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경계

무언의 경계

무언의 경계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혜인과 크리에이터 두 명이 함께 사용하는
연희동 작업실은 일하며 머무는 곳, 그 경계가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공간이다. 고정되지 않은 배치, 느슨한 구조, 취향이
스며든 가구 사이로 각자의 리듬이 조용히 흐른다.

어두운 목재 기둥과 천장에 그은 선이 드라마틱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이혜인 디자이너가 애정하던 가구들로 꾸민 휴식 공간.

작업실을 공유하는 (왼쪽부터) 김영경 아트디렉터, 배민아 작가, 이혜인 디자이너. 작업실을 든든히 지키는 반려견 ‘버드’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연희동 오래된 주택 1층. 외부에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곳은 집이자 사무실, 혹은 작은 갤러리처럼 느껴진다. 1960년대 지어진 이 건물은 이혜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친구인 금속공예 작가 배민아, 아트디렉터 김영경과 함께 쉐어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들은 2023년부터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시작은 조금 특별했다. 반려견 ‘버드’를 산책시키다 건물주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사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동네의 ‘낡은 주택’은 지금의 ‘살고 싶은 사무실’로 변신했다. 이 사무실은 일반적인 오피스와는 거리가 멀다. 고정된 책상이 없고, 벽도 없다. 대신 천장에는 라인을 그었다. 기둥을 따라 이어지는 선은 구조적인 역할뿐 아니라 공간을 나누는 ‘무언의 경계’로 작동한다. 벽 대신 라인을, 문 대신 시퀀스를 만든 셈이다. “공간 안에 답답한 구조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둥을 활용해 공간을 여섯 개로 나눴고, 중앙 기둥에는 거울을 감쌌죠. 반사된 선들이 이어지면서 전체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은 아이디어였지만,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 공간에서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도했다. 스튜디오에는 이혜인 디자이너의 취향이 곳곳에 스며 있다. 신발장이 있던 자리는 문을 떼내고 책장으로 바꾸었고, 자동문이 있던 입구에는 스리랑카 스타일의 시그니처 문이 들어섰다. 오래된 나무 창틀과 알루미늄 샤시 역시 그대로 살렸다. 이질감보다는 묘하게 잘 어울린다. 또한 스튜디오 곳곳에는 디자이너가 오랫동안 모아온 가구가 놓여 있다. 제각기 다른 의자가 모여 있는 큰 테이블은 정사각형 테이블을 연결한 것인데, 필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이 가능하다. 소파는 계절이나 기분에 따라 창가 쪽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배치는 자주 바뀌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일반 사무실의 단점 중 하나는 환경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싶다. 이곳은 배치를 바꾸는 일에서부터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있다. 조명 선택도 흥미롭다. 이전에 로스팅 창고로 사용한 흔적처럼 벽 한쪽엔 커다란 환 기구가 있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벽을 돌출시켜 벽등을 설치했다. “7~8년 전부터 집에 묵혀둔 조명이었어요. 구조상 한국에서 잘 쓰이지 않는 형식인데, 드디어 이번 기회에 사용하게 되었죠.”

세 친구의 작업물이 고루 모여 있는 작업실.

휴식 공간에 앉아 바라본 작업실 전경. 작업실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테이블에는 이혜인 디자이너가 수집한 제각기 다른 의자들이 모여 있다.

사무 공간이면서도 일상의 휴식이 가능한 이곳은 일하는 방식,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가능하게 한다. 날마다 바뀌는 가구 위치, 자연광이 닿는 테이블, 마당을 향한 창가. 이 모두 이들이 꾸려나가는 유연한 리듬의 일부다. 그저 예쁘게 잘 꾸며진 오피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와닿은 느낌, 그게 이 공간이 주는 진짜 매력이다.

테이블 위 작은 오브제, 선반 위 작품들은 오랜 시간 이혜인 디자이너가 수집해온 애장품이다.

빈티지 행거를 뒤집어 조형적인 오브제로 연출했다.

김영경 아트디렉터 책상에서 바라본 모습. 세 사람의 책상이 같은 방향을 보며 나란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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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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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시간이 머문 곳

장인의 시간이 머문 곳

장인의 시간이 머문 곳

장인의 손끝에서 비롯된 정신은 물건을 넘어 공간에도 자리를 잡는다.
기술과 철학, 일상의 온도가 고요히 흐르는 일본의 두 공간.

