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건축가 마승범과 공간 디자이너인 아내의 철학과 감각이 녹아든 집. 재료와 구조, 가구 하나까지도 설계자의 깊은 고민과 애정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마승범 건축가의 디자인 철학이 담긴 OP 시리즈 가구. 거대한 건축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시작된 책장 디자인이 OP 시리즈로 발전했다. 모듈형 구조로 여러 개를 쌓거나 나란히 배치해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따스한 햇살이 스미는 거실. OP 시리즈 가구를 중심으로 단순한 형태의 기성 가구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장 푸르베 다이닝 체어와 함께 배치된 다이닝 테이블 역시 제작한 것.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마승범 건축가. 사이드 테이블 위의 작품은 민준홍 작가의 작품으로 공간에 예술적 깊이를 더한다.
서울 이태원의 한 조용한 골목길. 스튜디오 SMA의 대표이자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건축학부 교수로 활동 중인 마승범 건축가는 건축과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며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창작자다. 공간 인테리어는 물론 가구와 오브제 디자인까지 아우르며, 그의 작업은 기능과 미학의 조화를 통해 독창적인 건축적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 그와 그의 아내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장을 열었다. “집은 나를 편안하게 하고, 다시 에너지를 재충전하며, 사소한 걱정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해요. 그리고 그런 공간은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진정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공간과 형태를 통해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마승범 건축가의 철학은 그의 작업에서, 그의 삶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결혼 후, 부부가 처음 머물렀던 집은 서울 이화여대 근처의 작고 아늑한 아파트였다. 이후에 좀 더 넓고 편리한 환경을 찾아 한남동으로 옮겼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색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태원의 오래된 아파트를 발견했다. 50년의 세월을 머금은 이 건물은 그들에게 주거 공간 이상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고, 부부의 삶의 새로운 시작을 여는 장소로 더 없이 완벽했다. “우리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 곳이어야 했어요. 단순히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는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캔버스 같은 집을 원했어요. 똑같은 아파트 레이아웃에서 살아가는 대신, 이곳에서 우리만의 색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태원 집은 부부의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건축가와 공간 디자이너라는 전문가 커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집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오래된 건물의 구조적 특성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키며, 그들의 삶의 철학을 집 안 곳곳에 담아냈다.

시각적 불필요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납 디자인에 세심하게 신경 쓴 주방.그 덕분에 간결한 선과 면이 더욱 돋보인다.

수납장은 천장 끝까지 올리지 않고 상단은 글라스로 마감해 답답함을 덜고 시각적 개방감을 더했다.
집의 중심에는 마승범 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한 OP 시리즈 가구가 있다. OP는 ‘Opus’의 약자로, 음악에서 작품 번호를 의미한다. “OP 시리즈는 단순히 기능적인 가구가 아닙니다. 음악에서 비례와 리듬이 조화를 이루듯, 건축에서는 구조와 형태를 통해 공간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오브제예요. 기둥, 보, 바닥판 같은 기본적인 건축 요소를 응용해 형태를 만들어냈고, 사용자가 그 형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능도 달라지죠. 단순히 책장을 넘어, 작은 건축물 같은 존재감을 가진 가구로 디자인하고 싶었어요.” 그의 말처럼 OP 시리즈의 책장은 단순한 수납 가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작나무 합판에 도장된 표면은 견고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전달하며, 기성 가구와 함께 배치해 집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 집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다양한 소재의 조화로 다층적인 매력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마승범 건축가와 그의 아내는 바닥에 따뜻한 원목 마루를 깔아 기본 톤을 만들고, 단순한 흰색 벽면을 통해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여기에 금속, 유리, 나무 소재를 활용한 디테일을 더하며 각각의 재료가 가진 특성을 조화롭게 결합했다. “재료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어요. 단순히 재료를 채워 넣기보다, 불필요한 요소를 줄이고 재료 본연의 느낌으로 공간을 완성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공간이 주는 경험이 더 깊어지고,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집의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현관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스테인리스 소재로 천장을 마감해 겨울 호수의 얼음처럼 은은하게 반사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스테인리스는 그 자체로 공간의 깊이를 확장시키는 매력이 있어요. 천장이 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면서, 현관에서부터 집 안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감각을 만들고 싶었어요.” 주방 역시 부부가 애정을 담아 설계한 공간이다. 기본적인 레이아웃을 직접 구상한 뒤, 주방 가구 브랜드 보비아 Vobia와 협업하여 디테일을 완성했다. 대리석 대신 유지 관리가 용이한 스테인리스 아일랜드는 특히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스테인리스의 반사되는 빛은 공간에 깊이감을 더해줄 뿐 아니라, 현관과 마찬가지로 겨울철 호수에 낀 얼음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적인 요소까지 더했기 때문이다. 이태원 집은 단순히 부부의 취향을 반영한 공간을 넘어, 그들의 삶과 철학 그리고 이야기가 담긴 장소다. 불필요한 것은 덜어내고 진정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한 마승범 건축가 부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애정과 철학이 담긴 안락한 보금자리는 두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아낸 작은 우주 같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화사한 주황빛 그림은 채지민 작가의 작품으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태원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테라스.

거실장 한쪽을 채우는 아내의 취미인 어린이 동화책 수집품. 다양한 동화책이 공간에 따뜻함을 더한다.

천장 끝 상단을 글라스로 마감해 구조적 단조로움을 해소하며 디테일에 재미를 더했다.

마승범 건축가의 홈 오피스. 실용성을 고려해 디자인한 OP 시리즈 가구가 공간을 채운다. 벽면에는 현관과 같은 채지민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공간 디자이너인 아내의 서재. 잉고 마우러의 조명을 포인트로 활용해 세련된 감각을 더했다.

아늑하면서도 절제된 부부 침실. 침대 프레임 역시 맞춤 제작으로 공간에 조화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