분들,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와인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그 정도면 충분해요. 갇혀 있는 집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이 집을 떠나겠지만 사는 동안에는 같이 나누면서 지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