2층의 라이브러리 공간 ‘더 머티리얼스 랩’에서는 가리모쿠의 아카이브와 재료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

가리모쿠 리서치 센터의 외관.

가리모쿠 리서치 센터
일본 대표 목재가구 브랜드 가리모쿠가 지난해 말 도쿄에 새로운 스폿을 열었다. 니시아지부에 위치한 가리모쿠 리서치 센터 Karimoku Research Center는 다양한 파트너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공동 창작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신규 컬렉션을 전시하는 기존의 가리모쿠 커먼즈 도쿄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시를 하고, 지난 세월의 브랜드 아카이브를 경험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개더링 플레이스다. 연간 4개 테마를 기준으로 한 기획 전시를 통해 방문객은 가리모쿠 가구에 내재된 장인정신과 아카이브를 살펴보고, 아이치현 본사와 공장에서만 볼 수 있는 프로토타입과 기술 샘플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유도하고, 방문객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주는 것이 가리모쿠의 목표다.

가리모쿠만의 개성을 녹여낸 내부 공간.

지하 1층의 다목적 공간 ‘더 스터디’는 세미나와 이벤트를 위한 다기능 홀이다.

분기마다 전시 테마가 바뀌는 1층 전시 공간 ‘디 아카이브’.

INTERVIEW 가리모쿠 리서치 센터 팀
가리모쿠 리서치 센터는 쇼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런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리게 되었는가? 우리는 쇼룸뿐 아니라 브랜드의 역사, 철학, 기술력을 종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곳은 아카이브 전시, 워크숍, 토크 이벤트 등을 통해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 그리고 일반 대중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제품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브랜드의 깊은 이해와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공간은 모두 3개 층으로 이루어졌다는데, 각 층에 대해 설명해주기 바란다. 각 층 모두 저마다의 특색을 지녔다. 면적 77㎡ 규모에 천고 5.2m로 설계된,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는 1층의 ‘디 아카이브 The Archive’는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2층 라이브러리 공간 ‘더 머티리얼스 랩 The Materials Lab’에서는 방문객이 가리모쿠의 과거 프로젝트를 살펴보고 다양한 목재 샘플, 옻칠, 기타 재료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지하 1층의 다목적 공간 ‘더 스터디 The Study’는 세미나와 이벤트를 위한 다기능 홀과 라운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가구를 가리모쿠 제품으로 꾸민 이 공간은 약 6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200인치 대형 스크린과 완비된 주방, 그리고 천고 5m의 규모를 자랑한다. 가리모쿠만의 장인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2층의 더 머티리얼스 랩에서 우리 장인정신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방문객이 목재의 선택, 가공 기법, 마감 방식 등을 가까이에서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다. 또한 과거의 제품과 생산 과정을 기록한 문서 등의 아카이브를 적극 활용하여, 기술이 어떻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공간 전반의 설계 또한 신경 쓴 부분인데, 가구의 아름다움과 정교한 기술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가리모쿠는 특히 목재가구에 집중한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가리모쿠만의 고유한 유산은 무엇인가? 목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도의 기술력.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통해 전통적인 기법과 현대적인 디자인을 조화시켜온 경험이 곧 우리만의 특징이다. 또한 친환경적인 재료 선택과 생산 공정을 통해 지속 가능한 제조 방식에 대한 책임감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 가구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전념해왔다는 점이 가리모쿠만의 중요한 유산이다. 앞으로 이 공간이 어떤 곳으로 자리 잡기를 원하는가? 브랜드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중심지가 되었으면 한다. 가리모쿠의 역사, 기술, 철학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자, 디자인과 장인의 기술이 융합되는 교류의 장으로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이곳이 일본의 뛰어난 장인정신과 디자인을 세계에 소개하는 플랫폼이 되기 바라며, 협력자들과 함께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그리고 지속 가능한 가구를 고민하고 창조해나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바란다.

다양한 소재의 촉각적인 체험이 가능한 택타일 하우스의 내부 모습.

자연과 어우러진 한적한 장소에 위치했다.

일본 미야기현에서만 채굴되는 다테관석으로 제작한 세면대.

에치젠 와시 기법으로 만든 미닫이 창문.

택타일 하우스
택타일 하우스 Tactile House는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공예 잡화점 나카가와 마사시치 상점과 울 카펫 전문점 홋타 카페트 Hotta Carpet가 지난 3월 설립한 스테이 겸 쇼룸 시설로, 오사카에 위치했다. 건축 자재의 촉각적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은 625㎡ 대지 위에 총 면적 약 195㎡ 규모로 지어졌으며, 1층은 쇼룸과 사무실, 2층은 숙박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곳곳에는 택타일 머티리얼 주식회사가 장인과 협업해 개발한 재료가 세심하게 적용되었다. 중앙에는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전통 공예 기법인 에치젠 옻칠로 마감한 장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양모가 혼합된 화지를 사용한 미닫이 창문에는 일본 전통 종이 중 하나인 에치젠 와시의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다. 세면대는 일본 미야기현에서만 채굴되는 다테관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습식 공간을 포함한 실내 전체에 양모 카펫을 깔아 감각적 체험을 극대화했다. 손끝, 발바닥, 그리고 온몸으로 공예품과 자재의 매력을 깊이 있게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INTERVIEW 택타일 머티리얼 대표 마샤야 홋타
숙박 공간과 쇼룸 시설을 결합한 형태가 매우 독특하다. 이런 공간을 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쇼룸에서 경험하는 체험은 일시적인 반면, 우리 시설에서는 하룻밤을 보내며 촉각적인 자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택타일 하우스는 자재와 공예품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잠깐의 접촉이 아닌, 실제로 ‘함께 생활하며’ 비롯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이 공간을 만든 택타일 하우스 주식회사는 지난 3월 나카가와 마사시치 상점과 홋타 카페트가 공동으로 설립한 합작 회사인데, 장인 건축 자재의 개발과 판매를 전문으로 한다. 택타일 하우스는
촉각적인 매력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시각에만 의존해 주거공간을 선택하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자연에서 비롯된 고요하고 따뜻한 촉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거 방식을 제안하고자 했다. 장인정신이 깃든 재료를 통해 일상에 깊이감과 진정성을 더해주는 공간을 지향한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 대신,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에 위치한 점도 인상적이다. 택타일 하우스 오사카에서 차로 몇 분 거리에 홋타 카페트의 본사가 위치한다. 이번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숙박사업이기에 관리와 감독이 용이한 장소를 택했다. 향후에는 숙박과 함께 홋타 카페트 공장을 견학할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이 부지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택타일 하우스 오사카의 인근 부지가 ‘도시화 조정구역’으로 지정되어 경관을 해칠 수 있는 건축물이 향후에도 들어서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고 평온한 분위기를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건축 자재와 소품에 일본의 전통 공예 기법과 자재 특성이 잘 녹아들어 있다. 각각을 구상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인가? 기준은 크게 자재를 선택할 때와 제작자를 선택할 때로 나뉜다. 자재를 선정할 때는 뚜렷한 촉각적인 특성을 지닌 자재와 우리가 진심으로 가공하고 싶은 소재를 우선순위로 둔다. 제작자, 즉 장인을 선정할 때는 정교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강한 사명감과 목표 의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인지를 본다.

1층 쇼룸엔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손끝, 발바닥 등 온몸으로 카펫, 타일 등의 자재를 느껴볼 수 있다.

장인정신을 계승하고 현대인에게 친근한 방식으로 다가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나카가와 마사시치 상점은 ‘일본 공예를 부흥시키자’는 철학 아래 공예 기반의 생활용품을 기획, 제조, 판매하고 있으며, 공예 업체를 대상으로 한 컨설팅도 병행해왔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공예 부흥이 생활소품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테리어와 건축 자재 같은 좀 더 크고 실질적인 영역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일본도 카펫을 생활화하자’는 비전을 가진 홋타 카페트는 양모 카펫의 제조와 판매에 힘써왔고, 점차 바닥재에서 공간 전체에 걸쳐 소재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이 두 브랜드의 철학과 비전이 만나 택타일 머티리얼이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본래의 비전을 유지한 채, 이제 건축 자재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장인정신의 가치를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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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엮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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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편을 실로 잇고, 자연의 숨결을 감싸안은 채 펠트 위에 본질을 새기는 이지영 작가의 ‘아르 드 비브르’.

따뜻한 펠트 작업은 이지영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지영 작가의 책 ≪아르 드 비브르≫ 출간을 기념한 전시가 지난 3월 TDA 하우스에서 진행됐다. 작가의 작업실을 옮겨놓은 듯한 전시장 풍경.

핸드 크래프트 작가, 클래스 강사, 펠트 아티스트 등 이지영 작가를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는 자신을 ‘일상을 기록하는 작가’라고 소개한다. 최근 이지영 작가가 출간한 책 ≪아르 드 비브르 Art de Vivre≫는 그 일상의 조각을 엮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공예를 전공하고, 지금까지 작업을 하며 이어온 삶의 궤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지난 3월 TDA 하우스에서 그의 책 출간을 기념하는 동명의 전시 또한 자리했다. ‘아르 드 비브르’는 프랑스어로 생활의 예술을 뜻한다. 삶의 단편들이 모여 예술이 된 다고 믿는, 작업의 결과만큼이나 그 과정을 중시하는 작가에게 걸맞은 단어다. “‘일상’을 키워드로 잡은 거예요. 일상 속에서 생긴 사소한 사건조차 예술로 만들고 싶은데, 그것을 제 방식으로 어떻게 풀면 좋을지 고민하다 ‘자연’이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예술과 가장 가까운 제 상태는 자연이라고 생각해요. 그 형태와 색감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무한한 상상력이 생기고요.” 자연 중에서도 특별히 조명한 것은 돌, 식물, 흙이다. 캠핑을 가거나 등산을 하며 직접 모아온 줄무늬 돌에서 착안한 컵받침은 차를 마시며 나누는 소통의 시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식물을 통해서는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법을 익혔다. 나무에 잎이 나고 열매가 처음 맺힌 순간부터, 그것이 말라가며 변화하는 색과 형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이를 작업으로 승화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누군가의 작업을 돈으로 살 수는 있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까지 생각한다면 사실 그 작품을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는 거죠.” 도자를 전공한 작가는 흙을 빚는 시간 동안 이 자연이 낳은 부산물과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그는 현재 도자를 빚는다는 생각으로 펠트 작업을 하고 있다.

돌, 곤충, 식물 등 자연 요소는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2층에서 내려다본 전시장 풍경. 책 속 작품들이 실제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미소 짓는 이지영 작가.

이지영 작가는 ≪아르 드 비브르 Art de Vivre≫를 통해 자신의 서랍을 열고, 차곡차곡 모아온 보물을 기꺼이 타인과 공유한다. 자신의 작품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과정은 그가 작업을 완결하는 최종 단계이자 목적과 같기 때문이다. 책에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작업 도구를 촬영한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앤티크한 화구 박스가 눈길을 끌었다. 출처를 묻자 파리의 한 빈티지 마켓에서 샀다고 했다. “저는 한 인물이 작업에 쏟아낸 모든 시간과 철학을 보여주는 건 작품보다 도구라고 생각해요. 빈티지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도구를 살 때 누군가의 흔적과 세월을 사는 거죠.” 박쥐 형태의 펠트 반짇고리에도 사연이 있었다. “계속 해서 자연을 들여다보게 되니, 멸종위기 종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아끼는 수밖에 없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소소하게나마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어요.” 평소 박쥐를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해온 작가인 만큼, 반짇고리라는 오브제를 통해 일상의 삶이 예술과 융합되기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작업 도구가 작품이 되고, 작품이 작업도구가 되는 것. ‘아르 드 비브르’는 책 이름인 동시에 이지영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인 것이다.

말린 과일 열매가 펠트를 통해 따뜻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파리의 빈티지 마켓에서 구매한 화구 박스엔 누군가의 정든 손길이 묻어 있다.

펠트로 만든 ‘도자 용기’ 안에 실이 보관되어 있다.

멸종위기 종인 박쥐를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 이지영 작가.

오랫동안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해 탐구해왔다는 이지영 작가. 그 답은 결국 그가 지금까지 작업해온 것에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 다 해답이에요. 그걸 몸은 느끼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모르고 있었어요.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일하려면 계속해서 무언가를 들여다봐야만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알게 된 거죠. 결국 우리는 처절하게 무언가의 본질 자체를 들여다볼수록 나를 찾게 돼요. 뚜렷한 희망도 찾았다. ‘목표’가 아닌 ‘희망’이라 재차 강조한 그였다. “저는 결국 행복을 나눠주는 역할을 할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제가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거예요. 돌 작업을 하면서 시작되는 어떤 정이나, 마지막에 실을 감는 행위 자체도 저는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이 단편들이 모여서 인생이 되는 거고, 저는 펠트라는 소재를 통해 이를 따뜻하게 엮어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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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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